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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32화 (32/277)

32화

"헉."

"허엇.."

"흐읍.."

내가 대기실로 들어선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싸움꾼들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특히나 데크의 똘마니들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구석에 숨어 있었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아직 몰른은 도착하지 않았나.'

싸움이 너무 빨리 끝나 버린 탓이다.

나는 다음 차례를 살펴보기 위해 벽면의 대진표를 살폈다.

'음?'

내 이름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래 내 이름이 있던 자리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고 다른 녀석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 그.. 모험가님...?"

처음 마지막 식사나 배불리 해 두라던 접수원이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로 내 뒤에 서 있었고.

그 뒤에는.

"한강민 모험가! 당신과 긴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신지.. 흐흐."

부유하게 생긴 돼지 한 명이 서 있었다.

'투기장의 주인이군.'

돈 냄새를 맡은 돼지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잘 됐어. 이놈을 이용하면 포인트를 더 빨리 쌓을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충분하지."

내 대답에 투기장 주인의 입가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나는 그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변에서 나를 보는 싸움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동경과 질투와 경탄과 절망.

온갖 감정이 뒤섞인 시선들이었다.

"경기는 인상 깊게 봤다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랬겠지."

"자신감이 넘치는데? 마치 계획했다는 것처럼."

"당연한 일 아닌가? 이건 쇼니까."

내 말에 주인의 입이 벌어졌다.

마치 대어를 낚았다는 그런 표정이다.

"하하하하!"

투기장의 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그를 바라봤다.

"내가 좋은 제안을 하나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배당금을 두 배, 아니 당신이 하는 것에 따라 몇 배로 뛰어오를 수도 있겠지."

"좋은 제안이군."

돈이야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자네에게 두 배의 배당금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더 많은 돈이 들어와야 해. 그건 당연한 일이겠지."

"물론이야."

"방금 전 자네가 한 말에 따르면... 자네에게 이 투기장은 하나의 쇼에 불과한 것 같은데."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 쇼를 조금 더 재미있게 해 보려는데.. 어떨까?"

나는 그의 제안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거야 말로 내가 바라던 바다.

최소의 시간 동안 최대의 포인트를 끌어모을 수 있는 방법.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어떤?"

돼지가 눈을 빛냈다.

내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이 투기장의 상위 랭크 다섯 명. 그 녀석들을 모두 나와 붙여라."

구경꾼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하나다.

강한 이들의 싸움을 구경하기 위한 것.

그런데 새롭게 나타난 도전자 한 명이 이곳에서 가장 강한 녀석들을 하나씩 깨부순다면.

관객들은 분명히 폭주하리라.

"허허.. 아무리 그래도..."

"죽이진 않을게."

"...!"

투기장 주인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들은 자네가 그렇게 쉽게 볼 이들이 아니야. 모두 기사 출신이라고!"

"기사. 오히려 더 잘 됐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전생에서 기사단을 택했을 때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기사 놈들.

기사라면 아주 치가 떨리니까.

"그래. 물론 이제는 조금 늙었지만 다들 과거에 상급, 중급의 기사들이었지."

투기장에 흘러들어온 기사.

단순히 늙어서는 아니다.

기사로서의 명예를 저버리고 투기장에 왔다는 건, 분명 무슨 사정이 있다는 뜻.

"잘 됐군. 상급 기사라니. 마음에 들어."

내가 말했다.

나도 궁금하다.

과거에는 하늘같이 높아 보이던 중급, 상급기사들이.

지금의 내가 얼마나 쉽게 짓밟을 수 있을지.

"허나 자네가 아무리 실력 있는 권법가라고 해도 기사들에게 맨주먹은..."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니. 자네는 분명 데크와 싸울 때 주먹을 쓰지 않았나!"

"내가 말했잖아. 쇼였다고."

내 말에 투기장 주인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내 주 무기는 검이다. 이것 말이야."

인벤토리에서 내 무기를 꺼냈다.

"....미치겠군."

***

결국 돼지는 내 제안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다만 그도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내가 사망해도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보통 싸움꾼들이 부상이나 사망했을 경우 어느 정도의 보상금이 주어지지만.

나의 제안인 만큼 보상금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돼지다운 발상이야.'

어차피 그런 일은 벌어지지도 않을 테니 나는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러 명의 플레이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음... 이분들이 주인... 아니, 모험가님을 찾고 계시기에.."

몰른은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스카우터들이군.'

안 봐도 뻔한 일이다.

11층을 통과한 시간, 그리고 투기장에서 내가 한 짓을 생각해 보면.

길드의 스카우터들이 꼬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내가 기다려 왔던 상황이기도 하지.'

물론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용할 생각은 있다.

말했듯 내 당장의 목표는 마법 명가를 부수는 것.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길드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 다들 이야기 한번 해 봐."

자기 어필을 해 보라는 뜻이다.

거만한 태도였지만 저들은 기분 나쁘게 듣지 않았다.

자기가 실력 있다고 생각하는 플레이어들의 콧대는 하늘을 뚫고 올라갈 정도고.

지금 나의 태도 정도면 굉장히 공손한 편이다.

물론 제대로 들어 줄 생각은 없다.

이미 생각해 둔 길드는 있으니까.

그들이 이곳에 있는지만 확인하려는 것.

"쿨한 분이시네요. 들어 보셨을 겁니다. 트리니티. 그게 바로 우리의 이름이죠."

트리니티.

알고 있다.

나름 이름 있는 중견 길드.

트리니티의 스카우터는 자신의 길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떤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으며, 탑의 어디까지 정복했고.

또 나에게 어떤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지.

