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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6화 (26/277)

26화

'그리 멀지는 않았어.'

나는 지금 마을 주민들이 알려 준 도시에 도착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말대로 처음 도착한 마을과 이 도시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무튼 이 도시는 첫 번째 관문에 딱 걸쳐 있었다.'

관문이라는 건 물리적으로 존재는 건 아니다.

'플레이어들에게만 작용하는 것이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지구와는 또 다른 세상이다.

이들만의 역사가 존재하고 문화가 존재한다.

그들에게는 나를 가로막는 관문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한다.

'플레이어들의 행동만을 제약하는 거지.'

도시의 끝자락에서 보이는 투명한 장막.

나는 결코 저 장막을 통과할 수 없다.

게다가 마을에 존재하는 상점도 이용할 수 없다.

플레이어들이 구매할 수 있는 건 고작 해봐야 맥주나 음식 정도.

장비 상점에도 관문과 같은 투명한 장막이 막고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

포인트를 모으기 전까지는 말이다.

'포인트를 가장 빠르게 모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악명 높다는 녀석들을 처치하는 거지.'

그들 역시도 11층에 머무는 플레이어들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이미 마을을 돌아다니며 놈들에 대한 정보를 얼추 파악한 뒤였다.

그리고 이 마을 어딘가에서 곧 놈들과 거래하는 노예상이 출발할 거라는 사실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쾌재를 내지를 뻔했다.

설마하니 산적 두목이 정말로 마법 명가와 연관된 놈이었을 줄이야.

'지금 가진 포인트는 총 4500포인트.'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내가 산적들의 씨를 완전히 말렸기 때문이다.

내가 구했던 마을의 주민들은 인접해 있는 마을의 주민들에게 내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 덕분에 나의 명성이 차차 쌓이며 포인트가 올라가고 있었던 것.

'이 정도가 한계겠지만, 하루 만에 4000포인트를 넘긴 건 확실히 고무적인 일이지.'

그나저나 이제는 노예상을 찾아야 한다.

'어차피 나는 플레이어들이 있는 장소도 모르니까.'

물론 위치를 안다고 해서 다짜고짜 찾아가서 때려 부술 수는 없다.

사실 때려 부수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놈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뿐이다.

'명성을 쌓으려면 증인이 필요하니까. 아무리 나 혼자 놈들을 쓰러트려 봐야 포인트는 오르지 않아.'

놈들을 처치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노예상만 찾으면 플레이어들이 있는 위치를 찾고, 놈들을 처치하면서 명성을 동시에 쌓을 수 있다.'

머릿속에 앞으로 내가 할 일에 대한 순서가 확립됐다.

생각을 정리했으면 이제 움직일 차례.

'주점으로 가자.'

우선은 도시에 존재하는 나름 규모가 있는 주점으로 향했다.

주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떠돌이 용병들이나 음유시인, 상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저 맥주나 마시며 세월아 네월아 기다릴 생각은 없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사람과 대화하는 사람.'

그건 바로 주점의 직원.

나는 직원을 향해 걸어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뭐 좀 묻고 싶은데."

직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노예상이 이 근처에 와 있다고 들었다. 어딜 가면 볼 수 있지?"

내 말에 놈의 눈이 커졌다.

"쉿! 조용히 하십시오. 그들에 대해서 떠들면 안 돼요. 언제 모르게 잡혀갈지 모른다니까요!"

그러면서 주변을 급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다시 묻지. 이 도시에 있는 건 확실한가?"

"스읍!"

그는 다시 손가락을 입에 대며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눈알이 바쁘게 한쪽으로 굴러간다.

한 곳으로 말이다.

거짓말은 못 하는 녀석인 것 같다.

"전 모릅니다요. 예! 갑니다, 가요!"

나를 지나쳐 주문을 받기 위해 달려갔다.

어쨌든 멍청한 직원 덕분에 괜찮은 정보를 얻었다.

'여기에 있군.'

직원의 눈알이 바쁘게 굴러가던 곳 말이다.

노예상을 찾는 이유는 하나다.

놈들과 같이 플레이어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어렵게 길을 찾을 필요도 없을 것이고, 노예로 끌려가는 이들을 구해주면 그들은 내 명성을 위한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나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히익!"

주점은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잔을 떨어트렸다.

나는 직원의 뒤쪽을 바라봤다.

거기에선 음흉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역시나.

"저, 저... 저는.. 아무 말도..."

직원이 벌벌 떨며 말했다.

툭툭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끼익-

세 남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

"예, 예? 저, 저는.. 정말.."

짤랑

나는 직원에게 골드를 건넸다.

대략 1만 골드에 달하는 금액.

"주인에게 가져다주도록. 한 푼이라도 네놈이 집어삼키면 다리를 부러트려 버릴 테니까, 헛짓은 할 생각도 말고."

"예.. 예..?"

나는 대답 대신 세 남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 남자는 험상궂은 얼굴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과 나는 금세 가까워졌다.

"너. 우리를 찾..."

콰직!

"크아아아악!"

주먹이 가운데 있는 녀석의 면상을 박살 냈다.

놈이 자빠지며 뒤에 있던 술상 위로 자빠졌다.

"꺄아아악!"

"뭐 하는 짓이야!"

순식간에 소란이 일어나며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금 전 직원에게 준 1만 골드는 수리비를 포함한 피해 보상금이다.

"이, 미, 미친...!"

그와 함께 세 명 중 한 명이 나를 바라봤고.

놈이 얼굴을 붉힌 채 달려들기 시작했다.

놈의 하체를 향해 로우킥을 내질렀다.

빠득!

녀석의 다리가 뒤틀렸다.

