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빠직!
손목이 비명을 내질렀다.
나폴리의 손목이 아닌, 내 손목이.
'확실히 만만치 않다.'
단 일합을 겨뤘을 뿐이건만 나폴리의 괴물 같은 힘이 느껴졌다.
"흐흐."
비웃음 가득한 나폴리의 짧은 웃음이 내 귀를 두드렸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나폴리의 검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짙푸른 오러가 나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저게 소드 마스터들의 진짜 무서운 점이지.'
오러 블레이드의 절삭력뿐 아니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신체 능력.
'정면 승부는 힘들다는 건가.'
지금의 나도 충분히 괴물이지만, 나폴리는 그 이상이다.
그리고 나도 안 되는 걸 억지로 붙들고 있을 생각은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콰아아앙!
내가 몸을 비틀어 놈의 공격을 피해냈다.
놈의 검이 바닥을 두드리고 파편들이 허공에 튀어 올랐다.
"흐하하하하!"
나폴리가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놈의 공격이 다시 나를 향해 쇄도했다.
'힘은 놈이 앞서지만, 민첩성은 내가 위다.'
뇌전검 때문이다.
내가 현재 놈을 압도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민첩성.
오우거의 신체로 증가된 민첩과 뇌전검의 효과까지 중첩되었으니.
내 민첩성은 놈보다 몇 수 위다.
'뇌전검의 지속 시간이 짧은 게 아쉽긴 하지만.'
뇌전검으로 놈을 끝내야 한다.
카아앙!
나는 놈의 검을 받아쳤다.
정면이 아니라, 미세하게 검을 틀어 측면으로.
"헛!"
놈이 다급하게 침성을 삼켰다.
그 순간.
파각!
검이 놈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깊은 상처는 아니다.
하지만 뇌전검의 효과 덕분에 본래 입어야 할 데미지보다 더 큰 충격을 줬을 것이다.
타다닥-
그 순간 뇌전검의 지속 시간이 끝이 났다.
놈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요상한 기술을 사용하는군."
퉷
나는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어냈다.
놈의 검을 정면으로 한 번 받아냈을 뿐인데 그 충격이 내부로 전해진 모양이다.
장기가 꼬인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30초.'
다시 뇌전검이 활성화되는 그 순간까지 버텨내야 한다.
'해 보자.'
몇 번의 공방을 통해 나와 놈의 격차를 확인했다.
내가 약하지만,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선공은 안 된다.'
놈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빠르게 대처해야 한다.
잠시 후 나폴리가 달려들었다.
빠르고 강하다.
하지만 보인다.
슈악!
검을 내질렀다.
막아내기 위한 검로가 아니다.
타아앙!
쳐내기 위한 검로였고.
성공했다.
놈의 검이 미세하게 위로 들렸다.
빈 공간이 드러났다.
'참는다.'
반격하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어차피 자잘한 상처를 입힌다고 쉽게 쓰러 질 녀석도 아니다.
'확실한 한 방을 노려야 한다. 자잘한 공격은 그 이후에.'
"이노오옴!"
놈이 고함을 내질렀다.
분한 모양이다.
"어디서 잔꾀르으으을!"
부우웅!
오러 블레이드가 공기를 태우며 날아든다.
하지만 역시나.
타아아앙!
검이 미세하게 튀어 올랐다.
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킬리만제르라면 이런 상황을 오히려 즐거워하겠지만 놈은 아니다.
얄팍하고 비겁해 보이는 잔기술을 극도로 혐오하는 녀석이니까.
놈이 바라는 것은 오직 검과 검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서로의 힘을 겨루는 싸움.
'그렇다면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줘야지.'
정정당당한 승부.
그딴 건 관심 없다.
내 목적은 오로지 이기고, 올라가는 것.
그게 나의 삶이었다.
타아앙! 탕! 카아앙!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놈의 약이 오를 만큼 나폴리의 검을 쳐냈다.
아마 내가 녀석의 입장이라고 해도 화가 날 것 같았다.
아무리 강하게, 빠르게 내리쳐도.
닿을 것 같은데 닿지를 않으니까.
