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한 녀석 정도는 남겨 둬야겠지.'
하긴을 통해 놈들의 뒷배를 털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아무리 하긴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에 대해서 완벽히 꿰뚫고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이럴 때 가장 정보를 확실하게 얻을 수 없는 건 교차 검증이다.
하긴의 증언과 저 녀석들 중 한 명의 증언을 교차하며 팩트를 체크한다는 말이다.
'어디 보자.'
놈들은 씩씩거리며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중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은.
'저 녀석이군.'
가장 뒤쪽에서 인상을 팍 찌푸리고 있는 녀석.
저 녀석이 대장이라고 확신하는 건 다름이 아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저 녀석의 눈치를 살피고 있어.'
조금만 살펴봐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정보.
놈들은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쉽지는 않겠군.'
놈들이 강해 보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동안 상대했던 플레이어들과는 다르게 놈들은 나름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탱커도 있어. 마법사와 활쟁이까지.'
마구잡이로 모여 있는 게 아니라는 뜻.
분명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이들을 선별해서 여기에 모아 놨다는 게 확실해졌다.
'이런 조합은 절대 우연히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처치한 세 명의 검수까지 포함한다면, 이들의 조합은 완벽하게 계획된 파티다.
'이런 식이라면 웬만한 스탯 차이 정도는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었겠지.'
이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오래 버틸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다.
저 녀석들은 결코 오합지졸이 아니다.
벌써부터 자신들의 포지션을 찾고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 순간.
콰르륵!
뒤쪽에서 마나가 느껴졌다.
마법이다.
'이쪽.'
나는 몸을 날렸고.
콰아앙!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바닥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마법을 피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마법 명가의 괴물들이 아닌 이상,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짧게나마 사전 준비 동작이 필요하다.
조준과 마력을 모으는 시간 말이다.
'그 짧은 순간만 읽어 낸다면 피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현재 저들에 비해 압도적인 육체 스탯과, 무수한 실전 경험이 동반된 상태기 때문에 가능한 것.
"뭐야! 저 새끼!"
마법사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곧바로 다시 방향을 틀며 움직였다.
콰아앙!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마법이 터져 나왔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패애애앵!
이번엔 화살이다.
내 눈은 움직이는 순간에도 바쁘게 놈들을 살폈다.
한순간이라도 놈들의 움직임을 놓치면 안 된다.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정확히 포착해야 화살과 마법을 피할 수 있으니까.
놈들과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물론 나 역시도 완벽하게 놈들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나는 기계가 아니니까.
그만큼 놈들의 합은 잘 맞아떨어졌고.
서로의 빈틈을 완벽하게 메꾸고 있었다.
틈틈이 이클립스를 꺼내 체력을 회복시켰다.
"이런 미친 새끼! 진짜 뭐 하는 새끼야!"
"저거 하나를 못 죽여! 니들 뭐 하는 것들인데?"
하지만 오히려 놈들의 내부에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고전하는 것과 별개로 저들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을 테니까.
놈들과 나는 더욱더 가까워졌고.
가장 앞에서 검을 든 다섯이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우우웅!
다섯을 동시에 상대하기 위해 충격파를 사용했다.
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의 진동은 점점 더 강해지며 손아귀를 간질였고.
파앗!
나는 몸을 낮춘 채 놈들을 향해 빠르게 도약했다.
"헛!"
원거리 딜러들의 시야의 사각으로 파고든 순간.
휘익!
검을 최대한 낮게 휘둘렀다.
놈들의 발목에 닿을 정도로 낮은 위치.
파각!
두 명의 발목을 검이 훑고 지나갔다.
그 순간 충격파의 효과가 발동됐다.
놈은 몸을 크게 경련했다.
그 충격은 그 옆에 있는 두 명에게도 전해졌고.
파득! 파가각!
순식간에 세 명의 발목에 터져 나가고, 충격파의 영향으로 다섯이 동시에 괴성을 내질렀다.
다시 한번.
푸훅!
검을 가슴팍에 박아 넣었다.
놈의 가슴이 크게 요동치며 뼈가 내려앉았다.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두 세 명이 충격 데미지로 몸을 뒤틀었다.
"커허억!"
"뭐, 뭐야! 이 새끼 뭐냐고!"
뒤쪽에서는 다급한 외침들이 들려왔다.
휘이이익!