놈은 괴성과 함께 부러진 다리를 부여잡고서는 그대로 나자빠졌다.

남은 녀석은 하나.

나는 공격하는 대신 놈을 바라봤다.

나를 노예상들에게 이끌어 줄 한 명 정도는 남겨 둬야 하지 않겠나.

"너."

"허, 헉..."

"대답."

"예, 예...!"

놈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노예상 맞지."

"그, 그..."

놈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노예 거래는 불법인 만큼 내가 그들을 잡으러 온 사람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처음엔 자신들의 실력으로 나를 묻어 버리려고 했겠지만, 이제야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겠지.

하지만 알다시피 내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다.

"쫄지 마라. 잡으러 온 거 아니니까."

"그, 그럼...?"

조금 안색이 풀리며 놈이 내게 물었다.

"나를 잡아가라."

"...?"

놈이 눈을 껌뻑이며 나를 바라본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말 모르겠어?"

"아,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잡아가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채로 놈이 외쳤다.

***

"네가 이 상단의 주인인가?"

내 앞에는 키가 작고 왜소한 남자가 서 있었다.

"...."

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 주변에 서 있는 남자들을 돌아봤다.

내게 얻어맞은 두 명, 그리고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한 명.

그 뒤로도 건장한 장정 열 명이 넘게 서 있었지만, 그들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내게 두드려 맞은 세 명이 이들 중 가장 실력자였던 모양.

"저... 제가 머리가 이상하게 된 게 아니라면... 직접 노예로 본인을 잡아가라고..."

상단주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확히 이해했어. 머리가 잘못된 건 아니다."

"그런 짓을 왜..?"

"묻지 마라."

"아, 알겠습니다..."

상단주는 꼼짝도 없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 있는 열 명이 내게 한 번에 덤벼들어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깨달았을 테니까.

"저곳에 올라타면 되는 건가?"

내가 마차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부, 불편하실 텐데. 저곳으로.."

그러면서 자신이 타기 위해 준비한 마차를 가리켰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잊었어? 나는 노예야. 너는 나를 노예로 잡아가고 있는 거라고."

"그, 그러시다면.. 알겠.. 습니다.."

"아, 하나 더 묻지."

"예, 예..."

"그 녀석들 확실히 모험가들이 맞는 거야?"

모험가.

탑의 원주민들이 플레이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내가 들은 바로 노예상과의 거래액은 꽤 크다.

11층에서 얻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심지어 이런 거래가 꽤나 빈번하다고 했으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분명히 놈들에게도 배후가 있다는 뜻이다.

대충 머리에 그려지는 그림이 있긴 하지만 눈으로 보기 전까진 확신할 순 없다.

그건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출발은?"

"이제.. 곧.. 출발할 겁니다.."

"알겠다."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마차에 올라탔다.

"흐흑... 흑.."

"그만 쳐 울어! 시끄러 뒈지겠구만!"

그 안은 시끄러웠다.

이미 체념한 채 자포자기한 사람.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눈물 흘리는 사람.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있었다.

"흐흑.. 흐흐흑!"

"제기랄! 닥쳐! 닥치라고!"

다시 한번 소란이 벌어졌다.

내가 올라탄 것 따위는 모두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순간.

"여, 여러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한 녀석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제, 제가.. 노래라도 한 곡 뽑아 보겠습니다!"

그러더니 악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류트였다.

띵~ 띵~

천천히 류트의 줄을 뜯더니 이내 노래를 시작했다.

가사는 들어주기 민망할 정도로 유치했지만, 악기를 다루는 솜씨는 나름 괜찮았다.

그렇게 1분여 남짓 연주를 했을 무렵.

"닥쳐, 이 개새끼야!"

"허, 헉!"

터져 나온 욕지거리에 악기를 연주하던 남자는 기겁하며 연주를 멈췄다.

'저 녀석.'

하지만 나는 놈을 보며 눈을 빛냈다.

마침 괜찮은 친구 하나가 마차에 올라 있었다.'

"너."

내가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는 방긋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바, 반갑습니다. 저는 몰른이라고 하죠. 음유시인이랍니다. 하핫."

역시.

음유시인이라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다.

"한강민이다."

"한강..민? 특이한 이름이군요. 아, 혹시 모험가님이십니까!"

"그렇다."

"오오오! 모험가! 모험가는 멋진 사람들! 오호호!"

시끄럽다.

아마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나는 놈을 보며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음유시인을 만나게 될 줄이야.'

심지어 노예상의 마차 안에서 말이다.

음유시인들이란 떠돌아다니며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시와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다니는 이들이다.

'그렇다는 건, 놈을 풀어주면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내 이야기를 떠들고 다닐 수도 있다는 말이지.'

나는 가만히 있어도 나의 명성이 대륙에 퍼지게 된다는 뜻.

가만히 앉아서 포인트를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부탁 하나만 하지."

"부탁? 부탁이라고요? 저는 자유로운 영혼! 그 누구의 부탁도 듣지 않습니다아아! 오호호!"

"정말인가?"

짤랑

나는 손 위로 골드를 꺼내 흔들었다.

순간 놈의 동공이 작게 흔들린다.

음유시인은 본디 가난한 이들이다.

간혹 귀족이나 왕의 마음에 들어 성에 거주한 이들은 이야기가 다르지만.

"오호.. 호... 음유시인.. 은.. 돈에 유혹되지...않.. 습니다아아~~ 오호..호!"

조금 끈질기다만.

아직 끝이 아니다.

노예상에게 잡혀 올 정도의 음유시인이라면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했을 확률이 크다.

나는 오크 고기와 마을 주민들이 줬던 음식 몇 개를 꺼냈다.

놈의 코가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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