그가 등장한 순간 대부분의 스카우터들은 벌써 기가 죽었는지 축 처져 있었다.

그만큼 트리니티 길드의 위상은 뛰어났다.

"그 다음."

트리니티 스카우터의 설명이 끝나고 내가 말했다.

"예..?"

"잘 들었으니, 그 다음."

분명 내가 놀라기를 바랐겠지만, 반응이 없자 오히려 당황한 건 스카우터 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트리니티는 내가 찾는 길드가 아니다.

스카우터는 침음을 삼켰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건.

"갈매기입니다."

갈매기 길드.

역시 훌륭한 길드다.

갈매기의 스카우터 역시 나를 설득하기 위해 수많은 제안들을 쏟아냈고.

나는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다른 곳에 향해 있었다.

'그 녀석들은 오지 않은 건가.'

내가 찾는 길드는 바로.

'위드.'

잡초라는 이름의 길드.

그들은 내가 활동하던 전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길드였지.'

그럼에도 그들을 찾는 이유는 하나다.

'놈들을 없앤 게 바로 마법 명가였으니까.'

수많은 길드들이 마법 명가의 악행을 모른 체할 때, 그들만이 마법 명가에 저항했다.

그 결과는 파멸이었지만.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마법 명가의 뒤를 캐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

위드 길드에 대한 정보는 전생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마법 명가 놈들이 한 짓이다.

'그 미래는 내가 바꾼다.'

위드 길드가 가진 정보를 이용하고, 그들을 이용해서 마법 명가를 부술 생각이다.

그 뒤로도 몇몇 길드가 자신들을 어필했다.

그들의 설명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대형 길드의 혜택 따위 별로 관심도 없다.

놈들은 어차피 마법 명가를 부수는 데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으니까.

'없는 건가.'

내심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흐음... 그냥 돌아가면 욕먹을 게 뻔해서요. 한마디라도 하고 가겠습니다. 저는 한동희고요. 위드 길드에서 왔습니다."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있었구나.

위드.

"그쪽으로 하지."

"예...?"

"아, 아니 잠깐만요!"

"뭐? 위드가 뭔데? 무슨 듣보잡을.."

"이름이 마음에 들어. 잡초라니."

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일대의 소란이 벌어졌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확고했고.

스카우터들의 어떤 제안에도 일말의 관심도 없다.

잠시 후 다른 길드의 스카우터들이 떠나갔다.

"아니.. 저기요."

한동희와 몰른, 그리고 나만 남았다.

한동희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문제 있습니까."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우선 저희 길드를 택해 주셔서 감사는 합니다. 아니지. 진짜로 감사합니다."

그가 넙죽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솔직히 망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필 제가 잠시 자고 있을 때 강민 씨가 관문을 통과했고."

"그랬군."

"뭐 암튼.. 저희 팀장님이 하도 쪼아서 오긴 했는데 다른 길드들이 너무 쟁쟁해서 포기했죠, 사실. 하나만 물어도 돼요?"

한동희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우리 길드를 택해준 겁니까? 아시겠지만 조금 전 있던 길드들. 다 이름 날리는 길드예요. 아, 물론 우리도 못난 길드는 아니지만.. 확실히 떨어지는 건 맞죠."

"알고 있습니다."

"하하.. 알 수 없는 분이군요."

나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괜찮은 사람이다.

"대답 안 해줄 겁니까?"

"뭘 말입니까."

"왜 우리 길드를 선택한 건지요. 나라고 해도 저 길드들 사이에서 위드 길드를 선택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말하더니 잠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팀장님한테는 비밀입니다."

솔직한 한동희의 모습이 미소가 지어졌다.

"이용해먹으려고."

"...예?"

"말 그대로. 이용해먹으려고 그랬습니다."

"...."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의 한동희.

"...우선 팀장님을 부르겠습니다."

"그게 좋겠네."

한동희.

조금 모자라 보이지만 착한 친구다.

***

하루가 지났다.

몰른의 말에 따르면 마법 명가의 뒤를 캐는 데 1주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잘 됐어. 어차피 앞으로 5일 동안은 투기장에 붙어 있어야 할 테니까.'

어쨌거나 과연 정보 길드다.

마법 명가의 뒤를 캘 수 있는 단체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20층 이내의 정보는 정보 길드의 정보로 충당하고. 그 이후부터는 위드 길드의 손을 빌려야겠지.'

정보 길드가 건넨 정보와 위드 길드가 가진 정보를 합친다면 금방 마법 명가 녀석들과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그건 됐고. 이제 곧인가.'

오늘 있을 경기.

이 투기장의 5위에 랭크되어 있는 전사.

'이름은 플랭크.'

경력은 꽤나 화려했다.

'49승.'

패배는 당연히 기록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패배는, 사실상 죽음이나 다름없는 말이니까.

'재밌겠어.'

당연히 오늘은 무기를 사용할 생각이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서.

'내 실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볼 좋은 기회니까.'

플랭크는 중급 기사 출신이라고 했다.

그런 중급 기사를 상대로 얼마나 압도적인 싸움을 벌일 수 있을지.

나 역시도 몹시 궁금하다.

'1분? 대충 1분 정도로 싸움을 끝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중급 기사를 1분.

상급 기사를 상대로 5분.

'이 정도만 된다면, 16층 이후로 만나게 될 녀석들과도 충분히 괜찮을 싸움을 해볼 수 있을 거다.'

이 말을 듣고 너무 자만하지 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지금의 나는 강해졌고.

이 대륙에 존재하는 강자들도 무자비할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다.

'이 정도도 최소로 잡은 거니까.'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험가님 차례가 되었습니다! 오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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