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보통 탑 2층으로 올라갈 때 10레벨을 달성하고 올라갈 것을 권장한다.
이건 오랜 경험과 연구 끝에 내려진 결론이다.
물론 재능에 따라 1~2정도의 레벨은 차이 나지만, 최저 권장 레벨은 7.
평균 육체 스탯으로 따지자면 16~20 사이다.
그 정도가 되어야 2층에 등장하는 코볼트를 사냥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코볼트가 경험치를 많이 주는 것도 아니니까.'
결론적으로 고블린을 사냥하고 10레벨을 달성하는 게 효율이 좋다.
10레벨만 달성하면, 2층, 3층도 무난하게 클리어 할 수 있으니.
3층까지 오르며 최소 15레벨을 만드는 게 정석적인 루트였다.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족히 몇 주, 혹은 한 달도 걸릴 시간이다.
레벨을 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몬스터를 사냥해야 한다.
그렇다고 몬스터를 사냥하는 일이 쉬운 것도 아니니까.
타고난 재능이 없는 이상, 레벨 하나, 하나를 올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지.
나라면 그 시간을 극도로 단축할 수 있다.
포식자라는 사기적인 능력 덕분이다.
레벨에 관계없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이런 속도라면… 늦어도 5레벨이면 2층에 올라갈 수 있겠어.'
나는 다른 이들처럼 레벨을 올려 스탯 포인트를 쌓지 않아도 된다.
몬스터를 사냥할 때마다 스탯이 오른다는 게, 이토록 사기적인 능력이다.
게다가 사냥하면서 신체를 움직이다 보면, 높은 잠재력 덕분에 '훈련 스탯'도 꾸준히 올라갈 것이다.
남들보다 압도적인 속도로 탑을 돌파할 수 있다는 뜻.
'그리고 포식 포인트.'
포식 포인트의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우선 1층에서 모든 육체 스탯을 최소 20으로 만들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간다.'
내 예상대로라면 늦어도 5레벨 이전에 달성 가능하리라.
5레벨까지 얻을 수 있는 스탯 포인트는 12개.
지금 같은 속도로 포식하여 스탯이 오른다면.
5레벨에 평균 육체 스탯 20 달성하는 건 이미 확실시된 일이다.
남들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다.
과거에는 나 역시 권장 사항에 맞춰서 탑을 올랐지만.
지금은 굳이 레벨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스탯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레벨과 관계없이 스탯을 쌓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내가 필요한 만큼 고블린의 스탯을 '포식'하면 될 뿐이다.
나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
네 명의 사람 중 최현서가 구석에 박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둘러싼 채 달래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너무 자책하지 마.”
“그래도 나는 남겠다고 했잖아!”
여자가 소리쳤다.
“그렇다고 같이 뒤지자고? 그거야말로 미친 짓인 거 알잖아.”
“흐흐흑!”
남녀 네 명이 던전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들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고, 얼굴에는 절망감으로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생각해 봐. 한강민 그 자식이 나대다 죽은 거야. 그렇잖아?”
"그래! 그게 맞아. 그 녀석 자기 피지컬 믿고 까불다가 그렇게 된 거야!"
"하지만.. 한강민 씨는 잠시 시선을 교란시킨다고만 했지.. 우리 보고 도망가라고 한 적은 없..."
"닥쳐! 제발 닥치라고."
여자의 말에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여자는 눈을 부릅뜬 채 남자를 노려봤다.
"미..미안하다.. 내가 흥분을 했어."
남자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아.. 하... 됐어. 한강민 그딴 녀석 없어도 2층에 올라갈 수 있어. 조금만 더 가면 다른 시작점에서 시작한 이들과 만날 수 있을 거다."
다른 남자가 가쁘게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함께 탑에 오른 플레이어들이다.
이번 탑의 게이트가 열리고 함께 입장한 백 명 중 이들 넷, 아니 원래는 총 다섯 명이 같은 시작 포인트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탑은 그들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다.
시작부터 고블린들의 습격을 받았고.
전투 경험이 전무한 그들은 가장 뛰어난 피지컬을 보유한 한강민을 놔두고 도망친 것.
하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그나마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한강민이 없어지고, 그들의 싸움은 더더욱 힘들어졌다.
“플레이어가 탑에서 죽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래. 알잖아, 너희도?”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떨려왔다.
박현덕.
이 무리에서 유일하게 5레벨에 근접한 플레이어였다.
한강민 다음으로 뛰어난 잠재 스탯을 보유한 플레이어.
