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러니까.. 강민 씨는 혼자서 방랑 무사를 선택하시겠다는 겁니까..?"
리더가 물었다.
평소에 웬만해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지 못했다.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이도는 둘째로 치고도, 플레이어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곳이 바로 11층부터 20층이다.
11층부터 펼치지는 낯선 세계에 적응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포인트를 쌓기란 결코 쉽지 않다.
'다음 층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당 층에서 요구하는 할당량을 채워야만 하지.'
포인트를 채우는 방법은 선택하는 역할에 따라 달라진다.
기사단을 택한다면 기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 될 것이고, 용병을 택한다면 용병의 역할을.
상단 호위를 택한다면 상단 호위를 열심히 하면 된다는 뜻
말했듯이 포인트를 습득하는 양은 난이도에 따라서 달라지고.
'그렇게 생각하면 지옥 난이도인 방랑 무사야말로 가장 빠르게 포인트를 모을 수 있는 역할군이니까.'
물론 말 그대로 극악의 난이도라는 건 말 할 필요도 없다.
다른 역할군과는 달리 혼자서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11층부터 20까지 오르는 과정에서는 플레이어들 뿐 아니라 11층의 원주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지구인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놈들이지.'
인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다.
사람 죽이는 것을 개미 죽이듯이 하는 녀석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이라는 뜻.
'거기에서 홀몸으로 살아남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당연히 전생의 나도 14번을 선택하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난이도가 높은 기사단을 선택했고, 나름 활약하며 그나마 빠른 속도로 20층을 돌파할 수 있었다.
'망할 기사 놈들. 꼰대가 득실거리는 곳이었어. 상상도 하기 싫은 기억이야.'
하지만 방랑 무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실력만 있다면 어떤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탑을 활보할 수 있다.
'그리고 몸이 자유로운 만큼 마법 명가의 꼬리를 밟는 게 훨씬 쉬워질 거다.'
"알겠습니다. 강민 씨의 뜻이 그렇다면."
나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주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파티원들도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나를 더 이상 붙잡지는 않았다.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겠죠?"
최현서가 나를 보며 말했다.
"글쎄."
그건 내가 답해 줄 수 없는 물음이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은 없다.
그랬다는 건 전생의 70층에서 저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
내 말 뜻을 이해했는지 잠시 숙연해졌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고친 주강현이 나를 바라봤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저들 역시 알 것이다.
탑에서 살아남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살아남아야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살아남겠습니다."
나를 보며 주강현이 눈을 빛냈다.
그 뒤에 서 있는 파티원들도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좋은 눈빛이다.
비록 전생에서 저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죽었겠지만 미래야 충분히 바뀔 수 있다.
물론 그건 앞으로 저들이 헤쳐나가야 할 일이겠지만.
"그럼. 여기 까지겠군."
나는 그렇게 말하며 역할 목록을 향해 손을 옮겼다.
그 뒤로 파티원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당연히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들 역시 꽤 훌륭하게 성장했다.
앞으로도 충분히 탑을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나는 14번 '방랑 무사' 위에 손을 가져다 댔고.
['방랑 무사 – 난이도 : 지옥'을 선택했습니다.]
[11층으로 이동합니다.]
순간 시야가 밝아졌다.
***
[탑의 11층에 올라섰습니다.]
"산속인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산속이었다.
그와 함께 눈앞에는 지도 하나가 펼쳐져 있다.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지도.
게임의 맵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것이다.
"관문과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이군."
말했듯 역할군마다 층을 올라가는 방식은 다르다.
내가 선택한 방랑 무사는 매 층이 하나의 관문으로 이뤄져 있다.
관문 내에서 할당된 포인트를 모아야만이 관문의 문을 열고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
'무작정 관문으로 간다고 해서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지.'
그게 바로 11층부터 20층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이유다.
1층에서 10층처럼 단순히 몬스터를 사냥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건 의미가 없다.
가장 중요한 건 할당된 포인트를 쌓는 것.
'방랑 무사의 역할은 명성을 쌓는 것이니까. 명성을 빠르게 쌓을수록 더 많은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복잡한 건 아니다.
명성을 쌓는 것.
특히나 이런 판타지 세계에서 명성을 쌓는 건 간단하다.
'힘.'
강한 적을 때려 부수거나 이름 있는 몬스터를 사냥하면 된다.
'게다가 같은 업적을 달성해도 지옥 난이도의 보너스로 포인트가 더 빠르게 차오르니까.'
12층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포인트는 1만 포인트.
전생에서 기사단으로 첫 1만 포인트를 모으기 위해 대략 세 달이 걸렸다.
그마저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빠른 속도였었다.
'하지만 방랑 무사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길어야 1주일이야.'
전생에서 방랑 무사를 택했던 녀석들이 12층에 오르는 데 평균 1주일이 걸렸다고 했었다.
그 말을 듣고 11층에서 낭비한 세 달이 그렇게 아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앞으로 20층까지 빠르게 돌파하기 위해 필요했던 스킬이 바로 오우거의 신체라는 스킬.
'그뿐만이 아니라 11층에서 20층 사이에 존재하는 히든피스를 얻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지. 이제는 반드시 내 손에 넣을 수 있어.'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지금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히든피스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선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다음 층으로 가기 위한 포인트를 쌓아야지.'
나는 바로 목적지를 정했다.
'산 밑에 있는 마을.'
내가 있는 산 바로 아래에 마침 마을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산중에 있는 산채도 하나 보인다.
'그림이 괜찮네.'
산 아래 마을과 산적들의 산채.
'여기에서 바로 포인트를 모을 수 있을 거다.'
