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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35화 (35/277)

35화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박명철이 말했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조금 전 내가 싸우는 장면을 봤기 때문일 수도, 마법 명가라는 거대한 적을 두고 긴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좋다.

이렇게 나를 찾아왔다는 건, 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법 명가와의 싸움을 마음먹었다는 뜻일 테니까.

사실 이미 예상한 결말이긴 했지만.

"우선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박명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놈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겁니까. 당신이 한 짓을 본다면 결코 우연 같지는 않거든요."

잠시 침을 목 뒤로 넘기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뒤를 추적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 도대체 어떻게?"

그가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이제 고작 11층에 올라선 플레이어. 하지만 지금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그들의 만행을 알고 있는 이들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의문을 갖는 이유죠."

타당한 의문이다.

11층에 올라선 플레이어라면 이제 막 탑에 적응하기 시작했을 것이 정상인데.

그런 수준을 넘어서서 명가라는 거대 세력의 뒤를 쫓고 있다니.

내 앞에 나 같은 녀석이 나타난다고 해도 믿지 못할 것이 당연하다.

"흠."

고민은 깊지 않았다.

어차피 함께 마법 명가와 맞선다는 건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걸 알릴 필요는 없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선택입니다만, 오래전부터 이 일을 준비해 왔습니다."

"…?"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들은 과거 나에게 몹쓸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놈들을 박살 내기 위해서 오랜 시간 노력해 왔을 뿐입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전생에서 나와 놈들의 악연은 꽤 길었다.

"그렇군요."

박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긴 의문을 표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나는 저들에게 마법 명가의 악행을 증명할 증거를 줬다.

박명철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동희를 바라본다.

"진짜냐?"

한동희가 나를 바라봤다.

한동희의 미간이 깊게 패고,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의 눈이 충혈됐다.

무언가 능력을 사용한 모양이고.

그 능력을 사용하는 데 꽤나 많은 피로가 동반되는 것 같다.

그러더니.

"예. 그러네요."

한동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겠군."

박명철이 말했다.

"맙소사."

김민희도 거들었다.

"하하."

한동희도 웃음을 터트렸다.

한동희.

재미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저들을 설득하는 작업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역시 일이 복잡할 땐 돌아가기보다 직진하는 게 편하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다들 오늘 시간 된다면 같이 맥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 싶은데."

"그러죠. 아무래도 맨정신에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으니."

"매.. 맥주.. 저.. 저도.."

뒤에서 듣고 있던 몰른이 끼어들었다.

"좋지, 몰른. 너도 그동안 고생해줬으니까."

나는 그들을 이끌고 도시에서 가장 커다란 주점으로 향했다.

***

"그러니까 저희는 탑 위층에서 마법 명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내 말에 박명철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혼자서 괜찮겠습니까? 아무리 정보 길드에서 녀석들에 대한 정보를 넘겨준다고는 하지만.."

"문제없을 겁니다."

나는 그들에게 내 계획을 막 설명한 참이었다.

요약하자면 간단하다.

당장 나는 20층 이후로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게 가능한 저들에게 20층 이후에 마법 명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것.

"단 내가 없이 그들과 싸우는 짓 같은 건 하지 마십시오. 그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건, 내가 30층을 넘어갔을 때. 그때입니다."

당연한 이야기다.

이들은 이미 나의 전생에서 그들과 싸우다가 처참히 망가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까.

적어도 같은 미래를 반복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무섭네요."

김민희가 말했다.

"아래층부터 하나씩, 그리고 철저하게. 마법 명가의 토대를 박살 낼 겁니다."

"...알겠습니다."

박명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앞으로 마법 명가에게 접근할 방법들을 강구하고 있는 모양이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맡겨도 된다. 이들이 수집해 놓은 정보 덕분에 나도 전생에서 마법 명가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이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이 정보만 착실하게 모아 준다면, 내 계획은 더욱더 빠르고 확실하게 진행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건배 한 번 하시죠."

한동희가 맥주잔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고.

"위하여!"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오호호호! 자, 그러며어어언... 제가.. 제가 한 곡 뽑아 보겠습니다아아아! 오호호!"

맥주를 한 번에 삼키고 잔뜩 취한 몰른이 류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주점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른의 노래를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내일 있을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술독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마지막 녀석은 훨씬 더 어려운 상대라고 했지.'

투기장의 메인 투사.

상급 기사 출신이며,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녀석.

'2위인 팔콘과의 격차도 어마어마하다.'

무려 500연승을 달리고 있는 녀석이다.

투기장이 처음 만들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어 온 녀석이니까.

'어떻게 요리해 줘야 할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놈을 두려워하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떻게 해야 더 재미있는 쇼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그게 고민이 될 뿐.

"술값입니다."

나는 골드를 조금 꺼내 탁자 위에 얹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저, 저...."

아까부터 이쪽을 흘끔거리던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다.

"하, 한강민... 투사님.. 맞으십니까."

그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다.

일이 조금 귀찮게 됐다.

***

"울튼. 내 부탁 좀 함세."

"말해 보십시오."

투기장의 주인과 울튼이라는 사내가 마주했다.

울튼.

그가 바로 내일 강민과의 싸움이 예정되어 있는 투사였다.

이 투기장의 랭킹 1위에 빛나는 실력자.

그리고 투기장의 주인은 지금 속이 타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 녀석이 설마 그렇게나 실력이 뛰어날 줄 내가 상상도 못 했어. 망할 놈... 팔콘은 그렇게 만들어 버릴 줄이야!"