한강민이 죽은 후 자연스레 이 파티의 리더가 되었다.
한강민을 버리기로 한 것도 이 남자의 결정이었다.
키르르륵
키륵!
“?!”
그때 다시 한번 고블린 무리가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X발, 튀어!”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있어요!”
“미치겠네, 진짜.”
박현덕이 어쩔 수 없이 가장 앞에 서서 고블린과 대치했다.
“한쪽으로 뚫고 가자. 분산되면 안 돼!”
“내, 내가 뒤에서 지원할게! 최기훈 씨도 같이요.”
최현서가 외쳤다.
그녀는 힐러 계열의 플레이어였다.
최기훈 역시 마법계열의 헌터였으니 뒤에서 지원 사격을 맡기로 했다.
“젠장...”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전투 상황에 돌입하자 그들은 오히려 냉정해졌다.
최현서의 마법 공격을 시작으로 나머지 둘이 고블린들에게 달려들었다.
파각!
끼에에엑!
그때 뒤쪽에서 고블린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다른 스타팅 포인트의 플레이어들인가?"
"다행이다! 여기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곤란에 처했던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살아나갈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 헤치고 온 플레이어들과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2층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라.
‘살아갈 수 있어.’
조금씩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뒤쪽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넷이서 합공해 처리하는 속도보다 뒤에서 들리는 고블린의 비명소리가 훨씬 많았다.
그에 힘입어 그들도 빠르게 고블린을 처리해 나갔다.
“조금만 더! 생각보다 고블린의 수가 많지 않았나 봐. 다행이야!”
고블린을 베어 넘기며 박현덕이 말했다.
박현덕은 계속해서 고블린을 베어 넘겼고.
어느새 마지막 한 마리까지 처치할 수 있었다.
'다행이야. 저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다.'
박현덕이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뒤로 시선을 옮겼다.
“뭐 해?”
최기훈과 최현서의 몸이 굳어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찍이 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둘 때문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박현덕이 그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고맙습...”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박현덕과 최현서 역시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건.
“하.. 한강민...”
그들이 조금 전 버리고 왔던 한강민이었다.
***
저 남자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
설마하니.
내가 들어와 있는 몸의 주인 이름도 한강민이었던 모양이다.
우연?
아니면 누군가의 계획?
그건 내가 알 수 없다.
나는 처음 보는 이들이었지만 저들은 나를 알고 있다.
저들은 아마 몸의 주인을 버리고 간 이들이라는 말일 텐데.
저들을 보니 확실해졌다.
지금은, 탑의 등반이 시작된 초창기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초창기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저들의 장비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정도 탑의 체계가 잡힌 뒤에는, 아카데미에서 기본 장비는 보급해 주었지만.
이들에게 방어구는 없고, 탑이 처음 제공하는 기본 무기가 전부다.
탑의 초창기.
내가 알기로 이때는 정말 혼돈과 무법의 천지였다.
일말의 케어나 정보에 대한 공유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
하지만 정확히 어떤 시점인지는 알 수 없다.
혼란스러웠던 초창기의 기간은 길었으니까.
어쨌든.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맞구나, 한강민.”
"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서 뭐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저들이 나를 안다고 해도, 그건 지금의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저들은 초면이다.
게다가 지금 저 사람들 꼴을 보아하니 굳이 함께 움직여야 할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강민아, 너도 이해하..."
대충 보니 알겠다.
저 사람들이 이 몸의 주인을 버리고 갔고.
그래서 한강민이라는 남자가 죽어가고 있었고.
내가 그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
이것도 내 추측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엿같군.'
이 몸의 주인 역시 나와 같은 이유로 죽어가고 있었다는 게.
그리고 내가 그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역시 필연인가.'
탑의 장난이라거나.
혹은 누군가의 계획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고 내가 저들에게 악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다.
지금은 탑의 초창기이고.
놈들은 고블린 사냥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급박한 상황에 놓인 채, 원래의 한강민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리라.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다.
잠시 감정 이입을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몸의 원래 주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일 정도는 탑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약한 놈은, 죽는다.
나도 그랬다.
약했으니 이용당했고, 결국 죽었다.
몸의 원래 주인도 그랬을 테고.
억울하면 강해져야 한다.
"됐다."
남자의 말을 끊고 나는 그들을 지나쳤다.
묘한 시선들이 나를 지나간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스탯을 성장시키고 2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강해져야 하니까.
그 녀석들보다 강해져서 그들을 잘근잘근 씹어먹기 위해서.
