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상태창이 달라졌다-33화 (33/277)

33화

몰른의 목소리다.

몰른은 내 매니저를 자청하고 나섰고.

"나갈게."

나는 몸을 일으켰다.

대기실로 나간 순간 급격히 공기가 냉각됐다.

저 반대쪽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기사 때문이었다.

'플랭크.'

지금 처음 보는 녀석이지만 한눈에 봐도 노련한 검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홱 돌렸다.

[이번에 등장할 전사는! 우리 투기장의 자랑! 희망! 꿈! 그리고오오! 스타! 플래애애애앵크으으으으으!]

사회자가 플랭크를 소개했다.

그와 함께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플랭크는 검을 뽑아 들고 투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환호는 더욱더 커졌다.

"혼쭐을 내주라고!"

"그 애송이 박살을 내 버려!"

이따위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잠시 후 사회자가 나를 소개했다.

나 역시도 투기장으로 몸을 들였고.

카앙!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본 순간, 플랭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웅성이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둘째 치고, 플랭크 역시 내가 검을 쓴다는 사실을 처음 들은 모양.

'돼지가 말을 안 해 줬나 보군.'

하지만 플랭크는 이내 건조한 표정으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무기가 달라진 것 따위,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한 얼굴로.

[자아아아아~~시자아아아악~ 합니다아아아아!]

싸움이 시작됐다.

***

'...무기를 사용할 줄 아는 녀석이었군.'

플랭크가 강민을 노려봤다.

강민이 범상치 않다는 건 진즉 알고 있다.

이미 투기장의 명물이 되어 버린 강민이다.

단 한 번의 경기만으로.

'허나 그런 잔재주 따위 내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기사 출신이다.

평범한 싸움꾼과는 차원이 다르다.

제아무리 길거리 싸움에 능하다고 한들, 프로의 무대는 그 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기사로서 20년을 넘게 버텨낸 나다.'

모종의 사건으로 투기장에 와 있지만, 기사로서 살았던 그 세월에 대한 자부심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네 놈의 그 오만함은 오늘부로 박살 내 줄 것이야.'

플랭크도 이미 알고 있다.

강민이 하루에 한 명씩, 투기장의 상위 랭크 다섯명을 지목해서 싸우겠다고 했던 그 발언을 말이다.

플랭크는 그 사실에 분개했다.

일개 모험가 따위가 감히 자신들에게 도전하겠다니.

'폐인으로 만들어 주마.'

플랭크가 빠득, 하고 이를 갈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중한 발걸음.

그의 눈은 한순간도 강민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꽤나 능숙하다.'

강민의 몸에서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결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모험가가 아니라는 뜻.

'젊은 나이인데도 저런 경지에 이르렀다니.'

웬만한 기사들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실력자라는 건 확실하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자신 역시도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산전수전을 치르며 치열하게 살아남지 않았던가!

"하아압!"

그 순간 플랭크의 신형이 강민을 향해 쇄도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다.

그 짧은 순간에 플랭크의 시야에 강민의 빈틈이 드러났다.

'팔!'

일격으로 강민의 팔을 잘라낼 생각이었다.

그의 검이 엄청난 속도로 강민의 오른팔을 향해 쇄도했고.

'됐다!'

그의 눈이 번뜩인 순간.

카아아아앙!

"?!"

플랭크의 눈이 커졌다.

가로막힌 것은 둘째 치고, 그의 전신을 강타한 끔찍한 통증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아악!"

플랭크가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괴성을 내질렀다.

'별것 없군.'

플랭크의 실력에 대한 강민의 감상이었다.

당연히 질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지금의 강민과 비교했을 때, 중급 기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해 볼 생각뿐이었는데.

'형편없을 지경이야.'

일부러 드러낸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속도와 힘 역시 한참이나 못 미쳤다.

'충격파 한 번에 어깨가 바스러 질 줄이야.'

강민은 내심 서운했다.

만약 플랭크가 공격을 조금 더 버텨낸다면 처음으로 오우거의 신체를 사용해 볼 생각이었는데.

'이 녀석에게 오우거의 신체를 사용하는 건 낭비일 뿐이다.'

플랭크는 충격파가 담긴 일격을 한 번 당하고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내 힘이 엄청나게 높아졌기 때문이겠지.'

충격파의 위력은 힘 수치의 영향을 받지 않던가.

'흥미가 떨어졌어.'

강민은 싸움을 끝내기 위해 플랭크를 향해 다가갔다.

어차피 이번 싸움은 오래 끌 필요가 없다.

아니, 빨리 끝내는 게 좋다.

플랭크는 이 투기장의 상위 랭커.

도전자인 강민이 그를 상대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줄수록.

앞으로의 싸움에 대한 구경꾼들의 기대치가 높아질 테니까.

휘이이이익!

강민의 검이 플랭크를 향해 쏟아졌고.

파각!

"....!"

플랭크의 팔이 떨어져 내렸다.

"오른팔은 남겨 줬어. 앞으로 너도 먹고는 살아야 할 테니까."

플랭크를 향한 일말의 자비였고.

그 말을 끝으로 강민은 몸을 돌려 대기실로 향했다.

"우아아아아아아아!"

"괴물이다!"

"한강민! 너 이 새끼! 믿었다구우우우우!"

"플랭크 이 개자식! 내 돈! 내 돈 어쩔꺼야아아아아!"

강민의 뒤로 관객들의 비명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

투기장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다.

데크를 때려눕혔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제 싸움꾼들은 대놓고 내게 호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싸움을 가르쳐 달라느니, 맥주를 살 테니 친하게 지내자느니.

나는 무시했다.

어차피 여기에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으니 친하게 지내봐야 무엇 하겠는가.

그러던 중.

그 누구보다 가장 다급한 태도로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돼지였다.

