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저는.. 마을에 있으면 안 될까요.. 오호홍.."
잔뜩 지친 몰른이 힘없이 말했다.
지금 나와 몰른은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걸어가고 있었다.
"가능 할 것 같은가?"
"아뇨오.."
몰른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허락해 줄 리가 없다.
"너도 들어봤겠지, 야만왕 킬리만제르?"
"당연히 들어봤지요."
몰른은 기겁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몰른 정도의 음유시인이라면 분명히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직접 본 적은 없더라도 이야기 정도 못 들어 봤을 리가 없다.
"정말 그 인간하고 싸우실 겁니까요오?"
"당연하지. 그러지 않고서야 이 험한 길을 무작정 걸어 나갈 이유는 없잖아."
"무섭습니다요오오."
나는 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야만왕 킬리만제르.
그는 딱히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인물은 아니다.
야만왕이라는 별명 역시 수많은 도전자들을 쓰러트리며 쌓아 올린 것.
'아마 지금이 놈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을 시기일 거다.'
나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이다.
놈의 명성이 가장 높고 놈이 가장 신이 나서 날뛰고 있을 때 내가 놈을 쓰러트린다면.
'그야말로 최고지.'
그러니 내가 녀석을 첫 상대로 정한 것이다.
만약 어떤 단체나 왕국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으면 무작정 쳐들어가서 싸우자고 해 봐야 미친놈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일 테니까.
'다른 녀석들은 이번 싸움으로 명성을 쌓은 뒤다.'
대륙의 네임드들은 다들 각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본능적으로 강함을 숭상한다.
하지만 체면과 이런저런 이해관계 때문에 쉽사리 서로는 검을 마주하지 못할 뿐.
'거기에 내가 작은 불씨를 피워 준다면.'
그 뒤로는 내가 원하는 녀석을 골라 가며 상대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파각!
[힘 0.5를 포식했습니다.]
지금 막 몰른과 나는 산자락에 진입했다.
킬리만제르가 살고 있는 산이다.
산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높고 봉우리에는 만년설이 내려앉는 높은 산이었으니까.
몰른은 힘들다고 죽을 것 같다고 쉴 새 없이 떠들면서도 곧잘 내 뒤를 따라왔다.
산에 진입하자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나는 놈들을 하나씩 베어 넘기며 스탯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놈을 쓰러트리기 위해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할지는 나도 모른다. 할 수 있는 만큼 강해지는 게 좋겠지.'
말했듯 나도 놈의 진짜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다만 졌다, 이겼다, 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이긴 녀석들 중에서도 겨우 판정승 정도로 끝난 것이지, 완벽한 승리를 얻어낸 녀석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라고 해도 긴장되지 않을 순 없다.
파각!
다시 한번 몬스터를 베어 넘겼고, 놈이 있을 산꼭대기를 향해 계속해서 오르고 또 올랐다.
***
"요새는 좀 뜸한 것 같군."
"도전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킬리만제르.
그는 오늘도 만년설산의 꼭대기에 있는 그의 처소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처소 밖에는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제자들이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조금씩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할 정도로 높은 고지대.
그리고 그것이 바로 킬리만제르가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같은 무술 실력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폐활량의 베이스 자체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도 저번 도전자는 꽤 괜찮지 않았습니까?"
"그럴 리가."
그는 며칠 전에 그를 찾아왔던 도전자를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약해. 부족하다고. 나는 더욱더 강한 녀석들을 만나고 싶다. 쓰레기밖에 없어. 이 산에 틀어박힌 게 후회가 될 정도로 말이야."
킬리만제르가 입술을 핥았다.
그는 힘을 갈망했다.
야만인과 대륙인의 혼혈로 태어난 그는 그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한 변방인이었다.
그러니 그가 인정받을 수 있는 건 강해지는 것뿐이었고.
그 일념 하나만으로 야만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은 집단.
어린 시절부터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던 그는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이후로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이 산에 머무르게 되었고.
이 산은 그때부터 킬리만제르의 영역이 되어 버린 것.
하지만 그는 아직도 배가 고팠다.
더욱더 강해지고, 더욱더 많은 강자들을 쓰러트리고 싶었다.
'내가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인가.'
아무래도 진정으로 강한 이들은 이곳까지 찾아오지는 않는다.
서로의 자존심과 체면상, 한 번의 패배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니까.
'한 놈만. 한 놈만 제대로 걸려 주면...'
추릅
'갈기갈기 찢어 주마.'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입술을 핥았다.
그는 지금 한참이나 달아오른 상태였다.
지금 누군가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입어라."
나는 아이스 트롤의 가죽을 벗겨 손질한 뒤 몰른에게 건넸다.
15층 마을에서 잡화점에 들어가 이런저런 재료들을 구입한 덕에 나름 형태는 갖출 수 있었다.
"이런 것도 만들 줄 아십니까요?"
"어쩌다 보니까."
다시 생각해 봐도 전생의 나는 정망 치열하게 살았다.
다른 이들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요리부터 무기 손질이나 이런 잡기술까지도.
"그걸 입고 나면 그래도 괜찮을 거다."
까득
나는 이클립스 뿌리 하나를 꺼내 삼켰다.
이제 남은 뿌리는 고작해야 5개.
하지만 괜찮다.
마을에서 쓸만한 허브와 물약들을 구입해 놨으니까.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나는 주변을 살폈다.
당연히 킬리만제르는 아무나 자신을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산 내부에 이런저런 장치를 해놨다.
첫 번째는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지만, 이 정도로는 제대로 선별할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크르릉...
