49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지금 우리 쪽에서 밑층에 내려가 있는 놈이 있어?"
"없죠."
53층.
검술 명가의 본당내부에서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 우리는 탑 오르랴 마법 명가 쪽 견제하랴 정신이 없는데…."
김준석.
검술 명가의 소가주, 장로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기지수.
시간이 흐른 뒤 검술 명가의 가주가 되리라고 촉망받고 있는 인재였다.
"그 소문이 어디서 들려오는 건데?"
"여기저기서?"
"이런 미친…."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말했다시피 그들은 지금 탑을 오르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법 명가가 잠시 주춤한다는 것은 이미 첩보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마법 명가가 탑을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거나 자신들과의 경쟁에서 손을 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검술 명가 내부에서 그들이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잠시 웅크리고 있을 뿐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아직 그에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했을 뿐.
"마법 명가를 견제하기 위해 우리가 사람을 보냈다는 말도 있어요. 마법 명가 쪽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검술 명가에서 파악한 대로다.
아직 직접적인 항의는 아니지만, 마법 명가 쪽에서도 은연중 검술 명가를 향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강민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설마 한 개인이 두 명가라는 거대 집단을 이간질하리라고 어떻게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김준석은 다시 한번 탄식을 쏟아내며 말했다.
"허, 참.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지들이 못나서 뻘짓 하는 걸 왜 우리 탓으로 돌려?"
그러니 이 상황이 더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떼지도 않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꼴이다.
"이것 한번 보실래요?"
남자가 김준석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뭔데?"
"우리 쪽 사람이라고 추정받는 플레이어에 대한 정보들이에요."
"흠…."
김준석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이거…."
"그쵸?"
누가 봐도 검술 명가 플레이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들이다.
"얘 누구야?"
"안 그래도 이 플레이어와 접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긴 한데."
두각을 드러내는 플레이어와 접촉하고 스카웃하는 건 김준석의 소관이 아니다.
굳이 김준석에게 사사건건 보고를 할 이유도 없다.
그러니 김준석으로서는 강민의 정체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순간이나 다름없다.
"허어…."
김준석이 탄식을 쏟아냈다.
"확실히 물건이긴 한 모양인데. 이놈 접촉하면 바로 나한테 데려와."
"예?"
"궁금해. 뭐 하는 놈이고. 어떤 능력을 가진 놈이기에 이런 행보를 보이는 건지. 와, 진짜…."
김준석은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검술 명가의 일원이 아니면서도 검 하나로 이런 성과를 보이는 이는 손에 꼽는다.
'필시 S급 능력 보유자다.'
확신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내심 아쉬웠다.
'이런 놈이 우리 명가에서 태어났다면.'
검술 명가의 역사 자체가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했다.
"우선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법 명가 쪽은 어떻게…?"
"계속 지켜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절대 놓치면 안 돼."
"알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금세 모습을 감췄다.
***
'그 노인네는 잘 있으려나.'
문득 전생의 생각이 떠올랐다.
25층에서 만났던 대장장이.
성격은 좀 괴팍했어도 실력 하나는 뛰어났다.
고층의 플레이어도 굳이 25층에 와서 그를 찾을 정도로.
골렘의 사원에서 희귀 금속들을 모으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런 금속을 다룰 수 있을 테니까.
'이 시대쯤이면…. 아직 한창 젊을 때겠군.'
전생에서 봤던 노련함은 덜하겠지만 큰 상관은 없다.
내가 알기로 그 대장장이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실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으니까.
'성격은 더 더럽겠지.'
나이를 먹고 한참 유해져서 다행이지, 젊었을 때는 성격이 훨씬 더 불같았다고 들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그 불같은 성격이 정점에 달했으리라.
'그래도 뭐. 미스릴이나 아다만티움 같은 금속을 앞에 들이밀면 군침을 뚝뚝 흘리겠지.'
성격이 더러워도 대장장이는 대장장이다.
고귀한 금속을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지는 않으리라.
특히나 지금같이 미스릴과 같은 금속의 공급이 바닥을 치는 경우라면 더더욱.
'기대가 되는군.'
그 훌륭한 대장장이의 손에서 태어날 내 새로운 장비들.
