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혼자 올 마스터-134화 (135/178)

나 혼자 올 마스터#134

“그런데 칠선이나 칠죄가 다른 이의 몸에 있을 경우 죽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대답을 하고 새로운 칠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던 강혁은 불현 듯 든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혼잣말이었지만 페르세포네는 흔쾌히 그에 답해주었다.

“그건 평범한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죠. 무엇보다 강제로 뜯어내는 게 아니라면 딱히 그럴 일도 없습니다.”

조곤조곤한 어투로 답을 해오는 페르세포네의 모습에 무안해진 강혁이 머리를 긁적일 때.

강혁의 몸이 거세게 흔들리며 붉은 기운 빠져나왔다.

-오랜만이군, 납치 당한 신의 아이여.

“....사람 짜증나게 하는 재주는 본체랑 다를 바가 없네요, 분노.”

-....너도 마찬가지다. 왜 네게 그런 칠죄가 붙어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야.

당연한 말이지만 붉은 기운의 정체는 분노였다.

그는 나오자마자 페르세포네와 투닥거리며 말싸움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강혁은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찍어눌렀다.

“적당히 해. 이젠 한 배를 탈 사인데 뭘. 그런데 납치 당한 신의 아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분노의 말에서 의문을 찾은 강혁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 대해서 물었다.

강혁의 질문에 페르세포네는 안색을 살짝 굳히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내가 내 몸에 깃든 칠선 중 하나인 친절을 건 이유가 뭐였지?”

“이곳에서 너를 빼내는....아, 설마?”

하데스의 성에서 빼달라는 요구와 납치된 신의 아이라는 이름까지.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이미 강혁의 머릿속에는 모든 답이 적혀져 있었다.

“납치 당한 거구나. 하데스에게. 그리고 나갈 방법 없는 호화로운 성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거고.”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정정해줬으면 좋겠는데.”

호화로운 성이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페르세포네의 대답에 강혁은 뭐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곧 나가게 될 곳인데 성이든 감옥이든 상관없지.”

“....정말 날 이곳에서 내보내 줄 수 있는 건가? 오래 걸릴 거라는 각오도 하고 있어. 네가 실패할 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지. 근데 넌 꽤 확신에 차 있군. 진심인 건가?”

무조건 페르세포네를 빼내겠다는 생각인 듯한 모습의 강혁을 바라보며 페르세포네는 혀를 찼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강혁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저 판돈을 올리고 그것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녀에게 손해란 없었으니 막 질렀을 뿐.

‘친절은 저 자가 죽으면 어차피 내게 다시금 돌아올 뿐이다. 그런 칠선을 대가로 혹시 모를 탈출의 기회를 잡는다면 내게 남는 건 이득 뿐이지. 그런데 대체 왜 저자는 기세가 등등한 거지?’

하등 손해볼 것 없는 거래임에도 궁금증은 숨길 수 없었다.

신과 악마 전체를 적으로 돌린 남자.

전대 올 마스터의 뒤를 이어 칠죄와 칠선을 모으는 남자.

하지만 그의 힘은 그들 전체를 이기기엔 부족하다는 걸 페르세포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강혁은 페르세포네를 데리고 나가는 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뻔하지.”

“뭐가 말이지?”

“난 언젠가 놈들을 전부 발아래에 꿇릴 생각이니까.”

“....하, 어이가 없네.”

신과 악마 전체를 발아래에 꿇린다.

분명 말은 쉽다.

그저 그들을 짓밟고 힘으로 굴종시킬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니까.

다만 그 힘을 쌓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그 과정 속에서 펼쳐져 오는 신과 악마들의 방해는 어찌할 것인가?

‘말도 안 되지. 그들만큼 제 안위를 생각하는 이들도 없는데 말이야.’

그들의 방해는 필연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근데 왜 저 녀석의 자신감을 보고 있으면 왜 저 녀석이 성공할 것만 같은지 이해할 수가 없군.’

강혁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그녀에게 왠지 모를 기대를 품게 만들었고, 그 사실이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현재 그녀가 매달릴 구석이 그 밖에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바로 넘어가지.”

“바로 주는 건가?”

“어차피 나한테 있어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어. 그저 보관함에 불과하니까. 불쾌하기도 하고. 악마 놈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 내 몸 안에 있는 게 얼마나 소름끼치는 지 알기나 해?”

“....뭐, 나야 별 상관이 없는데.”

신과 악마와 척을 져놓고도 그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인 칠죄와 칠선을 몇 개나 품었지만 강혁은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얻지 못해서 안달이 날 정도이니 말 다하지 않았나.

“그럼 바로 시작하지. 네 이름이 뭐지?”

“이강혁.”

“그래, 이강혁. 너는 칠선 ‘친절’을 받는 대가로 나, 페르세포네의 탈출은 언젠가 시켜줄 거라고 맹세하겠는가?”

“맹세한다.”

엄숙함이나 그런 것은 일체 존재하지 않는, 그저 하나의 계약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을 진행하며 두 사람은 서로 두 눈을 맞부딪쳤다.

이윽고 페르세포네에게서 빠져나온 하얀 빛무리가 강혁에게 흡수되는 순간.

강혁은 개운함이 가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군.”

친절이라는 새로운 칠선 중 하나를 얻게 되면서 현재 강혁이 보유한 칠선과 칠죄의 개수는 총 9개.

‘이제 얼마 안 남았군. 5개만 더 모으면 된다니 말이야.’

