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 이후로 세 명의 마법 명가 플레이어를 처치했다.
실험실이 숨어 있던 건물도 내가 거의 다 때려 부순 덕분에 이제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놈들의 실험실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역시 내 예상이 정확했다. 흑암파 놈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어.'
서류에 적혀 있는 것들을 토대로 분석했을 때, 내 예상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현재 놈들의 최고 성취는 암 능력의 AAA등급.
S등급으로 완성되는 순간, 그들을 흑암파, 혹은 암살 명가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낼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흑암파가 세상에 드러난 게, 지금으로부터도 꽤 나중이었으니까.'
놈들의 실험은 이 상태에서 오랫동안 고착되어 있던 게 확실했다.
'하지만 지금 더 늦어지겠지.'
나는 놈들이 가지고 있던 연구 일지를 불태웠다.
물론 이 정도 태웠다고 해서 놈들의 실험이 완전히 망가진 것도, 마법 명가가 무너진 것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확실한 한 가지는, 이제 놈들은 잔뜩 열이 오를 테고. 어느 정도 타격을 입혔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겠지.'
그런 뒤에도 나는 놈들의 연구실 곳곳을 살폈다.
혹시나 얻어갈 만한 무언가가 없을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쓸만한 건 없었다.
돈도, 아이템도.
그 이외의 정보도.
'과하게 욕심낼 필요는 없지.'
이제 고작 17층에 도착했을 뿐이다.
마법 명가는 아직도 저 높은 곳에 있을 것이고.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실험에 박차를 가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흑암파의 모습이 세상에 더 빨리 드러나게 될지도 모를 일.
어쨌든 내가 알고 있는 미래는 변하고 있다.
내가 예상하는 범위 이상으로 크게 달라질지도 모른다.
'괜찮다.'
나 역시 그에 대한 충분한 계획과 대비책들이 있으니까.
'우선은 위드 길드.'
그들은 지금도 나에게 간간이 연락을 취해 오고 있었다.
인원을 최소화 한 채로 20층 이후에서 마법 명가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수집하며 내게 보내오고 있다.
아직 크게 쓸만한 정보는 없지만.
'자, 그럼 이제는….'
다시 도시로 돌아갈 시간이다.
몰른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면 분명 나폴리로부터 어떤 움직임이 보일 테니까.
'가자.'
나는 미련 없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실험실을 완전히 불태워 버렸다.
곧 이곳에 와서 망가진 저들의 실험실을 보고 분개할 마법 명가 놈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앞으로 그놈들의 얼굴을 더더욱 일그러지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때 저 먼 곳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목격자를 남겨 둘 필요는 있어.'
검을 든 괴력의 괴인.
그리고 마법 명가의 비밀을 파헤치고 놈들의 실험실을 파괴하는 플레이어.
'지금 내 모습은 누가 봐도 검술 명가의 녀석일 테니까.'
이게 내가 목격자를 알아채고도 살려 두는 이유였다.
저 녀석은 분명 상부에 보고를 올릴 것이고, 상부에서는 내 정체를 검술 명가의 일원으로 추측하리라.
설마 마법 명가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
마법 명가의 비밀을 알고 그 비밀을 파헤치며 놈들을 공격한다고 생각하겠는가.
'그것 보다는 거대한 집단의 도발이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겠지.'
내 모습을 감추면서도 두 거대한 집단을 싸움 붙일 수 있는 훌륭한 방법.
이이제이다.
***
"이곳에 몰른... 음. 그러니까 조금 멍청해 보이는 음유시인이 묵고 있습니까?"
도시에 도착해서 내가 말했던 대로 가장 큰 여관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
라고 외치며 손뼉을 쳤다.
"예. 있어요. 그런데….
그러더니 내 얼굴을 흘끔 바라본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했더니.
"그러면 혹시.. 몰른 님의 주인님이신…?"
"주인?"
"예. 킬리만제르를 쓰러트리셨다는 그…!"
"아, 맞습니다만."
"와아아아아!"
직원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몰른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 모양이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투숙객과 직원들이 모두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괘, 괜찮으시다면… 싸인을 좀!"
"저, 저도요!"
"한강민? 한강민 님 맞습니까? 몰른 님의 주인이신!"
"……."
몰른이 제 역할을 잘 해낸 건 고마운데.
이런 상황은 별로다.
귀찮거든.
"나중에. 나중에 꼭 해드릴테니 우선 몰른이 머물고 있는 객실을 알려 주십시오."
"아, 아. 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관 직원이 눈을 빛내며 외쳤다.
***
"호호옹…."
몰른이 여관 방 구석에 박힌 채로 몸을 떨고 있었다.
품 안에는 류트를 품고서 마치 부적인 양 한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방의 반대쪽 구석에는.
"……."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바로 검성 나폴리다.
"그 녀석은 언제쯤 오는 거지?"
나폴리가 물었다.
"저, 저도 몰라요오오…."
몰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폴리의 기세에 잔뜩이나 억눌린 몰른은 울고 싶은 기분이다.
"네 놈. 거짓말한 것은 아니겠지? 킬리만제르를 한강민이라는 녀석이 처치했다는 그 노래 말이다."
"그, 그럴 리가 없다니까요오…. 으, 음유시인은 절대로 거짓 가사를 만들지 않습니다아…."
벌벌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몰른이다.
"그래서 언제 오냐고 물었다."
"모, 모른다니까요오…."
벌써 수십 번이나 반복된 문답들.
그때였다.