그러니까 투기장의 주인 말이다.

"이, 이보게! 프, 플랭크의 팔을 자르면...."

"문제 있나?"

"무, 문제가 있지! 플랭크는 우리 투기장의 메인 투사라고! 그런 녀석의 팔을 잘라내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나가도록 하지."

내가 조소하며 말했다.

어차피 이미 포인트는 9000포인트를 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오늘 내로 1만 포인트를 충분히 달성할 것이고.

몰른을 시켜 노래 몇 번 시킨다면 수천 포인트를 더 얻어 낼 수 있으리라.

정보 길드의 정보가 도착할 때까지 마을 근처의 몬스터를 사냥하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뜻.

"아, 아니.. 그러니까..."

하지만 오히려 당황한 건 돼지 쪽이다.

나 덕분에 지금 돈을 쓸어 담고 있을 테니까.

"하아... 참..."

"약속대로 죽이지는 않았고, 이런 식의 태도라니 꽤 불쾌한데 말이지."

"미, 미안하네.."

돼지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앞으로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

"그, 그러지..."

돼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너무 자만하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은 플랭크와는 비교가 안 되니까. 흐흐흐..."

"충고 고맙군."

나는 감흥 없이 대꾸했다.

돼지는 나를 한 번 흘겨보더니 몸을 홱, 하고 돌렸다.

아무래도 남은 네 명의 싸움꾼들을 크게 신뢰하는 모양이다.

'왠지 저 돼지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어.'

내가 심보가 고약해서 그런 게 아니다.

남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는 혼자 배를 채우는 저 돼지를 혼쭐내 주고 싶을 뿐이지.

그리고 그때.

[한동희 : 팀장님이랑 같이 있습니다.]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시스템에 존재하는 귓속말이다.

[대기실에 있으니까 이리 오시죠.]

[한동희 : 예.]

잠시 후, 나의 개인 대기실에 한동희와 여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

'헐, 왜 이렇게 잘생겼어?'

위드 길드의 스카우트 팀장인 김민희는 강민을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

'아씨, 진짜 깜짝 놀랐네.'

생각보다도 너무 준수한 강민의 모습에 잠시 놀란 김민희다.

"뭐 해요."

그때 옆에서 들려온 한동희의 목소리에 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흠흠. 반가워요, 강민 씨. 위드 길드 스카우트 팀의 팀장 김민희예요. 뭐.. 팀이라고 해 봐야 우리 둘이 다긴 하다만."

"반갑습니다."

강민이 손을 내밀었다.

'하. 진짜 잘생겼네.'

김민희의 입가에 다시 한번 미소가 걸렸다.

"음.. 그건 그렇고. 동희한테 얘기는 대충 들었어요. 우리를 이용하겠다고 하셨다던데."

"맞습니다."

강민은 너무도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의 그런 태도에 오히려 김민희는 조금 어안이 벙벙해졌다.

'잘생긴 건 잘생긴 건데. 뭐 이렇게 뻔뻔해?'

그렇다고 그런 태도가 썩 싫지만은 않았다.

음흉하고 속내를 숨기는 것보다야, 이런 직설적인 태도를 더 선호하는 김민희였다.

"그래요. 뭐. 우선 얘기나 들어 봐요. 우리를 어떻게 이용하겠다는 건지."

"기분 안 나쁜가 보군요."

강민이 물었다.

"우리가 기분 나빠할 입장은 아니죠. 들어 보니까 그쪽 스카우트하러 온 길드들 다 쟁쟁한 길드들이었다던데. 우리 택해 준 건 분명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테니까요. 이해해요."

"좋네요."

강민이 답했다.

강민도 시원시원한 김민희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우선 명시하고 싶은 건, 나는 그쪽 길드와 함께 친목을 다질 생각은 없다는 겁니다."

'음... 일단 오케이."

김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쪽 길드를 선택한 건, 나 혼자서는 하기 힘든 부분에서 도움을 받기 위한 거고."

"그것도 오케이.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

김민희의 커다란 눈이 껌뻑였다.

"우선 이것 좀 보시죠."

강민이 서류 하나를 건넸다.

마법 명가의 노예 거래 장부다.

먼저 서류를 건네는 건, 지금 위드 길드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이미 마법 명가의 뒤를 쫓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직은 아닌지. 그것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

장부를 본 김민희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강민은 그런 김민희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이게 뭐죠?"

김민희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강민을 바라봤다.

"보시는 대로. 노예를 거래한 장부입니다."

"어떤 미친 새끼들이.. 이딴 짓을...?"

'아직은 아니군.'

방금 김민희의 반응으로 강민은 확신했다.

아직 위드 길드는 마법 명가의 흔적을 추적하기 전.

'하지만 이 떡밥이 뿌려졌다면, 미래는 달라질 것.'

"이놈들 뒤를 캐겠다는 거죠?"

"맞습니다."

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서부터 김민희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딴 새끼들을 가만히 놔둘 순 없죠. 누구예요? 짐작하고 있는 배후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 물음에 강민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렸다.

"마법 명가."

"...!"

"헐..."

한동희와 김민희는 동시에 말을 잃었다.

그러면서 서로의 시선을 다급하게 살폈다.

"....아니.."

"잠깐..."

둘은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강민은 침착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

'놀라는 게 당연하지.'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다.

마법 명가.

아무리 초창기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세력은 막강했고.

감히 그들에게 도전하리라는 건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

"우선.. 이건 제 선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사안이에요. 길드장님께 먼저 보고가 가야 할 것 같아요."

김민희는 강민의 표정을 살피며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어떻게 해 보고 싶지만... 마법 명가는 너무 커.'

그 말에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죠."

'위드의 길드장. 박명철. 마법 명가를 추적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강민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