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5층에 올라온 지 벌써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벌써 얼마나 많은 코볼트들을 처치했는지 세는 것을 포기한 건 오래다.
이제 코볼트를 사냥해도 스탯은 오르지 않았다.
포식 포인트도 마찬가지.
그래도 이미 모든 스탯이 40을 넘어섰다.
덕분에 아주 미약하게나마 내 머릿속의 그림대로 몸이 움직이고 있다.
역시나 한참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따라오기 시작했다는 게 고무적이다.
앞으로 스탯이 더 올라갈수록, 과거의 내 현란했던 움직임이 살아날 수 있으리라.
스탯이 오르지 않는데도, 아직 코볼트를 사냥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히든피스를 개방하기 위해서지.'
내가 기다리고 있는 히든피스인 뇌전 코볼트.
5층에서 코볼트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해야만 개방되는 히든피스였다.
설정상, 녀석은 코볼트들의 수호신이고.
코볼트의 염원과 원한과 분노가 가득 찼을 때, 그 모습을 드러내니까.
파각!
마침 다섯 마리가 넘는 코볼트를 처치한 참이었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되기는 했는데.'
쓰러져 있는 코볼트의 가죽을 벗겼다.
내 장비 아래로 놈들의 가죽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다시, 장비 위로 놈들의 가죽을 덮은 채 매듭지어 단단히 고정시켰다.
'냄새 한번 역하네.'
코볼트의 피와 내 피, 그리고 땀과 코볼트 특유의 역한 냄새가 뒤엉켜 코를 찔렀다.
내 모습 역시, 볼 수는 없지만 상당히 추한 몰골일 것이다.
'이 정도쯤이야 충분히 참을 수 있어.'
조금 추하고, 냄새가 역하다고 한들, 무슨 상관일까.
더 강해질 수만 있다면, 더 추한 꼴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이게 내가 살아 온 방식이니까.'
남들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이상,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혈계를 계승한 명가의 놈들이나, S급 능력을 가진 괴물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개중에는 몬스터 피가 몸에 튀는 것조차 혐오하는 녀석들도 많았지.'
특히나 명가 놈들은 더했다.
늘 고고하고 우아한 모습을 유지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품위'라고 떠들어 대던 놈들이다.
악착같이, 또 지독하게 탑을 오르는 나를 보며 경멸 담긴 시선을 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시선 따위는 무시한 채 꿋꿋이 살아남았고, 강해졌다.
그게 바로 나의 가장 큰 힘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지금의 상황은 전생과 크게 달라졌다.
S급 능력인 포식자가 생겨났고, 또 최상의 신체 조건을 가지게 됐지만.
명예나 품위 따위 생각할 이유는 없다.
'나에게 중요한 건, 강해지는 거야. 어떻게 해서든.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을 거다.'
당장의 목표는 마법 명가.
말했듯 놈들은 탑의 곳곳에 똥을 뿌려 놓았다.
'6층 정도에서 슬슬 놈들이 모습을 드러낼 거다.'
마법 명가의 일원들은 아니지만 마법 명가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 아래에서 기생하는 쓰레기들.
'그 녀석들부터 짓밟는다.'
지금 마침 나는 온몸을 코볼트의 가죽으로 꽁꽁 싸매는 작업을 마쳤다.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코볼트의 가죽에 조금이나마 절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물론 뇌전이 열심히 떠들고 다니던 덕분에 알 수 있었던 정보다.
'고마운 놈.'
과거에는 꼴도 보기 싫었지만, 지금은 참 고마운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아공간에서 이클립스 한 뿌리를 꺼냈다.
오도독
1/3뿌리만 씹고 다시 아공간에 이클립스를 넣어 뒀다.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움직이자.'
한시라도 허투루 보낼 수는 없다.
나는 코볼트를 사냥하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겼고.
마침 저 앞에서 4마리 남짓한 코볼트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코볼트의 숫자와, 놈들이 나타나는 빈도가 줄었어. 이제 조만간이다. 확실해.'
그리고 그때.
번쩍!
저쪽에서 번개가 내리쳤고.
쿠르르릉!
잠시 후,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타났다. 뇌전 코볼트.'
드디어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
그 무렵 탑의 4층.
최민철과 파티원들은 막 전투를 끝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나 혼자서 5마리 정도의 코볼트는 충분히 사냥할 수 있다.'
최민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느새 그의 레벨은 18에 도달했다.
'힘은 벌써 27이고, 민첩성은 20, 체력은 25.'