저벅
문밖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걸음 소리를 듣자마자 나폴리의 신경이 곤두섰다.
스릉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이곳이 여관이라는 사실은 이미 그의 안중에도 없다.
그저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중후한 기도와 잘 잡힌 균형감.
그것이 그의 맘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호승심을 일깨웠다.
"끼…끼에에엑!"
몰른이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내질렀고.
그 순간.
촤악!
나폴리의 검에서 검기가 터져 나왔다.
나폴리의 검기는 전방을 향해 빠른 속도로 치달았고.
콰아아아앙!
여관 문과 벽을 산산이 박살 내버렸다.
하지만.
"……."
그의 검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과격하네."
그 자리에는 강민이 서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재미있군."
나폴리 역시 그런 강민을 보며 입가를 찢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더 받아 보아라."
여기서? 라고 물을 틈도 없었다.
놈은 다짜고짜 검 위로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냈다.
저거다.
내가 포식 슬롯에 꽂아 넣기 위해 기다렸던 능력.
일반 플레이어들은 손에 넣을 수 없는 그 힘.
당연하다.
오러 블레이드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특별한 수련법이 필요하고.
지구의 플레이어들에게 그런 수련법이 존재할 리 만무.
'검술 명가 놈들만은 예외지.'
그 녀석들은 수백 년 동안 내려 온 수련법을 통해 내공을 쌓고, 그것을 유형의 기운으로 형상화시켰다.
검기, 혹은 검강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그 수련법을 전해주지 않았다.
고작해야 양산형으로 만들어진 수련법 정도.
어쨌든 내 목적은 달성했다.
눈앞에 있는 나폴리의 능력창에 떠오른 글자.
[오러 블레이드 – S]
무려 S등급의 능력.
물론 지금 내가 저 능력을 포식한다고 해서 곧바로 S등급의 위력을 뽑아낼 수는 없다.
오러 블레이드는 마력 수치의 영향을 받고.
현재 내 마력은 고작해야 30 조금 넘는 수준.
'나는 마력을 올릴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다.'
오러 블레이드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내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게다가 오러 블레이드와 뇌전검의 힘까지 합해진다면.
'검술 명가 놈들의 검기 이상의 무기를 갖게 되는 거다.'
그렇게 강해 질 순간을 생각하니 벌써 전율이 이는 것만 같다.
놈의 능력을 포식하려는 순간.
[S급 능력은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포식할 수 없습니다.]
이건 또 무슨.
결국 나폴리를 죽여야 한다는 뜻이다.
죽이지 않으면 오러 블레이드를 내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이다.
'쉽지 않겠는데.'
오러 블레이드를 가진 상대와의 싸움.
그건 검을 든 자 앞에서 나뭇가지 하나 들고 있는 꼴이나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내가 믿을 건. 충격파다.'
오러 블레이드 만큼은 아니겠지만.
충격파라면 어느 정도 오러 블레이드의 절삭력을 방어해 낼 수 있으리라.
'오우거의 신체도 이제 다시 사용할 수 있고.'
어제 마법 명가를 박살 내고 하루가 지났기 때문이다.
'해 보자. 할만한 싸움이야.'
벌써부터 큰 소리에 투숙객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추후에 보상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건물 내부에서 싸우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나는 창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파앗!
놈을 향해 달려들며 온몸의 무게로 몸을 들이받았다.
채애앵!
"?!"
콰아아앙!
나와 나폴리는 동시에 창문을 깨고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뭐 하는 짓이지?"
놈이 물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저놈은 싸이코패스가 분명하다.
"싸우려면 넓은 곳에서 싸워야 하지 않겠어?"
도시에 광장 한 판에 서서 나와 놈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고.
"꺄아아아아악!"
"뭐, 뭐야!"
"갑자기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어요!"
"경비대, 경비대원 불러줘!"
순식간에 소란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때.
"저, 저 사람… 나, 나폴리…."
"나폴리다. 검성 나폴리야!"
"뭐라고? 나폴리라고? 그 검성 나폴리?"
"이 도시에 있다더니 그게 진짜였단 말이야?"
나폴리를 알아본 이들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순식간에 인파들이 모여들었다.
'잘됐어.'
구경꾼이 많을수록, 판이 커질수록 내 계획에는 유리해진다.
"좋군."
나폴리도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은 이들 앞에서 네 놈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거라."
그렇게 말했다.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지만.
"그럼… 저 옆에 서 있는 건 누구…?"
"그 사람 아니야? 킬리만제르를 처치했다던!"
"헉!"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완벽해. 판은 아주 잘 깔렸으니까.'
이제는 결말을 맺을 차례다.
카앙!
검을 치켜들었다.
나폴리 역시도 검 위로 다시 한번 오러 블레이드를 불태웠고.
콰아아앙!
강하게 땅을 디디며 나를 향해 쇄도했다.
'우선 충격파.'
우우우웅!
충격파로 놈의 오러 블레이드를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지.
검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나폴리는 순식간에 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카아아앙!
두 개의 검이 충돌했다.
나폴리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충격파는 오러 블레이드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내 힘과 체력 스탯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리라.
거기에 장인이 손을 봐 준 덕분에 검의 내구도가 크게 상승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다면 승산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한정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을 버텨낼 수는 없으리라.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 한다.'
나는 지체없이 오우거의 신체를 사용했다.
"…!"
내 신체의 변화를 느낀 나폴리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잔꾀를!"
나폴리가 다시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치지직!
뇌전검이 활성화된 그 순간.
나 역시 놈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시야가 점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