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좋다.
혼란스러운 건 잠시.
몰른의 버프는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버프였다.
'스킬 지속 시간 1.5배 상승.'
덕분에 오러 블레이드의 지속 시간은 4분가량으로 늘었고.
뇌전 검 역시 마찬가지다.
뇌전검의 기본 지속 시간은 10초.
기본 지속시간 5초와 마력의 1/10초를 더한 시간.
거기에 1.5배를 추가했으니, 총 15초 동안이나 뇌전검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성능은 둘째 치고서라도 지속 시간 때문에 조금 답답한 면이 있었는데. 이 정도면 앞으로 사냥 속도가 훨씬 빨라질 수 있겠지.'
실제로도 그랬다.
골렘을 처치하는 데 몰른의 버프는 큰 도움이 됐다.
'전생에선 골렘을 사냥하느라 꽤 애를 먹었었지.'
솔직히 말하면 애먹은 정도로 말할 수 없다.
절망했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내 한계가 여기까지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선 놈의 미칠듯한 방어력.'
웬만큼 강력한 스킬이 아닌 이상은 흠집도 나질 않는다.
하찮은 능력조차 없는 나에게 골렘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몬스터였다.
그것뿐인가.
핵을 완전히 박살 내지 않으면 놈은 죽지 않는다.
골렘을 무너트렸다고 잠시 방심하면 곧바로 몸을 재생해 버리기 일쑤다.
다행히 내 나름의 노하우를 얻어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21층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한참 전에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만이라면 다행일 거다.
21층 이후로 이어지는 골렘 사원의 악명은 바로 클리어 조건 때문이다.
'매층마다 골렘 50마리 처치.'
물론 각 개인당이다.
5명이 파티를 이루면 250마리를 처치해야 한다.
끔찍한 조건이다.
그 때문에 죽어나가는 플레이어도 셀 수 없이 많다.
전생의 나도 마찬가지였고.
매층마다 그런 끔찍한 조건을 달성하고 25층에 올라서면.
그때는 정말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괴물이 되어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쉽다.
골렘을 사냥하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는지.
나조차도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그만큼 내가 터무니없이 강한 플레이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지.'
여기에는 오러 블레이드와 충격파의 역할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오러 블레이드의 절삭력은 핵을 단숨에 베어 넘길 수 있었고.
충격파의 파동은 골렘의 몸을 한순간에 무너트렸다.
'뇌전검은 딱히 쓸모가 없지만.'
저 두 개의 능력만으로도 혼자 골렘 십여 마리를 순식간에 처치하고 21층을 헤쳐나가는 중이다.
'전에는 파티를 이뤄야 골렘 한두 마리를 겨우 사냥할 정도였는데.'
새삼 감회가 새롭다.
억울하지는 않다.
전생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내게 포식이라는 능력이 생겼다고 해도 지금처럼 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 끔찍한 기억들이 훌륭한 거름이 되어 줄 줄이야.'
그때 눈앞에 골렘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충격파를 사용했다.
놈을 향해 빠르게 달렸고, 검을 휘둘렀다.
우우우웅! 콰아아앙!
놈을 한 번 내리치자 충격파의 파동이 골렘의 모든 접합부를 파괴했다.
한 번에 바닥에 주저앉은 골렘.
핵이 드러난 순간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어 단숨에 베어 버렸다.
[체력 2를 포식했습니다.]
'10초 남짓.'
골렘 한 마리를 처치하는 데 소요된 시간.
'그리고 이제는.'
20층의 상점에서 미리 구매한 도구를 이용해서 골렘의 잔해를 부쉈다.
'골렘의 잔해 속에는 꽤 괜찮은 재료가 있거든.'
골렘의 전신은 마력이 가득 담긴 암석.
이것 역시 잘 모아 두면 훌륭한 장비의 재료다.
하지만 나는 이것들을 고작 장비 재료로 사용할 생각은 없다.
'더 유용하게 쓸 곳이 있지.'
당연히 지금 이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은 정보다.
골렘의 잔해 속에서 내가 필요한 재료들을 잘 챙겨 아공간에 집어넣고 몸을 일으켰을 때.
