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마을의 촌장은 내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딱히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다.
이미 이 마을의 주민들 덕분에 3500이 넘는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말씀만 해 주신다면.. 저희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보답하고 싶습니다."
촌장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마침 내가 구한 이들 중 촌장의 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애초보다 더 많은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
"흐음."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베풀겠다는 호의를 거절할 생각은 없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많이 없겠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생각하면 안 된다.
'특히나 방랑 무사를 선택했으면 말이지.'
앞으로 20층까지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얻어 낼 수 있는 건 하나라도 더 뽑아 먹어야 한다.
"우선 배를 좀 채워야 할 것 같은데. 식사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아아! 그렇군요. 시장하실 텐데,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러더니 촌장은 다급하게 마을 주민들을 불렀다.
밖에서는 돼지를 잡으라느니, 소를 잡으라느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우선 배 좀 채우고 마을을 천천히 둘러봐야겠어.'
오크 고기는 아직 많이 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이 오크 고기만 먹다 보면 물릴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면서 영양을 고루 섭취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분명히 작은 마을이지만 쓸만한 게 있을 거다.'
식사가 준비되기 전 나는 마을을 둘러봤다.
겉에서 봤던 그대로 작은 마을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농촌 마을.
'특별한 건 없는 건가.'
그렇게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대장간.'
이런 작은 마을에 대장간이 있다니.
그래 봐야 그리 실력 있는 대장장이는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잘된 일이다.
6층에서 구입했던 검의 날이 많이 닳아 있었으니까.
게다가 구매했던 장비 역시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많이 해진 상태였다.
'날을 갈고 가죽 갑옷도 수선 정도는 맡길 수 있겠지.'
역시 소득은 있다.
작은 마을이라고 해서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나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깡! 깡!
대장장이는 지금도 무언가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건 역시나 농기구들.
하긴 이런 작은 마을에서 무기를 만들 리는 없겠지.
"누구시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때 대장장이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사람은 아직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전후 사정을 짧게 설명했다.
"그렇군. 감사한 분이로군."
이게 그가 던진 대답의 전부였다.
말은 감사하다고 했지만 굉장히 건조한 한 마디였다.
다른 마을 주민들처럼 크게 감정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이 마을의 주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건 내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검과 갑옷을 좀 맡기고 싶습니다."
"흠."
대장장이는 내가 입은 옷과 검을 살폈다.
만약 내가 가진 장비가 뛰어난 장비였다면 시골의 대장장이에게는 맡기지 않았으리라.
어설픈 솜씨로 만졌다가는 훌륭한 장비를 망가트릴 테니까.
하지만 지금 가진 장비는 고작 5층의 마을에서 구매한 장비.
부러트리지만 않는다면 누구에게나 맡겨도 상관없을 정도의 아이템들이다.
"두고 가시오. 내가 손질 해 둘 테니."
검과 옷을 벗어서 한 구석에 놔뒀다.
옷에서는 악취가 났다.
땀내와 피 냄새가 뒤덮여 있었다.
검의 날도 꽤나 많이 무뎌졌다.
제대로 손질만 해 줘도 앞으로 탑을 오르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차피 15층의 마을까지만 버티면 될 테니까.'
내가 벗어둔 장비를 보며 대장장이가 말했다.
"대충 내일쯤 들러 보시오."
"그러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어느새 마을 전체에서 좋은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돌아가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이런저런 선물을 주려고 했지만 받지 않았다.
괜히 잡동사니만 늘어날 테니까.
그런 와중에도 내가 챙긴 건 두고 먹을 수 있는 식량 정도다.
가끔 집에 숨겨 뒀던 패물을 꺼냈지만 그닥 돈 될 만한 건 없었다.
"자, 자. 다들 나가시게. 기사님께서 식사를 하셔야 할 테니."
촌장은 나를 기사라고 칭했다.
사실 저들 입상에서 검을 들고 강해 보이면 다 기사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굳이 호칭을 고쳐 주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식사는 너무 훌륭한데.'
잔칫상이라도 차려진 것 같았다.
마을 주민들이 제대로 솜씨를 발휘한 모양.
나는 거절하지 않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문득 탑에 오르기 전 식당에서 먹었던 서양식이 떠올랐다.
촌장의 가족들도 내 옆에서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었다.
내 앞에 있는 고기는 손도 대지 않았다.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냥 그대로 놔뒀다.
다 먹지는 않고 남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문득 왜인지 모르게 대장장이에 대해 궁금해졌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내 말에 촌장이 나를 바라봤다.
"무엇이든지요."
"마을에 대장간이 있더군요."
"아, 그렇습니다."
"이 마을의 주민이 아닌 겁니까?"
내 말에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마을에 정착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요. 다만 농기구를 만들어 준다니 받아 줬을 뿐입니다. 마을 사람들과 통 교류도 없지요."
"그렇군."
어쩐지.
마을과 왠지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 이유가 있었다.
"실력이 아주 훌륭합니다. 그 대장장이가 우리 마을에서 농기구를 손봐주기 시작하면서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지요."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실력이 있는 대장장이라면 나에게 있어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잠시 후 식사를 마쳤다.
"나는 그럼."
저들이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자리에서 비켜줬다.
"이건 좀 가져가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빵 한 덩어리를 들었다.
"예, 물론입니다."
