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트라팔은 생각했다.
'과연 나폴리를 이길 만한 녀석이다.'
태연한 척했지만, 트라팔 역시 강민 이상으로 충격을 받았다.
조금 전 입은 상처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처 때문이 아니라, 상처를 입힌 강민의 솜씨 때문이다.
'그 찰나의 순간 공격 방향을 틀었다.'
0.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강민의 검이 움직였다.
어지간한 숙련도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검로의 변경.
덕분에 트라팔은 강민을 향한 공격을 거둬야만 했다.
'의도한 것인가?'
만약 강민이 원래의 방향대로 검을 휘둘렀다면 이번 충돌에서 쓰러지는 건 강민이었으리라.
하지만 찰나의 순간 바뀌어 버린 검로에 트라팔은 다급하게 검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큰일 날 뻔했어.'
트라팔 역시 괴물이다.
찰나의 순간 바뀌어 버린 검로를 포착하고, 강민이 노리는 부위에 정확하게 오러를 둘렀다.
검도 아닌 갑옷.
그것도 일부분에만 오러를 집중한다는 것.
오러를 다루는 어지간한 기사들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오러의 숙련도다.
그럼에도 공격당한 부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만큼 조금 전의 일격은 치명적이었다.
하필 검을 들고 있는 오른팔을 공격했다는 건.
'놈의 의도라는 뜻이겠지.'
트라팔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강민을 노려봤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 나폴리 그 녀석에게 입은 수모를 씻을 수 있겠지.'
트라팔은 과거의 나폴리와 강민을 대조했다.
그 결과.
'모든 면에 있어서 저 모험가가 한 수 위.'
그렇다고 기죽을 트라팔이 아니다.
자신도 강해졌다.
갈고 닦았고, 수많은 피와 땀을 흘렸으니까!
"오너라!"
트라팔이 소리쳤다.
강민은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강민의 신형이 쏘아졌다.
순식간에 트라팔의 시야에서 강민이 사라졌다.
'말도 안 되는 민첩성이다.'
게다가 트라팔을 더 놀라게 만든 건, 강민의 오러.
'전격의 오러라니?"
그런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검은 머리의 모험가들이 특이한 기술을 사용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수준의 모험가는 난생처음이다.
'허나 나의 중검 앞에서 그따위 잔기술은 의미 없는 몸짓일 뿐!'
쿠우우우웅!
트라팔이 검을 휘둘렀고.
그 자리에 강민의 검이 멈춰 섰다.
빠직!
'!!'
트라팔의 눈이 커졌다.
작은 체구.
단단한 근육질이긴 하지만 자신의 반이나 될까 싶은 몸인데.
'이 괴력은 대체…!'
상상 이상이었다.
첫 일격에서 느낀 것과 직접 검을 부딪치고 느껴지는 강민의 괴력이란.
'죽여주마.'
트라팔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자신을 억죄던 열등감에서 완전히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우우웅!
트라팔의 대검이 움직였다.
그는 동시에 하체에 마나를 집중했고.
그의 두꺼운 허벅지가 상체를 우직하게 지탱했다.
거대한 바위조차 산산이 박살 내 버릴 만큼 강력한 일격.
하지만.
쿠우우우웅!
'또?'
강민은 트라팔의 공격을 다시 한번 막아냈다.
그 순간.
빠직!
"흣!"
트라팔은 짧게 기함을 토해내야 했다.
손목이 아리다.
어찌 된 일인가.
분명히 체중과 힘을 실어 내리친 건 자신인데.
강민은 멀쩡하고, 어찌 자신의 손목에 데미지를 입힌다는 말인가.
트라팔은 몰랐지만, 당연히 강민의 충격파 덕분이다.
오우거의 신체로 증폭된 힘.
오러 블레이드로 인해 증가된 공격력.
기형적으로 두껍고 유연한 트라팔의 손목에 꾸준히 데미지를 누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인가.
첫 일격으로 강민의 검이 스쳐 지나갔던 부위에서 타오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솟구치는 아드레날린 덕분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그의 팔은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은 상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강민이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부은 일격이다.
오러로 막아내기는 했지만, 잘리지 않는 것이 다행일 뿐이다.
'말도 안 되는…!'
파앗!
강민이 쇄도했다.
조금 전보다 느려진 속도다.
거기에 오러를 두르고 있던 전류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 기뻐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강민의 괴력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러 역시 건재했으니까.
다시 두 사람의 검이 충돌했다.
콰직!
"크흑!"
트라팔의 팔목이 비명을 내질렀다.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생사가 오고 가는 싸움에서 자신의 상태를 적에게 노출할 수는 없으니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버티며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몇 번의 공방이 다시 오고 갔다.
강민은 트라팔의 검을 기묘한 움직임으로 피해냈고, 쳐냈다.
틈틈히 찔러 들어오는 날카로운 일격은 트라팔의 갑옷 빈틈을 여지없이 노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이상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강민은 몇 번이나 집요하게 부상 당한 부위를 공략했다.
그러던 중.
'오러가 사라졌다. 왜 오러를 없앤 것이지?'
없앤 게 아니라 지속시간이 다 됐을 뿐이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다.
'오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네 놈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놈은 지금 목숨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트라팔은 희망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아니, 더 나아가 승기가 자신에게 넘어왔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강민은 오러가 없음에도 트라팔의 오러를 능숙하게 막아냈다.
이미 오러 블레이드가 없는 상태에서 나폴리와 싸운 경험이 있는 강민이니까.