콰콰쾅!
당황한 마법사와 궁수들이 공격했지만, 나에게는 닿지 않았다.
"커헉!"
오히려 자신들 아군의 몸을 두드렸고.
앞서 있던 다섯의 플레이어들은 순식간에 쓰러졌다.
'이번엔.'
타다닥-
검에서 진동이 사라졌고,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처치해야 한다.'
지금 내가 노릴 녀석은 힐러.
내게 허락된 시간은 길어야 2초.
이 짧은 시간 동안 힐러를 향해 도약해야 했고.
한 번에 놈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
치직!
전류가 모두 충전됐다.
몸 안에서 강한 기운이 용솟음치며 눈앞의 장면들이 느려졌다.
꽈악!
땅을 향해 발을 디디며 힐러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느려진 시야와 함께 놈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패애애앵!
몸이 화살과 같이 빠른 속도로 놈을 향해 날아들었다.
"안...."
놈의 입에서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 다음 단어가 나오기도 전.
나와 놈의 거리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푸훅!
검이 놈의 목을 관통했다.
"돼....!"
안 돼.
두 글자가 놈의 입에서 나오기도 전, 놈의 숨을 끊는 데에 성공했다.
놈은 눈을 부릅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미처 파악도 못 한 것이겠지.
힐러가 몸을 가늘게 떨었고.
이내 움직임이 멈췄다.
아직 뇌전검은 끝나지 않았다.
뇌전검의 사용 시간이 다 가기 전에 한 녀석이라도 더 처치해야 한다.
푸학!
검을 뽑아 들었다.
"막, 막... 커헉!"
파각!
그 옆에 있는 마법사의 외침.
하지만 그 외침이 끝이 나기도 전에 바닥을 뒹굴었다.
'앞으로 3초.'
뇌전검을 사용한 지 2초가 지났다.
두목은 죽이지 않는다.
나는 다시 몸을 뒤틀며 재빠르게 발을 디뎠다.
그러는 와중에도 놈들의 모든 동작은 내 시야에 담겼다.
뇌전검으로 민첩성이 폭증하며 느려진 시야는, 놈들의 움직임을 더 정확히 포착할 수 있게 도와줬다.
콰콰쾅!
놈들의 눈 먼 공격들이 내가 있던 위치로 날아들었지만, 그곳에 이미 나는 없었다.
파각!
검이 움직일 때마다 하나씩 쓰러졌다.
두 번은 없었다.
그만큼 나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 번의 실수는 곧 패배로 직결될 것이다.
타다닥-
마침내 대장을 제외한 모두가 쓰러졌을 때, 뇌전검의 사용 시간이 끝이 났다.
"...."
여기에 서 있는 건, 오직 나와 대장뿐.
놈의 손이 가늘게 떨려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너, 너... 뭐 하는 새끼..."
빠각!
놈의 다리를 걷어찼다.
"크아아아악!"
놈의 다리가 뒤틀렸다.
이미 80레벨을 뛰어넘은 나의 육체 스텟.
이런 녀석이 버텨 낼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조금 더 손을 봐줘야겠지. 까불지 못하도록."
놈의 무릎을 다시 한번 걷어찼고.
빠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으, 으아아아아악!"
놈의 괴성이 내 귀를 두드렸다.
***
"이 녀석은 묶고, 하긴 저 녀석 일어나면 몰른한테 이야기하도록."
"예, 예..!"
끌려왔던 이들이 바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몰른을 바라봤다.
"몰른, 너는 하긴이 깨어나면 나를 부르고."
"예! 예! 물론이죠! 오호..호호호!"
상단의 호위대와 몰른이 차렷 자세로 외쳤다.
방금 전의 싸움 장면을 보고 호위대 몇 명은 주저앉아서 오줌마저 지리고 있었다.
"너희도 딴생각 말고 얌전히 있었으면 좋겠군."
상단을 호위하던 건달들에게 말했다.
"그, 그럼.. 그럼요! 걱,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몸을 돌려 저택으로 향했다.
"어, 어디.. 가십니까?"
몰른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잠깐 쉬러."
"아, 아아! 그렇지요! 편히 쉬다 오십시오! 괜찮으시면 저의 노래가..."
"필요 없다."
"오호호.. 그렇군요.."