상태창을 확인한 그는, 다시 한번 자아도취에 빠졌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파티원들을 착취한 결과였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이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업적, 너무 좋잖아.'
파티원을 착취하며 빠르게 코볼트를 사냥한 결과, 코볼트 학살자라는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 후로 파티원들을 고기 방패로 삼은 채, 더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었던 것.
물론 그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20레벨까지는 사실상 튜토리얼 구간이나 다름없다.
덕분에 레벨을 빨리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20레벨에 도달한 순간부터 요구 경험치는 증가하게 되고, 레벨업이 급격히 느려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것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이 상황에 만족하며 자신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흐뭇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였다.
"저... 저는 파티 나갈래요."
최현서였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최민철이 눈매를 좁혔다.
"뭐요?"
"생각해 보면, 저도 충분히 코볼트 사냥할 수 있어요. 그런데 굳이 이런 파티에서 최민철 씨한테 이용당하고 싶지는 않다구요."
참다못한 최현서가 결국 파티 탈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역시나, 곱게 보내 줄 최민철이 아니다.
"하, 참. 얻어먹을 거 다 얻어먹고 이제서 내 뒤통수를 치겠다?"
뻔뻔한 최민철의 말에 최현서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뭐요? 얻어먹을 걸 다 얻어먹어? 대체 당신이 우리한테 준 게 뭔데?"
결국 최현서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뭐? 미쳤어? 오냐 오냐 했더니, 뭐라도 된 줄 아나 본데!"
최민철의 고함에 최현서가 몸을 움츠렸다.
지금 그녀도 알고 있다.
자신은 결코 최민철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 그러면 말이지..."
최민철은 순간 표정을 풀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최현서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고.
'강민 씨.. 진짜 죽은 거예요? 살아 있으면 제발 나타나 줘요...'
강민은 몹몰이는 시켰을지언정, 적어도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줬다.
그에 비하면, 최민철은 그저 욕심 많은 돼지에 불과한 꼴이다.
최민철이 말을 이었다.
"한오명 씨?"
그가 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한오명.
그는 왜소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는데, 그의 레벨은 아직도 10에 이르지 못했다.
당연히 파티원 중 전투력도 가장 낮았으며, 파티 내부에서도 최하층 계급에 속해 있었다.
"예, 예..?"
한오명이 긴장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 최현서 씨. 그러면 한오명 씨도 데리고 같이 나가실 수 있습니까? 한오명 씨는, 제가 보내 준다면 함께 나갈 의향이 있고요?"
조금은 꺼림칙했지만, 최현서는 망설이지 않았다.
"당연하죠. 한오명 씨, 같이 가요. 최기훈 씨 그리고 이혁준 씨도. 같이 파티 나가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5층을 돌파 할 수 있을 거예요."
최현서의 말에 최기훈과 이혁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원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최민철은 다시 한오명을 바라봤다.
"한오명 씨. 대답해 봐요. 가고 싶어요? 그러면 내가 보내 줄게요. 사실 나도 이제 18레벨이 돼서, 굳이 이 파티는 필요 없거든."
18레벨이라는 말에 모두는 작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단연코 압도적인 성장 속도였으니까.
덕분에 한오명 역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무서웠으니까.
'당연히.. 나가고 싶지. 당장에라도 나가고 싶었다고.'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만큼 최민철이 두려웠다.
"말해 봐요. 나가고 싶다면 보내 줄 테니까요."
최민철이 재차 물었고.
그 순간.
"예, 가, 가고.. 싶..."
"아~ 가고 싶구나~"
최민철은 웃으면서 말했다.
푸훅!
"...?"
한오명은 날카롭고 차가운 물체가 자신의 배를 뚫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꺄, 꺄아아아아!"
"미, 민철 씨 이게 무슨..."
"미쳤어! 미쳤다고!"
한오명이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복부를 바라봤다.
최민철의 검이 그의 배를 관통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순간 끔찍한 고통이 몰아쳤다.
"으, 으아아아아아아!"
한오명이 비명을 내질렀다.
최민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검을 뽑았고.
한오명을 걷어찼다.
쿵!
한오명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자, 보내 드렸어요. 또 가고 싶은 분 있으신가요?"
웃으면서 말을 이은 최민철.
모두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감히 최민철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없으면, 4층 조금만 더 돌아볼까요? 제가 레벨 하나 정도는 더 올리고 싶거든요."
"…."
"…."
모두는 말없이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은 채 두려운 눈으로 최민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움직여?"