그 순간.
'됐다.'
뇌전검의 재사용 시간이 돌아왔고.
치치칙!
검 위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놈은 이미 흥분했다.
반면 나는 아직도 침착하다.
극도로.
그렇다고 여기에서 바로 싸움을 끝내기란 불가능한 일.
'하지만 더욱더 화나게 만들 수는 있겠지.'
이제는 조금 더 공격적으로.
하지만 혼신을 다하지는 않을 정도로만.
카아아앙!
다시 검을 쳐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충격파와 뇌전검의 전류가 놈의 손아귀를 간지럽혔고.
놈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나폴리의 검이 들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미세하게 위쪽으로.
빈틈이 드러났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파득!
내 검이 놈의 발목을 스쳐 지나갔다.
탄내가 코를 간질였고.
놈이 잠시 멈칫했다.
그럼 다시.
촤악!
이번엔 반대쪽 무릎.
놈이 노호성을 내지르며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쳐내지 않는다.
홱!
"?!"
콰아앙!
바닥을 내리쳤고.
놈의 검이 바닥에 박혔다.
저걸 뽑아내는 데에는 0.1초도 채 걸리지 않겠지만, 충분하다.
카득!
"크읍!"
이번엔 놈의 오른쪽 팔꿈치를 스쳐 지나갔다.
이건 유효타다.
검을 들고 있는 팔꿈치를 가격했으니.
평범한 일격도 아니다.
충격파의 파동이 놈의 관절을 갉아냈을 것이고, 뇌전검의 전류가 근육을 마비시켰으리라.
"노오오옴!"
하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정도 부상 따위야 그에게 있어서 모기 물린 것과 다름없다는 듯이.
과연 검성이라는 이름은 거저 따낸 게 아니다.
타아아앙!
다시 한번 놈의 검을 쳐냈다.
전류가 검을 타고 흘렀고.
놈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타다닥-
뇌전검의 사용 시간이 끝이 났다.
나폴리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세하게 어깨가 들썩인다.
땅을 디디고 있는 나폴리의 굳건한 다리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듯 떨리고 있다.
'됐다.'
놈은 이제 서서히 무너질 것이다.
***
"그게 사실이냐."
"예.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흐으음..."
이곳은 탑의 45층.
각각의 명가들과 대형 길드들의 본거지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은 마법 명가의 본거지.
"그러니까 네 생각에는 그 녀석이 검술 명가의 끄나풀 같다는 거고."
"… 확답은 할 수 없겠지만 그 정도의 괴력을 다루는 플레이어는… 그들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17층의 저층에서…."
"그래. 그건 맞는 말이야."
보고를 듣고 있던 남자.
박승균이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검술 명가 놈들이라면 충분히 고층에서 저층으로 내려갈 수 있어. 17층이라고 해서 레벨이 낮은 놈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그 역시도 마음에 걸리는 건 오직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들 뿐이다.
'괴력.'
그것이 바로 검술 명가의 혈계로 전승되는 능력이다.
평범한 플레이어는 결코 따를 수 없는 무지막지한 괴력.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갈고닦은 수련법.
거기에 섬세한 검술이 더해져서 지금의 검술 명가를 이뤄낸 것이다.
"검과 쇠몽둥이로 건물을 때려 부쉈다라…."
"확실합니다."
"그래. 그런 멍청하고 괴팍한 건 검술 명가 놈들밖에는 없지."
하지만 박승균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놈들이 어떻게 눈치를 챈 거지? 그 녀석들은 지금 탑을 오르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은 없을 텐데.'
어디에서 어떻게 그들의 비밀이 새어 나갔는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으니까.
"우선 알겠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무너질 이유는 없다. 다시 공급망을 구축하고 실험실을 꾸려야겠네. 네게 전권을 맡기겠다."
"……!"
"아예 새 사람을 뽑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하던 녀석이 하는 게 좋을 테니까."
그 말을 듣고 있던 남자의 눈이 빛났다.
이것은 기회다.
현재 마법 명가의 주력 사업이기도 한 흑암파 육성.