“잠깐! 강민아!”
남자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이야기 좀 하자, 강민아!”
남자는 끈덕지게 나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귀찮을 뿐이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 분명 우리가 미안한 건 맞는데, 너 원래 이런 성격이었냐.”
"…."
'미친놈인가.'
정말 제 놈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저런 태도는 보일 수 없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이러는 게 대체 어느 나라 예법인지.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성가시게 굴지 말지.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하니까. 서로 갈 길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남자를 흘끗 바라보고 곧바로 걸음을 뗐다.
그때.
"건방진 새끼. 그러니까 네가 뒤질 뻔한 거야. 가라, 가. 혼자서 뭘 하겠다고? 그래. 또 가서 이번엔 진짜 뒈져보든지."
다짜고짜 언성을 높인다.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아니지.
사실 드문 일은 아니다.
탑에 들어와 마주한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무슨 말을 내뱉는지조차 혼란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안 될 새끼다.
조금 전만 해도 악감정은 없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어떻게 본다면, 내게 이 뛰어난 몸을 제공해 준 원래 주인에게 은혜도 갚을 겸.
홱.
나는 몸을 돌렸다.
퍼억!
남자의 몸뚱이를 걷어찼다.
“컥!”
쿵!
한 번에 놈이 바닥에 자빠졌다.
놈이 자빠진 채로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봤다.
아플 거다.
벌써 내 레벨은 2였고.
스탯은 이미 동 레벨의 스탯을 훌쩍 뛰어넘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6레벨 이상이다.
“꺄악!”
“한강민 씨!”
그 상황을 지켜보던 셋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 내 상황에 나 역시 혼란스럽고, 머리가 복잡한 지경인데.
이딴 놈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이, 이… 개자식…!"
남자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맷집은 조금 있는 놈인가 보다.
뒤쪽을 흘끔흘끔 바라본다.
여자 쪽이다.
여자 앞에서 얻어맞은 게 쪽팔리나 본데.
멍청한 새끼.
탑에서 연애라도 해 볼 생각이었나.
저딴 마인드로는, 2층, 아니 여기 1층에서 객사다.
그때였다.
"으아아아아!"
고함과 함께 내게 달려들었다.
우습지도 않은 움직임이다.
나는 발을 가볍게 움직여서 놈의 공격을 피했다.
빠각!
발을 올려 놈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크아아아!"
놈은 턱을 부여잡고 괴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아직도 쓰러지지는 않는다.
맷집이 뛰어나다.
괜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놈은 나를 향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이런 개새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네가? 나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
"그 조금 잘난 몸뚱이 믿고 까불지 마! 으아아아!"
놈이 달려들었다.
놈이 무기를 꺼내든 이상 나도 어쩔 수 없다.
채앵!
검을 뽑았다.
탑은 냉혹하다.
그 안의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다.
후환을 남겨 둔다면, 언제 뒤통수를 공격당할지 모를 일이다.
일말의 자비를 베풀어 용서했지만.
그 결과 뒤통수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일들 말이다.
물론 지금도 사람을 죽이는 건 불쾌하다.
하지만 분명히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그렇게 얻어낸 중요한 교훈 하나가 이거다.
나에게 먼저 무기를 뽑아 든 사람은, 절대 살려둬서는 안 된다.
한 번 나를 향한 칼끝은 언제라도 다시 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파앗!
나는 발을 디뎠다.
그리 복잡한 움직임은 아니다.
내가 아는 기술 중에서도 아주 기초적이고 또 간단한 움직임.
그 순간 놈의 검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역시, 제대로 훈련도 되지 않은 허접한 몸짓이다.
카아앙!
나는 검을 쳐냈다.
"허억!"
그 순간 놈의 몸이 휘청이며 균형을 잃었고.
놈의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앞발로 놈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쾅!
놈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놈은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바라봤다.
무언가 말을 뱉어내려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지만.
들어 줄 생각은 없다.
다시 앞으로 빠르게 발을 내디뎠다.
자빠진 놈의 가슴팍을 짓밟았다.
빠드득! 콰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놈의 눈가에 핏대가 돋아났고.
쿨럭!
놈이 피를 토했다.
"커으..사..사여... 사려...조...."
살려 달라니.
먼저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게 누구인데.
놈의 공격에 내가 당했으면, 놈은 결코 나를 살려주지 않았을 거다.
나 역시 살려 줄 생각은 없다.
가슴팍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푸훅!
"커허윽...."
그 순간, 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싸움은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