그 순간 들려 온 맹수의 낮은 음성.
마침 나타났다.
킬리만제르가 이 산을 선택한 이유.
만년설산의 중턱을 넘어가면 나타나기 시작하는 만년설표.
몬스터는 아닌 짐승이지만 웬만한 몬스터 이상의 전투력을 보여주는 괴물이다.
이게 바로 킬리만제르와 싸우기 위한 첫 번째 관문.
'놈의 가장 무서운 점은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지.'
파사삭 파삭
만년설표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이 거대한 산 곳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한 번에 적어도 대여섯 마리씩 모여 다니고.
덕분에 무척이나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전해 들었지.
"몰른. 내 뒤에 바짝 붙어 있어. 아까 준 아이스 트롤 가죽 단단히 동여매고. 적어도 한 번에 죽지는 않을 거다."
"으허억.. 으허허헉!"
몰른이 기겁하며 내 등 뒤로 바짝 달라붙었다.
잠시 후 여섯 마리의 만년설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송곳니는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놈들의 발톱은 소의 목 정도는 단박에 꺾어 버릴 만큼 위협적이었다.
그르릉-
설표가 푸른 안광을 뿜으며 나를 노려봤다.
그 순간.
파앗!
만년설표 여섯 마리가 동시에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놈들은 조금 사납고, 그리고 조금 커다란 고양이에 불과했고.
타다닥-
뇌전검이 활성화된 순간.
파가각! 파득!
쿵!
내 몸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만년설표 세 마리를 베어 넘겼다.
[민첩성 0.5를 포식했습니다.]
[민첩성 0.4를 포식했습니다.]
[민첩성 0.34를 포식했습니다.]
"끼야아아아악!"
그때 몰른이 비명을 내질렀다.
크하앙!
몰른의 외침에 만년설표가 순식간에 표적을 몰른으로 바꿨다.
덕분에 아주 찰나의 시간이지만 남아 있는 설표에게서 빈틈을 찾아낼 수 있었고.
우우웅!
충격파를 사용하자 검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후우웅!
아직도 뇌전검은 끝나지 않았고, 충격파까지 더해진 내 일격이 가장 가까운 설표를 공격했다.
파각!
크아아아앙!
설표의 몸이 거세게 흔들리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힘이 150에 가까워졌으니 충격파가 터트리는 파동은 감히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크아앙!
그 옆에서 몰른을 향해 내달리던 설표 세 마리가 동시에 괴성을 내질렀다.
놈들이 바닥에 자빠진 순간 나는 곧바로 놈들의 몸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치지직-
그제야 뇌전검의 사용 시간이 끝이 났다.
킬리만제르의 두 번째 자격시험.
설표 사냥이 손쉽게 끝이 났다.
'물론 설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타날 테지만.'
꽈득!
나는 설표의 송곳니를 잘라 아공간에 넣어 뒀다.
설표의 송곳니는 나름 괜찮은 재료였고,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팔 생각은 없다. 돈은 이미 넘칠 정도로 많으니까. 대신에 더 좋은 곳에 써야지.'
잘 모아 뒀다가 솜씨 좋은 대장장이에게 맡길 생각이다.
가죽도 마찬가지다.
설표의 가죽도 역시 훌륭한 재료 아이템이니까.
잠시 후 설표의 어금니와 가죽을 모두 손질한 나는 몰른을 바라봤다.
"몰른."
"허억.. 예에.. 흐어억...."
아연실색한 몰른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방금 괜찮았어."
"뭐, 뭐가.. 말입니까요오오."
"시선을 네게로 돌린 것."
"...허어엉..."
"잘 부탁한다."
"으엉..."
몰른은 눈물을 짜낼 시늉을 하며 나를 바라봤고.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몸을 돌렸다.
"가자."
며칠을 숙영하며 산에 올랐다.
확실히 여기에서 느끼는 건, 몰른 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도 지구의 일반인들과는 기초 체력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플레이어가 되고 난 뒤라면 이야기에 다르겠지만.
이 산이 지구의 히말라야처럼 높이 오른 산은 아니지만, 훈련되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진즉에 나가떨어졌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이제 킬리만제르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재 내 모든 육체 스탯도 꾸준히 오르고 있다.
각종 몬스터와 만년설표와의 싸움을 통해 척박한 산의 환경에도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조금 추운 것은 불편하지만,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니까 버틸 만해.'
가쁜 호흡 정도야 이미 체력이 너무 높아진 나머지 내게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킬리만제르의 실력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만 그저 설렐 뿐이다.
히든피스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실히 체감할 수 있을 기회이지 않은가.
'투기장에서 나름 기대는 했지만 상급 기사들도 너무 약했다. 오우거의 신체를 사용하기만 하면 상급 기사들도 나가떨어지기 일쑤였으니까.'
하지만 놈은 다를 것이다.
어쩌면 오우거의 신체를 사용한 나의 공격조차 능숙히 피하거나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조금만 더 힘 라, 몰른."
평소에도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닌 몰른이라서 그런지 산을 오르는 것도 꽤 능숙했다.
여러모로 괜찮은 친구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몰른 없이 혼자 산을 올랐으면 꽤나 심심했을 테니까.
그렇게 더 힘을 내서 산을 올랐을 무렵.
"보인다."
성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전형적으로 11층과 20층 사이에 존재하는 대륙의 야만족들의 성채.
그렇게 성채를 향해 걸어갔을 무렵.
"누구냐!"
문을 지키던 한 녀석이 외쳤다.
그리고 놈을 향해 말했다.
"킬리만제르."
그 한 마디에 놈의 미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