그 순간, 최민철의 싸늘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때렸다.
***
평범한 코볼트의 털은 푸른색이다.
하지만 녀석의 온몸은 흰 털로 뒤덮여 있었다.
오른손에는, 물음표 모양의 곡도가 들려 있었다.
곡도 위에는, 푸른 스파크가 쉴 새 없이 튀어 오르고 있다.
놈은 고고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나는 수풀 속에 숨어서 놈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야기로는 수없이 들어왔지만, 실제 보는 건 처음이다.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 몸을 뒤엎은 코볼트 가죽을 다시 점검했다.
헐렁한 부분을 다시 꽁꽁 싸맸다.
코볼트의 가죽은 물론 임시방편이다.
제아무리 절연 효과가 있다고 한들, 놈이 발산하는 전기를 완벽히 막아 낼 리는 만무.
'어디까지나 최악의 사태를 막아내는 정도야.'
멍청하게 코볼트의 가죽 하나 믿고 놈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나는.
채앵! 챙!
아공간 안에 담아 뒀던 코볼트들의 무기를 꺼냈고.
휘이이익!
던졌다.
내가 던진 단검 하나가 뇌전 코볼트를 향해 날아들었고.
파직!
놈의 허벅지에 박혔다.
이미 30레벨에 근접한 스탯.
그리고 코볼트 학살자라는 업적의 효과가 더해져서 가능한 일.
히든피스지만, 저 녀석은 어디까지나 코볼트니까.
놈이 포효하며 다리를 절뚝거렸다.
큰 데미지는 아니지만, 놈의 체력 게이지가 조금 줄어들었다.
애초에 큰 데미지를 노리지는 않았다.
'충분히 좋아.'
싸움이 시작도 되기 전에 기동력을 봉쇄했으니까.
나에게 있어선 큰 이득이다.
크르르릉!
놈이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살폈다.
나를 찾는 거겠지.
그렇게 내가 보고 싶으면, 보여 주마.
파사삭
내가 풀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싸울 시간이다.
크아아앙!
놈이 나를 바라보고 포효했다.
그리고 그때.
파짓! 파지직!
놈이 들고 있는 곡도에서 전류가 모여들었다.
공격을 준비하는 거다.
나는 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코볼트 가죽으로 두르고 있다고 해도 저 전류에 정통으로 공격당하면, 나 역시 장담할 수 없다.
오도독
나는 남은 반쪽의 이클립스를 씹었고.
왼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움켜쥐었다.
당연히 허벅지 한 번 맞췄다고, 곧바로 전면전에 돌입할 생각 따위는 없다.
나는 그렇게 무식한 사람은 아니다.
놈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휘이익!
놈은 여전히 전류를 모르고 있었다.
그 위로 내가 던진 단검이 날아들었고.
카아앙!
파찰음이 울려 퍼지며, 강하게 충돌했다.
불똥이 튀어 오른 것 같다.
멍청한 놈.
그렇게 안일하게 전류나 모으고 있으면, 내가 기다려 줄 줄 알았나.
파지지직!
놈은 크게 당황한 나머지 허공에 전류를 흩뿌렸다.
다시 한번 전생의 경험이 나를 도운 셈이다.
명가 놈들이 자신들의 무기 하나만을 고집할 때, 나는 내 손에 잡히는 모든 무기를 사용하고 단련해왔다.
지금의 단검 투척도 바로 그 결과물인 셈이다.
어쨌든.
나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직선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조금씩 놈을 향해 달렸고.
채앵!
다시 아공간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파지지직!
이번에는 전류를 모으지 않은 채 놈이 바로 전기를 뿜어댔다.
하지만 그리 위협적이진 않다.
조금 전의 충격으로, 놈의 손목이 고장 난 모양이다.
콰콰쾅!
애꿎은 땅만 두드린 전류.
휘이익!
파직!
내가 던진 단검이 놈의 발목을 관통했다.
놈의 한쪽 다리가 완전히 고장 났다.
이제 나는 놈과 꽤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다.
놈의 진짜 무기는 검술이 아니라 전류니까.
전면전을 해 줄 생각 따위는 아직도 없다.
채애앵!
나는 무기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단검이 아니다.
이번에는, 창이다.
다리가 아니라, 놈의 몸통을 노릴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놈의 체력을 갉아먹고.
완벽한 타이밍에 놈을 처치한다.
내 피해는 줄이고, 최대한 안전한 방식으로.
'창 맛 좀 한 번 봐라.'
내가 던진 창이 놈을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