"보, 보스 몬스터다!"
웬 뚱딴지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
"한강민? 그건 또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데?"
"지금 아래층에서 꽤나 이름 날리고 있는 녀석이라고 합니다."
"흐흠…."
박승균.
마법 명가의 핵심 일원인 그가 강민의 이름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녀석이 우리 실험실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그건…."
남자가 머뭇거렸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겠지."
박승균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실력 있다고 일개 개인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놈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뭔데?"
"검술 명가, 체술 명가, 창술 명가 등 무투 계열의 명가 쪽에서 그자와 접촉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머저리들이 또 신이 났군."
박승균이 코웃음 쳤다.
하지만 남자의 말은 사실이다.
최단기간 20층 돌파.
강민이 11층에서 20층을 돌파하는 데 고작 3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사실은 이미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이미 한 차례 길드들이 강민에게 접촉했지만, 명가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었건만.
이제는 명가를 움직일 정도로 강민은 대한민국의 탑 내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선 검술 명가 쪽으로는 못 넘어가게 막아야 할 텐데."
"예. 그렇습니다. 놈들에게 한강민이라는 자가 넘어가게 된다면, 우리로서는 막심한 손해일 것입니다."
"그래, 맞는 말이야. 그런 괴물이 적으로 넘어간다는 건…. 생각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잖아."
박승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마법 명가 쪽으로 포섭하는 것도 쉽지 않다.
'검을 주 무기로 쓴다고 했으니 검술 명가 쪽으로 갈 확률이 너무 큰데…. 이를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박승균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좋은 생각이 있다. 놈을 우리 쪽으로 끌고 올 수 있는 좋은 방법 말이야."
"그것이 무엇입니까?"
박승균은 남자를 불러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고.
"한강민. 그자와 가장 먼저 접촉해서 이 이야기를 전해라. 무조건 검술 명가 녀석들 보다 빠르게 접촉해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좋아, 좋아."
박승균이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박승균은 빠르게 이 다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쨌든 건수는 하나 잡았군. 검술 명가 놈들을 압박할 괜찮은 카드야. 한강민이라는 카드를 핑계로 놈들을 조금 밟아 줘도 괜찮겠어.'
역사가 뒤틀리고 있었다.
***
"보스 몬스터라니."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긴 저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골렘을 단 한 방에 쓰러트리는 플레이어라니.
전생의 나도 이런 장면을 봤으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프, 플레이어십니까?"
"맙소사…."
"혹시… 고층에서 내려 온…?"
각종 추측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대답해 줄 필요도, 저들과 이야기를 나눌 이유도 없다.
나는 내 갈 길만 가면 된다.
'당장은 빠르게 탑을 오르는 것 보다 챙길 것들을 다 챙기는 쪽이 낫겠지.'
골렘의 사원.
이곳은 자원의 보고다.
각종 광석들이 산재해 있는 보물 창고나 다름없다.
골렘의 사원에서는 매층마다 특별한 골렘들이 등장한다.
'먼저 20층에서는 미스릴 골렘이 나타나지.'
미스릴 골렘.
골렘의 사원에서 희귀한 확률로 모습을 드러내는 골렘이다.
필드 보스 몬스터.
일종의 이벤트성 몬스터다.
평범한 골렘에 비해서 2배 이상은 강한 몬스터.
'평범한 플레이어들은 놈을 만나도 꽁무니 빼기 바쁘지만.'
미스릴 골렘은 대부분 길드에서 좌표를 찍은 뒤 사냥하는 게 보통이다.
대부분 3~40층의 플레이어로 구성된 파티로 말이다.
미스릴 골렘은 그 정도 인원을 투입할 가치가 있다.
'값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재료니까.'
물론 팔기 위해 미스릴을 구하는 건 아니다.
장비의 재료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나는 20층에서 놈을 찾아내야 하고.'
지금 이 시점의 플레이어들은 미스릴 골렘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당연히 나는 미스릴 골렘을 불러낼 방법을 알고 있다.
위층의 특이 골렘들도 마찬가지고.
'얻을 수 있는 희귀 재료를 모두 얻어서 25층으로 가야지.'