나는 빵 한 덩어리를 챙긴 채 촌장의 집에서 벗어났다.
'대장간에 한번 가봐야겠어.'
***
깡! 깡! 깡!
여전히 대장장이는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내 검이다.'
식사를 하는 중에도 멈추지 않고 쇠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내 검을 손질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는 내가 왔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채 검을 손질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이미 손질을 마친 내 갑옷들이 걸려 있었다.
처음 샀을 때 이상으로 뛰어난 상태였다.
'재료도 딱히 없었을 텐데.'
한눈에 보더라도 어설픈 솜씨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촌장의 말 그대로다.
아니, 어쩌면 촌장이 알고 있는 건 저 대장장이 실력의 고작 일부일 지도 모른다.
다시 대장장이를 바라봤다.
그의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지만 시선은 한순간도 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대장장이는 아니야. 확실해.'
나는 한참이나 그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무뚝뚝하던 대장장이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는 검을 손질했다.
마침 나도 할 것도 없겠다 그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봤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치이이익!
그가 달궈진 검을 물 안에 집어넣었고.
마침내 검을 들어 면면히 살폈다.
그제야 내가 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잠시 몸을 움찔하며 놀랐다.
"언제부터 와 있던 거요?"
"얼마 안 됐습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내게 건넸다.
"마음에 들 거요. 나름 공을 들였으니까. 검을 만져 본 게 오랜만인지라 나도 꽤 즐겁게 작업했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받아 들었다.
검신에는 물결무니가 새겨져 있었다.
처음에 샀을 때는 없던 것이었다.
검의 균형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게다가 손잡이도 손을 봐 놨는지 손에 닿는 감촉이 뛰어났다.
'훌륭한 솜씨다.'
나는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말했든 이 대장간에는 특별한 금속이나 훌륭한 공구도 없었건만.
이건 오롯이 대장장이의 실력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었으니까.
그 순간 무기의 정보가 떠올랐다.
[장인의 손을 거친 철도]
>공격력 : 50
>추가 능력치 : 힘 +5 민첩성 +5
"허.."
분명 처음 샀을 때와 이름도 달라졌다.
처음 이 검의 이름은 초보자를 위한 철도였다.
추가 능력치도 전혀 없었건만.
힘과 민첩성이 추가로 증가됐고, 공격력도 40이나 올라가 있었다.
'이럴수가.'
나는 곧바로 방어구를 향해 다가갔다.
방어구도 마찬가지다.
방어력이 총 50이나 증가됐고 민첩성을 총합 12, 거기에 체력을 20이나 올려줬다.
'이런 아이템은 15층 마을에서도 꽤나 거금을 줘야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인데.'
그 말대로다.
추가 능력치를 부여하는 아이템은 15층 마을에서야 구할 수 있고.
심지어 하나의 가격이 수십만 골드를 육박할 정도니까.
'게다가 50의 공격력은. 확실히 10층대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무기야.'
예상치 못한 소득이다.
"마음에 드시오?"
대장장이가 물었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걸 줘놓고 마음에 드냐니.
"마음에 들다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건 미친놈이겠지."
"덕분에 오랜만에 나도 즐거웠소."
"배고플 텐데 이거라도 먹으십시오."
나는 그에게 챙겨 온 빵을 건넸다.
그는 빵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안 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그 말을 끝으로 대장장이는 대장간 뒤에 있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저 자신의 일을 다 했으니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저런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알 수는 없었다.
사실 고층에 올라간다면 저 정도의 대장장이는 많다.
하지만 확실한 건 결코 11층에 있을 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캐물을 수도 없었다.
저 사람의 성격이라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을 테니까.
심지어 내 기억에도 없는 인물이다.
'어쩔 수 없지.'
장비를 다시 챙겨 입은 채 대장간을 나섰다.
'이제 남은 포인트는 대략 6500.'
시작부터 큰 소득을 올린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마을을 떠난다. 이 속도라면 3일내에 충분히 12층에 올라갈 수 있을 거야.'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두 배 정도 빨라진 속도다.
'12층 정도면 충분히 30레벨에 도달할 수 있을 거고.'
나는 촌장이 지정해 준 집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비어서 아무도 쓰지 않는 집이라고 했다.
집의 원래 주인은 이미 산적에게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던가.
나는 방에 있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미 마을 주민들이 손을 봐 놨는지 깔끔했다.
'오랜만에 편하게 잘 수 있겠어.'
쉴 수 있을 때 확실히 쉬어 놔야 한다.
또 언제 이렇게 편한 잠자리에서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니까.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
"그게 정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산적들이 하는 이야기를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날이 밝자마자 어제 내가 구해줬던 이들 몇 명이 내게 달려왔다.
그들은 이제 완전히 충격에 벗어나서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전했다.
나는 마을을 떠나기 전 그들에게 도시의 위치를 물었을 뿐이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신이 나서 내게 이런 귀중한 정보를 전해줬다.
"그러니까 그 신비로운 힘을 쓰는 녀석들이 여기 어딘가에 또 있다는 거지? 산적 두목은 그들과 있다가 떨어져 나온 거고."
"맞습니다. 정확해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다시 한번 마법 명가 놈들의 꼬리를 밟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직접 가서 확인해 보면 되겠지.'
"이 마을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꽤 규모가 있는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다고 했어요.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악명.
그것은 명성의 또 다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