충격파만으로도 충분히 트라팔의 공격을 능숙하게 방어해 낸 것.
하지만 역시나, 강민의 움직임과 공격력은 한참이나 떨어졌다.
'이대로면…!'
트라팔은 자신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강민은 트라팔의 공격을 조금씩 허용하고 있었다.
강민의 몸에 상처가 늘었고, 피가 흘러내렸다.
지쳤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다.
'이제 끝내주마!'
트라팔이 강민을 몰아쳤다.
강민의 온몸에 크고 작은 커다란 검상이 생겨났다.
'쥐새끼 같은 놈! 이제 한계를 보이고 있구나!'
트라팔은 슬슬 승부가 끝이 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의 민첩한 강민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강민은 치명상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강민을 보며 트라팔은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 차례의 공방이 오고 갔다.
문득 트라팔의 머리에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녀석 혹시….'
피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피하지 않는 게 아닐까.
아주 짧은 시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상처가 늘고 있기는 하지만, 말했듯 치명상은 교묘하게 피한다.
우연이라면 결코 이럴 수는 없을 것인데.
'아닐 것이다.'
하지만 트라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굳이 왜?
이길 수 있는 싸움인데 일부러 공격을 당해준다니.
그렇게 해서 얻을 게 없지 않은가!
빠아악!
"크읍!"
그러는 중에도 강민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오러가 없는 검으로, 혹은 주먹이나 다리로.
부상 당하고 궁지에 몰린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이상하다, 이건 확실히 이상해.'
한 번에 큰 데미지는 아니지만, 피해가 꾸준히 누적되자 트라팔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더 이상 오른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약아 빠진 녀석.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거저 올라온 것은 아니다.'
대안은 충분히 있다.
오른팔이 부상당했다면 왼팔을 사용하면 된다.
수많은 싸움을 거치며 왼손으로 검을 다루는 연습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마쳤다.
왼손 역시 오른손만큼 능숙하게 검을 다룰 수 있으니까.
그가 검을 고쳐 잡으려는 순간.
파직!
"어…?!"
무언가 잘려 나갔다.
그가 멍한 눈으로 강민을 돌아봤다.
어느새 강민의 검 위에 타오르는 오러와, 전류.
'….'
트라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른팔은 더 이상 들어 올릴 수도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왼 팔은 이제 그의 몸에 붙어 있지 않았으니까.
"마, 말도 안 돼..."
"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트, 트라팔 니이이이임!"
기사들의 포효가 두 사람이 서 있는 공간을 가득 울렸다.
***
'제기랄.'
아파 죽겠다.
가슴에 여섯, 양쪽 다리에 열둘.
오른팔이 깊게 패었고, 왼쪽 팔뚝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오러 블레이드와 뇌전검의 지속 시간이 끝난 그 순간부터 놈의 공격을 고의로 허용했다.
피할 수 있었고, 튕겨낼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충분히 트라팔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았다.
당연히 이유가 있다.
'떡밥이지.'
트라팔을 가까스로 이겨냈다는 그런 떡밥이다.
만약 내가 여기에서 트라팔을 압도적으로, 처참하게 죽여 버린다면.
'다른 녀석들이 꽁무니를 뺄지도 모르니까.'
이쪽 세상의 소드 마스터들.
그 녀석들은 높은 자존심만큼이나 잃을 게 많은 녀석들이다.
본래 잃을 게 많은 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신중을 기하기 마련이다.
한 순간의 실수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의 차이로 승리했다는 걸 보여준다면.'
더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킬리만제르를 죽였고, 나폴리를 죽였다.
그리고 트라팔을 근소한 차이로 이겨냈다.
'그런 나를 이기면 저 셋보다 위에 있다는 걸 단박에 증명해 낼 수 있는 셈이지.'
그것을 위한 떡밥이었고.
성공적이다.
기사들의 반응이 그걸 증명한다.
"비겁한 녀석! 네 놈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트라팔님. 근소한 차이였습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닙니다. 궁중의 치유사를 부른다면 즉시 잘린 팔을 봉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결국 놈들의 수준이 그 정도라는 뜻이다.
아마 트라팔 녀석은 눈치챘을 거다.
싸우는 중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싸움이 끝난 순간 직감했으리라.
놈은 결코 나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말이다.
"닥치거라."
"예, 예?"
"닥치라고."
역시나.
트라팔 정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눈치챌 만 하다.
트라팔의 말에 기사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졌다."
[상대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합니다.]
[세 번째 대륙의 네임드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체력 12를 포식했습니다.]
[히든피스 – 수많은 강자들 3/5]
그 말을 남기고 트라팔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나를 찢어 죽이겠다느니 떠들어 대던 놈의 조금 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나 역시 몸을 돌렸다.
이제 놈에게 미련은 없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 관전 포인트가 남아 있다.
이 이후로 트라팔이 어떻게 대처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적당히 아슬아슬했다면서 둘러댔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컨디션이 안 좋았다.
그 정도로 말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기도 하고.'
애초에 놈은 열등감 덩어리.
그런 상태에서 나와의 싸움에 대해서 깔끔하게 승복할 이유가 없다.
'그건 곧 알게 되겠지.'
그러면 이제는 다음 초청장을 기다리며 천천히 레벨을 올려 볼 생각이다.
'순조로워.'
이대로 히든피스를 손에 넣고, 21층으로 올라간다면.
나는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거기 역시 지금 이 시대에서는 알지 못하는 비밀들이 가득한 장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