그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 권한이 생겼다는 건, 위로 올라갈 금동앗줄이 떨어졌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니까.
"잘해 봐. 알겠지만 이건 정말 좋은 기회거든."
박승균.
그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허억.. 허억.."
"후읍.. 후읍.."
나와 나폴리는 잠시 교착 상태에 돌입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서로의 상태를 살폈다.
우리 둘은 모두 거친 숨을 내뱉고 있다.
'싸움이 시작된 건 10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아직 오우거의 신체는 사라지지 않았으니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만큼 짧은 시간동안 서로 전력을 다 쏟아부었다는 뜻이다.
나는 부족한 힘을 속도로 채우기 위해서.
놈은 놈이 보기에 얄팍하고 비열한 나를 짓밟기 위해서.
"햐아아…."
"말도 안 돼. 한강민…. 저 사람 플레이어 맞지?"
"그렇지. 17층에서 동양인은 플레이어밖에는 없으니까."
"어디서 저런 괴물이 튀어나온 거야, 대체?"
주변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저들의 추측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17층이란 저층에서, 대륙의 네임드와 이 정도로 대적할 수 있는 건.
검술 명가의 일원들 밖에는 없을 테니까.
나를 보며 검술 명가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나로서는 일단 칭찬으로 느껴질 만한 이야기다.
'그만큼 내가 강해졌다는 뜻이기도 하지.'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내 이름이 알려지면 곧 명가 녀석들에게도 내 이름이 들어가게 되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상관은 없다.'
아무리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들, 마법 명가에서 나를 범인으로 지목할 리는 없다.
내가 17층에서 이름 조금 날린다고 해서 눈 하나 깜짝할 놈들이 아니니까.
그건 자신감이기도 하고, 오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오히려 나에게 틈을 파고들 기회가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복잡한 생각은 잠시 뒤로 밀어 놓자.
지금 당장은 우선 10층대에 존재하는 히든피스를 손에 넣는 게 우선이다.
"자, 이제 슬슬."
꽈악
검을 움켜쥐었다.
이제는 싸움을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
그동안 교묘한 움직임으로 서서히 나폴리의 목을 졸라 왔고.
이제 놈의 숨통은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
팔과 다리.
놈의 관절과 중요한 근육이 있는 부분에는 여지없이 검상이 자리 잡았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치명타는 없지만 마지막 일격을 위해 내가 차곡 차곡 쌓아 온 성과다.
'이번으로 끝낸다.'
타다닥!
전류가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흡…!"
타오르는 전류를 보자 나폴리가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그동안 뇌전검이 활성화될 때마다 나폴리의 몸에 상처들이 늘어났으니.
놈은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본능적으로 꺼리게 되었을 거다.
'간다.'
파앗!
뇌전검이 완전히 활성화되자마자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놈과 나의 거리가 좁혀졌다.
나폴리는 다급하게 검을 들어 올렸지만.
느리다.
놈의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이다.
물론 그 차이는 미세하다.
1초도 채 되지 않을 정도의 딜레이지만.
'충분하지."
파각!
놈의 왼쪽 손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투욱!
손목이 떨어져 내렸고.
다시.
휘릭!
이번에는 팔뚝이다.
서걱!
팔뚝이 잘렸다.
팔뚝이 떨어져 내렸고.
"크아아아악!"
나폴리가 괴성을 내질렀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뇌전검이 끝나기 전에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내야 한다.
다음 기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놈은 한 쪽 남은 팔로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놈은 결코 내 움직임을 따를 수 없다.
놈의 검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더 이상 나는 없다.
촤락!
검이 놈의 등짝을 가로질렀고.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놈은 곧바로 몸을 돌려 검을 휘둘렀지만 나는 이미 반대편에 서 있다.
'잘 가라.'
푸훅!
놈의 가슴팍으로 검이 뚫고 지나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타닥-
뇌전검의 전류가 사라졌고.
[두 번째 대륙의 네임드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힘 10을 포식했습니다.]
[히든피스 – 수많은 강자들 2/5]
['오러 블레이드 (S)'를 포식할 수 있습니다.]
[능력을 포식하시겠습니까?]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