목적지를 정한 뒤 나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
산채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지금 근처에서 몸을 숨긴 채 산채의 상황을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앞을 지키는 녀석은 둘.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고... 산채의 규모는 꽤 되는군.'
놈들이 화전민이 아니라 산적이라는 건 이미 확인했다.
여기에서 두 시간이 넘게 숨어 지켜본 결과 놈들이 산채를 드나들며 떠드는 소리를 몰래 훔쳐 들었다.
'근처의 마을 몇 군데에서 식량을 털어 왔다고 했지. 보호비도 함께.'
아무래도 근처에 마을이 더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그 마을을 정기적으로 수탈하고 보호비 명목으로 돈도 뜯어내고 있고 말이다.
'아주 몹쓸 놈들이야.'
게다가 마을이 여러 개가 있다는 건 내게도 좋은 소식이다.
명성을 더 빠르게 올리고 포인트를 쌓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들에게 일종의 퀘스트를 받아 수행하면 빠른 속도로 포인트를 쌓을 수 있다.
'가자.'
상황 판단을 끝마친 이상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다.
파삭
나는 수풀 속에서 최대한 몸을 낮춘 채로 문을 지키는 산적 쪽으로 다가갔다.
주변에 있는 돌 하나를 집어 들어 던졌다.
투욱!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 돌이 떨어지며 묵직한 소음을 만들었다.
그와 함께 문을 지키던 산적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들었어. 누구야!"
그들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바쁘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숨죽이고 있었다.
"어떤 새끼야? 무슨 대낮부터 장난질을 하고 있는 거야?"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 근처에 있는 유일한 산적 무리 모양이다.
아니면 가장 세력이 강하다거나.
딱히 적수가 없다는 뜻.
그러니 갑작스런 인기척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동료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카앙!
나는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고.
"어… 음?"
그 순간 두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너, 뭐, 뭐... 커헉!"
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검이 놈을 베어냈다.
놈의 몸이 고꾸라졌다.
"이, 이...!"
옆에 있던 녀석은 다급하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하나를 뽑아 들었다.
투박하기 그지없는 박도였다.
휘이익!
박도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앙!
나는 가볍게 놈의 공격을 받아냈다.
일말의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공격이다.
놈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고.
파득!
찰나의 순간 내 검이 놈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놈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숨을 거뒀다.
[힘 1을 포식했습니다.]
[포식 포인트 130p를 획득했습니다.
[체력 1.3을 포식했습니다.]
[포식 포인트 190p를 획득했습니다.]
그때였다.
"이 새끼 뭐야!"
"너 뭐 하는 새끼야! 어디 식구야? 이 개 같은 자식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런 외침이 들려왔다.
그때 마침 소란을 듣고 뛰쳐나온 녀석들이었다.
계획대로다.
조금씩 밖으로 산적들을 유인하며 쓰러트려야 한다.
'다짜고짜 저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건, 제 아무리 나라고 해도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내가 강한 건 맞지만, 나 역시 공격당하면 죽는다.
약해빠진 산적이라도 눈먼 검은 분명 위협적일 수밖에.
"죽여버려! 조져!"
"아니 죽이지는 말고! 어디에서 보낸 새낀지는 알아야 될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럼 다리 두 쪽만 자르자!"
'대략 스물.'
수는 많지만 그리 강해 보이는 녀석은 없다.
고작해야 오크와 비견 될 정도.
타다닥
검에서 전류가 터져 나왔다.
쐐애액!
내 몸이 쏜살과 같이 놈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허, 허억..!"
"크엇!"
놈들의 입에서 순식간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검이 허공을 가르며 전류를 흩뿌렸다.
놈들은 감히 나의 속도를 눈으로도 쫓지 못했고.
"크아아악!"
"커어억!"
"뭐, 뭐하는 새.. 커흑!"
순식간에 열에 가까운 산적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허.. 허억!"
"괴, 괴물이다!"
"도와줘! 으아아악!"
몇 녀석은 산채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고.
몇 녀석은 바닥에 자빠진 채로 탄식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 막 뇌전검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
우우웅!
검이 공명했다.
충격파를 사용한 것이다.
콰아아앙!
"크아아아악!"
"기사, 기사다! 기사가 나타났다아아아!"
한 녀석을 공격한 순간 주변에 있던 녀석들마저 몸을 비틀며 경련하기 시작했다.
산채를 향해 달아나는 녀석들의 뒤를 좇았고.
놈들마저 순식간에 처치했다.
덕분에 스탯도 넉넉하게 포식할 수 있었다.
'자, 나와라.'
나는 산채의 옆 부분에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분명 안에 있는 녀석들은 바깥의 소란을 감지하고 뛰쳐나오리라.
땡! 땡! 땡! 땡!
"뭐야! 뭔데! 습격이야?"
"설마 토벌대인가?"
"다들 뛰어 나와! 무기 들고! 빨리!"
예상대로 안에서는 벌써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요란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걸 눈치 못 채면 말도 안 되지.
"어디야! 어디! 어떤 개자식이냐!"
산적들이 소리치며 밖으로 뛰쳐나왔고,
그 순간 놈들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가장 앞에 서 있는 녀석들이 바쁘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음..?"
그의 입에서 의문이 가득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한 놈이라고?"
"하나야?"
"토벌대라며?"
"기사라고 하지 않았어?"
이런 소리들이 하나씩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나를 보며 묻는다.
"혼자야? 너 혼자 온 거야?"
조금 전의 소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만 미친 놈 보듯이 묘한 시선들이 내게로 향할 뿐이었다.
"허.. 참..."
"미친 새낀가?"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여기 혼자 와서 깽판을 쳐?"
순식간에 사방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