강민은 약속대로 상대를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투기장의 메인 투사들 네 명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물론 그 짧은 시간 동안 강민이 일으킨 파급은 엄청났고.

덕분에 지난 4일 동안 몇 개월 치의 수익을 뽑아낼 수는 있었다.

게다가 내일의 싸움을 기대하고 있는 구경꾼들 중에는 큰 손들도 많다.

'거상들과 귀족들까지 VIP석을 벌써 꿰차고 있으니까.'

그만큼 강민의 이름은 벌써 유명세를 크게 타고 있었다.

게다가 울튼이라는 강자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으니 수많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그렇다고 해서 기뻐할 수만은 없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크나큰 손해다.

메인 투사 네 명이 무참히 박살 나 버렸으니까.

'울튼은 절대 잃으면 안 돼.'

간절한 눈으로 울튼을 바라봤다.

"울튼. 난 절대 자네를 잃을 수는 없네."

그 말에 울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발언이니까.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합니까?"

싸늘한 목소리가 투기장 주인의 귀를 두드렸다.

"아, 아니.. 그게..."

솔직히 말하면 질 것 같다.

그도 보지 않았던가.

팔콘.

그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강민의 일격에 무너져 내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울튼이 말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울튼은 지금이라도 강민을 찾아가 박살 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놈은 분명 강하다.'

울튼도 강민과 팔콘의 싸움을 봤다.

충격적이었다.

자신이라고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괴물.'

괴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강한 강민이었으니까.

"혹.. 지금이라도 경기를 취소하는 것이 어떻겠나. 오, 오해는 말게! 그저... 우리 투기장의 스타를 보호하기 위한..."

쾅!

그 말에 울튼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어, 어헉!"

주인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 떨었다.

"그딴 소리 하지 마쇼. 근본도 없는 그따위 모험가. 내가 처참하게 박살을 낼 테니까."

"흐으..."

"만약 한 번 더 물러서라는 말을 하면, 나는 이 투기장을 떠날 테니 그렇게 아십쇼."

울튼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더 이상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했다.

강민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직접 싸워보기 전까지는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건방진 놈. 네 놈의 자만도 오늘까지다.'

울튼은 강민을 박살 내기로 마음먹었다.

500연승.

그것은 결코 가위 바위 보로 따낸 것이 아니었으니, 결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

"우아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고.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즐겁다.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울튼, 이 녀석은 다른 어중이떠중이와는 조금은 달랐다.

콰아아아앙!

"크어어억!"

물론 조금 달랐다는 뜻이지.

크게 다르다는 건 아니다.

싸움이 시작된 지 2분여.

울튼은 전신이 피로 낭자했고,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검을 들고 있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상태.

"재미있어. 조금 더 버텨 보는 게 어때?"

내가 물었다.

울튼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눈뿐이다.

눈 말고 놈의 다른 신체 기관들은 제 역할을 하기에는 제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대단해. 오우거의 신체를 사용했는데도 2분을 버티다니.'

충분히 칭찬해 줄 만하다.

단 일격에 망가져 버린 팔콘과는 다르게, 울튼은 내 공격을 벌써 다섯 번 가까이 막아냈으니까.

저벅

나는 울튼을 향해 다가갔다.

다시 한번 벼락이 내리친 것처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수백 명이 동시에 내 이름을 외치고 있다.

짜릿한 전율이 다시 한번 내 몸을 휘감았다.

"죽이지는 않으마."

"이노오오오옴!"

울튼이 소리쳤다.

"대신 이 쇼를 즐겁게 만들 수 있도록 협조해 줬으면 좋겠어."

"개, 개소리.. 개소리 지껄이지 마아아아아!"

콰아아아앙!

울튼이 내 검을 막아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놈의 검을 향해 검을 휘두른 것이고.

남들이 보기엔 놈이 내 공격을 막은 것처럼 보이게 연출했을 뿐.

"우와아아아아아! 울튼! 울튼! 울튼!"

그 장면에 관객들이 울튼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건 앞으로 이곳에 남아 있을 울튼을 위한 내 일말의 배려다.

그래도 메인 투사인 만큼, 너무 처참하게 짓밟으면 서운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치열한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나로서도 포인트를 빠르게 쌓을 수 있을 테니까.

카아앙! 캉! 카아아아앙!

몇 번이나 더 반복된 충돌.

당연히 모든 일격들은 내가 연출해 낸 장면이었고.

결국.

빠각!

놈의 어깨가 탈골된 채 떨어져 내렸다.

푸훅!

나는 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어. 약속대로 죽이지는 않으마."

내가 목표했던 5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

지금 나의 스탯은 앞으로 등장할 히든피스를 획득하기 위한 최소 조건은 충족했다.

'물론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다. 놈들은 나조차도 가늠할 수 없는 실력자니까.'

현재 내가 쌓아 올린 포인트는 30120포인트.

당장 14층까지 올라갈 정도의 포인트였다.

이것 역시도 14층을 넘어서면 만 포인트 정도는 금세 쌓일 것이다.

16층에 올라서기 위해 내가 따로 해야 할 일은 없다는 뜻.

'이제 남은 건 마법 명가에 대한 정보뿐.'

정보 길드로부터 놈들에 대한 정보가 도착하는 즉시 15층으로 올라갈 계획이다.

'완벽하다.'

하나씩, 그리고 착실하게.

내 계획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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