그곳에 있는 대장장이.
그에게 미스릴을 맡긴다면 내 장비의 성능은 한 번에 몇 단계 뛰어오르게 될 것이다.
'자, 그럼 미스릴 골렘 사냥하러 가자.'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저, 저기요!"
"잠시만요!"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괜히 저들과 엮이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하니까.
"미스릴 골렘은 어떻게 생겼나요오!"
그때 몰른이 크게 외쳤다.
"몰른. 입 다물었으면 좋겠는데."
"끼이잉.."
내 말에 몰른은 금세 풀이 죽었다.
이런 건 괜히 떠벌려서 좋을 건 없다.
뒤쪽에서는 다급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뇌전검을 사용해서 속도를 높였고.
그들의 모습은 금세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골렘을 빠르게 사냥하며 미스릴 골렘을 불러들일 재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빠른 속도로 골렘들을 때려 부수며 스탯과 함께 골렘의 잔해들을 모으고 있었다.
***
"미스릴 골렘 이제 곧 나올 때 된 거 아닌가?"
"맞아요. 저번에 미스릴 골렘 잡힌 게 대략 한 달 전이니까…."
"저번에는 뺏겼어도 이번에는 무조건 우리가 잡는 거야."
"당연하죠. 그거 하나 잡으면 돈이 얼만데."
마침 미스릴 골렘이 자연 리젠되는 시간이 가까워온 참이다.
덕분에 21층 골렘의 사원에 미스릴 골렘을 노리고 있는 길드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스릴 골렘 사냥은 당연히 가장 먼저 발견하는 길드가 차지하는 게 규칙.
그러니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탐지형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는 게 이득이었다.
'반드시 우리가 잡아야 한다. 미스릴 골렘 한 마리만 사냥해도 길드의 위상이 달라질 거야.'
길드를 키우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건 돈이다.
때문에 미스릴 골렘은 아직 규모가 크지 않은, 혹은 이제 막 규모를 키우고 있는 길드들에게 주요한 자금 공급원이었다.
그러니까 사활을 걸고 미스릴 골렘을 찾는 수밖에.
심지어 리젠 되는 간격도 한 달에 한 번꼴.
'하아... 진짜 꼭 찾아야 돼. 벌써 여기에서 며칠을 야영했는지. 이제는 지겹다 지겨워.'
일상이다.
중소 길드들의 애환.
성장하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자본주의. 흑흑.'
그렇게 눈물을 훔치며 미스릴 골렘을 찾아 던전 내부를 돌아다니던 그때.
'응?'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만신창이다.
'이제 막 21층에 올라 온 애들인가? 귀엽네.'
문득 과거 처음 21층에 올라왔을 그때가 떠올랐다.
'개고생했었지.'
그렇게 미소 지으며 몸을 돌리려는 그 순간.
"저, 저! 프, 플레이어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끄응…."
매정하게 외면할 수 없어 몸을 돌렸다.
"호, 혹시 고층에서 내려오신?"
"예. 그렇습니다."
"죄, 죄송하지만 저희를 다음 층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정말 너무 힘이 들어서요."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힘듭니다. 저도 지금 매우 바쁜 상황이라서. 그래도 저쪽으로 쭉 가시면."
여자가 한 곳을 가리켰다.
길드의 캠프가 있는 곳이다.
"잠시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이 기뻐하며 여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그들이 떠드는 소리가 여자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 사람은 어디 갔으려나."
"뭐. 벌써 다음 층 갔을 수도 있고. 골렘을 한 방에 잡는 사람인데."
"부럽다. 대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길래…."
'뭐?'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그들이 가고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골렘을 한 방에 잡아?'
말이 안 된다.
그런 플레이어는….
'명가에서 움직였나? 설마. 고작 미스릴 골렘을 잡으려고 명가에서 움직인다는 게 말이….'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요. 아, 그런데 그 사람하고 같이 있던 남자가 미스릴 골렘인가… 그런 얘기도 했는데."
"미친!"
여자는 다급히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망할 명가 놈들. 우리 같은 서민들은 뭐 먹고 살라고.'
그녀는 애꿎은 명가를 탓하며 길드원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