그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다.
쿵! 쿵!
나는 핵을 잘 묻어 놓은 땅을 발로 꾹꾹 눌러 밟았다.
핵을 꺼내는 동안 몰른이 미리 파 놨던 구덩이다.
최소 1m는 파내야 했으니, 쉽지는 않은 일인데도 몰른은 땅을 능숙하게 파냈다.
정말 훌륭한 일꾼이다.
그 뒤로 천천히 미스릴 골렘의 잔해를 수습했고.
몰른도 옆에서 나를 돕고 있었다.
'핵을 땅에 넣어 놓는 건 당연히 미스릴의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이것 역시 미래에는 널리 알려지게 될 테지만 지금에는 알려지지 않은 정보다.
미스릴의 공급이 많아지며 승부처는 공급 자체가 아닌, 공급이 되는 미스릴의 '질'로 판가름 나기 시작했고.
조금이라도 상태 좋은 미스릴을 공급하기 위해 온갖 방법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중에서 가장 효과가 좋은 게 바로 이 방법이다.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골렘은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간다. 하지만 파괴하면 그 즉시 미스릴은 부식되기 시작하지.'
딜레마다.
핵을 파괴하면 상태 좋은 미스릴을 구하기 힘들고.
파괴하지 않으면 다시 미스릴 골렘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땅속에 박아 넣으면.'
골렘의 잔해는 핵을 찾지 못하고 재결합하지 못하게 된다.
이 원리를 이용한 거다.
잔해를 부식시키지도 않고, 골렘이 재결합하지도 못하도록.
물론 마력이 차단될 정도로 땅을 깊게 파야 한다.
'어설프게 땅을 파 봐야 마력을 온전히 차단하지는 못하니까.'
얼마나 빠르게 땅을 파고 핵을 다시 묻느냐.
이것이 관건이고.
몰른은 그 역할을 잘 수행해줬다.
어쨌든 이걸 발견해 낸 녀석은 천재다.
그에게 감사를 표하며 나는 잔해들을 수습했고.
아공간 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후우…."
우선 21층에서 해야 할 일은 끝났다.
마음만 먹으면 미스릴을 더 구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굳이 그럴 이유는 없다.
돈도 충분하고, 이 정도면 지금 내게 필요한 장비 정도는 충분히 맞출 수 있으니까.
'그럼 이제 다음 층으로 가 볼까.'
22층에 존재하는 오리하르콘 골렘.
당연히 놈을 처치하고 오리하르콘도 구할 생각이다.
각각의 금속은 역할이 다르다.
미스릴은 물리 방어력, 오리하르콘은 공격력.
그리고 아다만티움은 마법 저항력.
이 중의 핵심은 당연히 아다만티움이다.
'특히나 마법 명가를 상대하기 위해선 방어구에 아다만티움의 함량을 최대한 높여야 해.'
한 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미스릴보다 내게 더 시급한 건 아다만티움 쪽이다.
작업을 마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본의 아니게 시선을 끌어 버리긴 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필드 보스인 만큼 등장하는 즉시 맵 전체에 알림이 떠오르니까 말이다.
22층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중에 플레이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럽다, 말도 안 된다와 같은 말들이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다.
독보적으로 강한 존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무력해지는 그런 느낌.
충분히 공감한다.
허나 저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비난 할 이유도 없다.
나는 그저 내가 갈 길을 걸어 갈 뿐이니까.
'가는 길에 천천히 골렘이나 사냥하면서 가면 되겠어.'
이제 곧 40레벨이 될 거다.
***
22층에 올라온 지 1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다.
그동안 열심히 골렘을 사냥했다.
22층의 골렘은 당연히 21층의 골렘보다 훨씬 강하다.
21층의 골렘이 평범한 돌로 이루어진 골렘이라면, 22층의 골렘은 강철 골렘.
움직임은 조금 느려도, 각 개체의 파괴력은 훨씬 높다.
방어력도 마찬가지고.
'한 마리 사냥하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어.'
그래 봐야 1분 남짓.
21층의 돌 골렘에 비해서 5배 정도 느려진 속도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속도인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때.
