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설프게 쫓기는 척을 했다지만 말 그대로 '척'일 뿐이었다.
피골이 상접해 보이려고 얼굴에 흙과 피를 덕지덕지 발랐지만 은근히 올라있는 살.
거기에 낡아 보이기 위해 찢어 놨지만 자세히 보니 억지로 허름하게 만든 티가 나는 옷이었다.
'조금만 자세히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을.'
"어,, 어떡하죠? 싸워야 돼?"
"닥쳐. 제발 좀."
뒤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리더는 조금 화가 난 듯했다.
그렇게 말했음에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파티원들에 대한 분노겠지.
그나마 내가 저들을 버리지 않는 건 파티 리더 덕분이다.
저 녀석만 있다면 파티원들을 통제할 수 있다.
머저리들을 버리지 않는 이유의 반은 리더 한 명 때문이다.
나머지 반은 탑을 오르기 위한 조건 때문이고.
이런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흐흐. 너."
가장 앞에 있는 플레이어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실력 좀 괜찮아 보이는데 우리 밑으로 들어오지? 괜히 피 흘릴 필요 없잖아?"
나를 사냥꾼으로 영입하려는 속셈이다.
"괜찮은 제안일걸? 힘들게 괜히 탑 오를 필요 없잖아? 여기서도 나름 살 만하다고. 그리고 우리 뒤에는...아이고 입조심 해야지. 흐흐."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내게 제안을 보내온다.
나는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총 열 명.
놈들의 능력들이 떠오른다.
역시나 모두 쓸 데 없는 능력들.
일말의 가치도 없는 놈들이다.
"어때? 대답은? 혹시 쪽수 믿고 까불 생각은 하지 말고."
가장 앞에 있는 녀석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지랄."
내가 대답했다.
애초에 쪽수 같은 건 믿지도 않았다.
"뭐?"
"지랄하지 말라고."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 순간 놈들이 동시에 정색을 하고 나를 향해 자신들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너 우리 레벨이 몇인 줄 알..."
푸훅!
나는 가장 앞에 있는 놈의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놈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당연하겠지.
뇌전검을 사용한 나의 움직임은 60레벨의 플레이어 이상의 수준이다.
아마 내 움직임을 포착할 수도 없었을 거다.
"관심 없다. 레벨이 몇이건. 몇 마리가 모여 있건. 니들이 뭐 하는 새끼들이건 말이야."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놈의 몸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힘 2를 포식했습니다.]
떠오르는 스탯 포식 메시지와.
"미, 미친새 끼!"
"뭐 하는 새끼야! 우리가 누군 줄 알아?"
"너.. 너... 이러고도... 커헉!"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고.
한 녀석이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민첩성 2를 포식했습니다.]
듣기 싫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뭣도 없는 놈들이 항상 뱉어대는 말이다.
우리가 누군 지 알아, 혹은 이러고도 멀쩡할 줄 알아, 같은 말들이다.
다시 한 놈 더.
파각!
"커헉!"
한 놈이 더 고꾸라졌다.
남은 녀석들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러설 법도 한데, 아직도 숫자를 믿고 있는 지 나를 향해 열심히 달려들고 있다.
놈들의 레벨은 고작해야 30 언저리.
30언저리 놈들 열 명쯤이야.
기습만 아니라면 아무렇지도 않다.
파각!
"크어어어억!"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한 놈 씩 쓰러졌다.
놈들 역시 내게 반항을 했다만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잔뜩 겁에 질린 칼짓 따위야 오크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오크는 힘이라도 세다지만 놈들의 신체 능력은 오크보다 훨씬 약해 빠졌으니까.
다시 한 녀석의 허벅지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놈의 다리를 걷어찼고.
놈의 다리가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파직!
나는 놈의 가슴팍을 밟았고.
놈이 피를 토했다.
몇 번이나 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아직도 뇌전검의 효과는 사라지지 않았고.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 피가 튀어 올랐다.
그 후로도 몇 녀석을 더 베어 넘겼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나는 놈을 바라봤다.
놈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아, 안..."
검이 놈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커어...억..."
놈이 가늘게 몸을 떨더니 이내 숨을 거뒀다.
그제야 뇌전검의 효과가 사라졌다.
열 명을 처치하는 데 5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체력 4을 포식했습니다.]
[민첩성 3.3을 포식했습니다.]
[힘 5.2를 포식했습니다.]
[힘 4.5를 포식했습니다.]
.
.
끝없이 떠오르는 스탯 포식 메시지들.
스윽
검을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나는 몸을 돌려 파티원들을 바라봤다.
"말도 안 돼..."
파티원들은 고개를 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뒤얽힌 표정들이다.
나는 지금 결정했다.
멍하니 서 있는 머저리들에게 딱 알맞는 역할을 정해 줄 생각이다.
그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는 레이더다."
"...?"
"무, 무슨.."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설명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자, 기억해라. 너희는 앞으로 레이더야. 사냥꾼 탐지 레이더 말이다."
"자, 잠시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싫은가? 레이더가 싫으면 너희끼리 알아서 살아남아. 나는 갈 테니까."
"자, 잠깐만요!"
내가 몸을 돌리려는 시늉을 보이자 다급하게 나를 붙잡는다.
나는 다시 놈들을 바라봤다.
"분명히 기억해. 너희는 앞으로 레이더다. 그 이상의 역할은 기대하지 않아야겠어. 너희를 과대평가했던 나의 큰 실수다."
바쁘게 서로를 향해 눈을 굴리고 있는 파티원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사냥꾼들이 나를 공격하기 전에 놈들을 찾아내."
더 이상 머저리들에게 존대는 없다.