나는 플레이어들의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저 안에도 분명 괜찮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돈이나 음식이라도 있으면 챙겨 둬야겠지. 쓸 만한 아이템이라도 있으면 더 좋겠고.'
나는 저택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고 그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많이도 해 먹었군."
화려하다.
한눈에 봐도 값비싼 것들이 널려 있었다.
"허, 헉!"
그 안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다 처치했다. 너희도 밖에 나가 있어."
내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고.
서로 시선을 바쁘게 공유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리 나갔으면 좋겠는데."
"아, 알겠습니다!"
그제야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가는 하인들.
밖에 펼쳐진 장면에 다시 한번 괴성이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했다.
'물건을 찾기도 쉽지 않겠군.'
워낙 넓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
돈은 없었다.
역시나 어딘가 흥청망청 다 써 버렸겠지.
그렇다고 소득이 없던 것도 아니다.
'우선 장신구.'
다른 방어구와 달리 장신구는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만큼 가격도 옵션에 따라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가장 기본적인 옵션을 가진 장신구만 하더라도 수십만 골드에 육박할 정도.
'반지 두 개에 목걸이 하나, 그리고 벨트까지.'
이 정도면 수백만 골드는 능히 육박할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지금 내 돈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장비들이다.'
반지 하나의 옵션은 마법 저항력 20%.
내가 얻은 장신구 중 가장 뛰어난 옵션이다.
일반 방어력과의 가치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
'다른 하나는 힘의 반지.'
힘을 5 증가시켜주는 반지.
물론 이것도 훌륭한 아이템이다.
벨트의 옵션은 반지에 비해 조금 떨어졌다.
물론 반지가 워낙 사기적이기 때문이지, 벨트의 옵션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방어력 증가에 체력 증가까지.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하지.'
하지만 그보다 더 내 시선을 끄는 건.
>잠재 옵션 : 마력 + 10
'...생각지 못한 소득이야.'
무기나 방어구와는 다르게, 장신구에서는 모두 마력을 포식할 수 있었다.
'육체 스탯보다 훨씬 많은 포식 포인트가 필요하긴 하지만.'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모든 마력을 포식했다.
'마력이 한 번에 30이 됐다.'
마력이란 선천적인 재능이 없으면 올릴 수 없는 스탯이다.
'전생의 나도 마력은 고작 6에 그쳤지.'
게다가 뇌전검은 마력의 영향을 받는 기술이다.
마력이 올라갈수록 뇌전검의 위력 또한 강해진다는 뜻.
'운이 좋았어.'
나는 저택의 중앙에 놓여 있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 앞에는 놈들이 먹다 남긴 음식도 있었지만 손을 대지는 않았다.
나는 몸을 누인 채로 눈을 감았다.
아직도 손끝에서 놈들을 베어냈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과거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힘.
그게 지금 내 손에 들어왔다.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같은 11층이지만 그때와 지금 나의 상황은 너무도 달라졌다.
'그때 나는 기사단 말단에서 구르고 있었지.'
어떤 능력도 가지지 못한 채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사들에게 얻어맞고 구르며 그들의 검술을 어깨 너머로 배우고 습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가 기사단을 택했던 이유기도 하고.'
그때에는 오러도 다루지 못하는 하급기사조차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하급기사에게 한 번 덤볐다가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기도 했다.
그만큼 과거의 나는 약했다.
내가 가진 거라곤, 탑을 오르겠다는 집념뿐.
그때 생각을 하니 괜시리 입가에 쓴맛이 맴돈다.
'그러니까 층 하나를 올라가는 데 몇 달씩 걸렸던 거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같은 레벨이라고 해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지금 당장 기사단에 들어간다고 해도 웬만한 상급 기사 따위는 내 상대도 되지 않겠지.'
물론 오러를 다루는 소드 마스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들은 지금의 나로서도 역부족이다.
그래서 더욱더 마음 놓을 수 없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멀다.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수십 배,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해.'
말도 안 되는 괴물들, 그리고 플레이어들이 득실거리는 이 탑.
그리고 베일에 가려져 있는 70층 너머.
그곳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조금 강해졌다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똑똑..."
그때 내 눈앞에서 몰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본 순간 피식,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똑똑, 이라니.
하여간 웃기지도 않는 녀석이다.
"뭐지?"
내 물음에 몰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상인이 깨어났습니다. 오호호..!"
"그렇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가자."
이제 놈들의 배후를 캐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