[레벨이 올랐습니다.]
[40레벨을 달성했습니다.]
[새로운 포식 슬롯이 열립니다.]
'됐다.'
마침 40레벨이 되면서 포식 슬롯도 하나 열렸다.
당장 쓸 데는 없을 것 같지만 미리 열어 둬서 나쁜 건 없을 테다.
'그나저나 이 짓도 오래 할 건 아니야.'
흔히 말해서 노가다.
내 적성에는 맞지 않는다.
같은 작업을 꾸준히 반복하는 것 말이다.
벌써 22층 강철 골렘을 50마리도 넘게 사냥했다.
같은 몬스터를 반복해서 사냥하니 스탯도 이제 거의 오르지 않는다.
'조금만 참고 해야지.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니까.'
오리하르콘.
역시나 전설의 광물이다.
미스릴과 달리 전생에서도 그 가치는 크게 폭락하지 않았다.
애당초 100마리의 강철 골렘을 사냥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걸 혼자 해내고 있는 나는….'
이 정도면 충분히 1인 길드의 전력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겠나.
아무튼 그렇게 열심히 강철 골렘을 때려잡고 있던 중이었다.
[김민희 : 강민 씨]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위드 길드의 김민희였다.
나는 잠시 사냥을 멈췄다.
[예.]
곧바로 답장을 보냈고.
[김민희 : 20층 돌파하셨다면서요?]
답장이 도착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내 소문이 퍼진 모양이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니, 당연한 일이다.
플레이어들의 인재를 찾기 위한 정보망은 탑 곳곳에 펼쳐져 있을 거고.
나 정도의 성적이라면 당연히 위층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을 테니까.
[예. 맞습니다. 두 시간쯤 전에 20층 돌파했습니다.]
[김민희 : 와…. 정말…. 너무 빠르시네요….]
글자뿐이지만 김민희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약속했던 게 있으니까요.]
[김민희 : 약속은 한 달이었는데요.]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내가 보낸 답장에 김민희의 말이 잠시 멈췄다.
그렇게 1분 정도 지났을 때.
[김민희 : 잠시 나눌 말이 있어요. 직접 만나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21층으로 갈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잘 됐다.
위드 길드에서 마법 명가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낸 모양이다.
역시 이들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22층입니다. 22층에 도착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김민희 : 예…?]
[22층이라고요. 방금 올라왔습니다.]
[김민희 : 아니 대체 뭐 하시는 분이세요?]
김민희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 가는 반응이다.
2시간 만에 21층을 돌파했다는 말.
직접 경험해 본 플레이어라면 믿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어쩌랴.
사실인 것을.
[뭐... 그렇게 됐습니다. 아무튼 22층에서 뵙죠.]
[...예.]
그 이후로 김민희의 메시지는 끝이 났다.
***
김민희와 한동희가 도착했다.
"오랜만입니다."
"아, 안녕하세요오오오!"
내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 순간 뒤에서 몰른이 소리쳤다.
"이분은…?"
"…동료입니다. 어쩌다 보니…."
"동료요? 강민 씨가?"
김민희는 영 어색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는 주인…."
나는 다급히 몰른의 입을 막았다.
"주인…?"
"실수입니다. 몰른. 너는 조용히 있어."
"아, 알겠어요오…."
축 처진 몰른이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두 사람은 묘한 표정으로 몰른을 흘끔 쳐다보고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정말 말도 안 되네요. 진짜 22층이라니."
이미 말은 들었지만 진짜 내가 22층에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두 사람은 혀를 내둘렀다.
"마법 명가를 때려 부수려면 아직도 한참 부족합니다."
"으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저들의 얼굴 상태도 영 말이 아니다.
그동안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안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짧게 말해줬다.
길드의 규모는 이전에 비해 1/10 정도 줄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기동력은 훨씬 올라갔고.
마법 명가에 대한 괜찮은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다고 했다.
"빨리 본론으로 가시죠."
머뭇거리는 그들을 보며 내가 말했다.
저들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왔을지 궁금했다.
"그보다 우선 긴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김민희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녀가 한동희와 한 번 시선을 맞추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법 명가 쪽에서 접촉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