"이 정도는 잘 해낼 수 있겠지? 그것마저 못 한다면 더 이상 너희를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을 것 같거든."
혼자 떠나 버린다는 내 말에 파티원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몇몇은 벌써부터 주변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
"저, 저기! 저쪽에서 풀소리!"
파티원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플레이어 몇 명이 뛰쳐나왔다.
지금껏 몇 번이나 반복된 장면이다.
파티원들은 오크를 사냥하면서도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덕분에 강민이 먼저 플레이어들을 발견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강민이 거의 모든 오크를 도맡아 처치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크들은 쉴 새 없이 파티를 위협했다.
덕분에 그들이라고 해서 계속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죽겠네. 미치겠어, 정말.'
레이더 역할을 수행하는 것만도 벅찬데, 오크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으니 정말이지 죽을 노릇이다.
그러면서도 얼핏 보이는 강민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강민은 지금 혼자서 열 마리도 넘는 오크를 학살하고 있었다.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아.'
처음에는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강해졌는지, 너무도 궁금했었지만 그런 궁금증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생각을 하기에 강민은 격이 다른 존재였다.
자신보다 조금 우월하면 질투를 하기 마련이지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고 생각되면 질투 따위는 나지 않는 법이다.
'말 잘 들어야 돼.'
한 플레이어가 생각했다.
그는 강민이 '머저리 대장'으로 지목했던 플레이어다.
처음에 느꼈던 분노와 수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사실 리더인 주강현 때문에 억지로 강민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강민을 따르기 시작했다.
처음 플레이어 사냥꾼을 마주한 뒤부터였다.
'레이더. 까짓거. 레이더 하지 뭐.'
어떻게 보면 수치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분명 한 명의 플레이어였고, 또 인격체였는데 고작 레이더라니.
하지만 지금은 그따위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벌써 사냥꾼이라는 놈들한테 다 죽었을 거야.'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사냥꾼들에게 큰 부상을 입은 파티원들도 있었다.
그 이후로 혹시나 사냥꾼을 상대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이미 접어 둔 지 오래다.
강민이 너무 압도적일 뿐이지, 사냥꾼들은 강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사냥꾼들을, 강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베어 넘겼다.
강민이 자신들을 떠나갈 거라고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레이더다. 레이더. 그것도 성능이 아주 좋은 레이더야.'
그렇게 자신을 세뇌하며 주변을 살피고 또 살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쉴 새 없이 수풀 사이를 살펴댔다.
강민은 사냥꾼을 정말 박멸하기로 결심했는지 파티원들을 시켜 사냥꾼 몰이마저 시켜댔다.
셀 수도 없는 사냥꾼들이 죽어나갔다.
파티원들에게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강민이 시키니 따르는 수밖에.
'그게 내가 살 길이야.'
수치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생존이었다.
그리고 그때.
"헛."
그가 숨을 급히 들이켰다.
성능 좋은 레이더의 촉이 경종을 울렸고.
"가, 강민 님! 서쪽에서 인기척이요!"
저도 모르게 강민 님,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외쳤다.
그럼에도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고.
다른 파티원들 역시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잘 했군."
그리고 강민이 몸을 돌렸다.
거기에선 플레이어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풀 건너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도 모여 있네."
***
열?
열하나?
아니, 열둘.
수풀 속에서 플레이어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놈들의 눈에는 흉흉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너구나."
가장 앞에 서 있는 녀석이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껏 놈들의 부하들을 꽤 많이 처치했으니까.
보내도, 보내도 돌아오지 않으니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를 찾고 있었겠지.
나는 대답 대신 바쁘게 놈들의 능력을 살폈다.
뒤에 있는 녀석들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앞에 서 있는 네 명은 모두 쓰레기다.
"대답 안 해? 이 새끼야?"
"지랄 말고 빨리 끝내자."
"뭐? 이 미친 자식이!"
놈은 얼굴이 벌게져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각!
놈의 팔을 잘라냈다.
"어, 어...?"
놈이 떨어져 내린 팔을 보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잠시 후에야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놈이 잘린 팔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이, 이 미친..."
놈들은 당황했는지 주춤대고 서 있었다.
그때였다.
"나와 봐."
가장 뒤쪽에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있었고.
몸집 역시 거대했다.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보니 탑 밖에서도 힘깨나 썼을 것 같다.
하지만 겉모습에 겁먹을 이유는 없다.
탑에서 중요한 건 스탯이다.
그리고 확실한 건, 내가 스탯이 더 높다.
그건 확실하다.
설마 놈의 레벨이 50을 넘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내가 강하다.
그건 변하지 않는 진리다.
"예, 예!"
"비켜드려! 빨리!"
사냥꾼들이 잔뜩 겁먹은 채로 길을 비키기 시작했다.
"너 뭐야?"
놈이 내게 묻는다.
"한강민."
"미친 놈."
놈이 피식 웃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너는?"
나도 물어 줬다.
어차피 곧 이승에서 떠나갈 텐데 이름 정도는 들어 줘도 괜찮지 않겠나.
"네 주인이 될 몸."
그렇게 말하며 놈이 씨익 웃는다.
입꼬리가 쫘악 벌어지며 송곳니가 번뜩인다.
조금은 섬뜩해 보이기도 하는 미소다.
"사냥꾼으로 들어와라. 내가 너 키워 줄 테니까. 너 마음에 든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꼴이라니.
하지만 저 녀석은 좋은 녀석이다.
그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놈의 옆에 떠 있는 능력 때문이다.
1.충격파 (AA)
그걸 본 순간 내 입꼬리가 저절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쓸 만한 능력이 드디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시끄럽고. 잘 먹어주마."
내가 말했다.
그 순간.
"뭐라는 거야?"
놈의 안면 근육이 꿈틀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