앞으로 단 5개 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에 강혁이 전율할 때였다.

“슬슬 나갈 준비를 해라. 그의 눈을 속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그? 누구를 말하는 거지?”

나갈 채비를 하라며 강혁을 재촉하는 페르세포네의 모습은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시종일관 태평하던 그녀의 다급함에 강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대답에 강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하데스. 이 성의 주인이자 온 명계가 떠받드는 명계의 왕. 그가 너의 존재를 곧 알아차릴 거다.”

하데스.

명계의 주인이 강혁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이었다.

*타다다닥-

화려함이 가득한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운다.

그 소리의 주인은 어둠으로 가득한 인영들.

“여왕님께서 계신 방에 침입자가 있는 걸로 확인되었다.”

“상대는 신과 악마 모두에게 도전장을 내민 존재. 방심하지 마라.”

“예!”

대장으로 보이는 이의 명령 하달에 부하로 보이는 이들은 강하게 대답하며 긴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하나둘셋을 셈과 동시에 페르세포네의 방안으로 짓쳐들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재빠르고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처저적-

순식간에 방안을 점령한 그들은 방안에 페르세포네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곤 이를 갈았다.

“....여왕 폐하. 혹시 침입자를 본 적이 없으십니까?”

분명 페르세포네가 무언가 했음을 알지만 그들은 그녀를 몰아세울 수 없었다.

납치되어 결혼하게 된 비운의 존재라고 불리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상관과 다를 바 없는 이.

당연하게도 그들의 주인인 하데스가 그녀를 막대하는 모습을 보지 못할 터.

‘....빌어먹을, 그저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명계의 사도인 우리가 저런 여자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니.’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그였으나 결정적으로 그녀를 타박할 수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녀는 그들의 주인인 하데스의 아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가 탑안에 침입한 침입자를 숨겨줬든 풀어줬든 그들이 그녀를 처벌할 권리가 주어지진 않았다.

‘부디 왕께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려주시길 바래야겠지만....무리겠지.’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푹 빠져 있다.

오죽하면 주신이라는 권위조차 내팽개친 채로 여신의 딸을 납치해서 아내로 삼았겠는가.

그렇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던 그는 페르세포네가 나른한 얼굴로 입을 여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침입자라....누굴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부군께 도전장을 던진 필멸자를 말하는 겁니다. 정말 모르십니까?”

부군.

남편을 뜻하는 그 말을 입에 담는 검은 인영의 모습에 페르세포네의 나른한 얼굴이 짜게 식는다.

“부군이라....내겐 부군 따윈 없다.”

“....하데스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그는 내 부군이 아니라 그저 한낱 납치범에 불과하다. 다시는 내 앞에서 그를 부군이니 남편이니 칭하지 말도록.”

오뉴월 내리는 서리와 같은 찬바람에 그는 살갗이 어는 듯한 착각을 받았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신은 신인가.’

신의 딸은 신.

그리고 페르세포네의 대지의 여신의 딸로 봄의 여신이라고 불리우는 이.

당연히 일개 사도에 불과한 검은 인영 따위가 막대할 수 있는 이는 아니었다.

물론 무력으로만 치자면 그가 윗선이겠지만 신을 건드린 사도라는 오명을 벗기는 어려우리라.

그 사실을 잘 아는 그이기에 페르세포네의 차가운 말과 자신의 주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말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미 익숙해진 그녀의 반응은 그에게 어떠한 감정도 이끌어내지 못했으니까.

“이강혁, 올 마스터. 정말 모르십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물고 늘어졌다.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였고, 그녀를 조금이라도 귀찮게하기 위해서였다.

침입자가 영혼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찾아온 거라는 사실을 그는 모르지 않음에도 느긋한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이 주변은 다른 이들이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을 터. 분명 누군가가 나타나면 반응이 온다.’

이미 하데스의 탑 주변은 그와 같은 검은 인영들이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다.

그저 쥐새끼가 도망치지 않고 탑 안에 숨어있을 상황을 생각하여 직접 순찰을 나왔을 뿐 직접 쥐새끼를 잡을 거라곤 그도 상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일들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듯이 지금 상황 또한 그러했다.

“....대장님. 지금 경계에서 문제가.”

“....갑자기 거기서 문제가 왜 생겨?”

경계.

검은 인영이 쳐둔 경계망.

그것은 명게에 파고든 필멸자, 이강혁을 잡기 위해서 펴둔 그물과도 같았다.

그런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함은 도망친 쥐새끼를 완전히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뜻.

그렇기에 대장이라 불린 이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고.

“왜요? 무슨 일이 생기셨나봐요?”

씨익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페르세포네를 볼 수 있었다.

“....설마 봄의 여왕께서 이 일을 주도하신 겁니까?”

경계는 오롯이 검은 인영들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페르세포네의 뜻에 따르는 이들이 검은 인영 중에서 꽤 있다는 것 또한 그는 알고 있다.

그런데 설마 하데스가 내린 명령에서조차 불복하고 그녀의 명령을 따를 줄은 몰랐던 모양.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페르세포네를 추궁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경계에서 빠져나간 이가 없는지 살피러 간다.”

“예!”

좀 전과는 달리 그에게는 더 이상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던 페르세포네는 조용해진 주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출발해.”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뵙도록 하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펼친 봄의 장막 안에 숨어 있던 강혁이 쏜살처럼 방의 창문을 뚫고 바깥으로 도망쳤다.

등잔 밑이 어둡다 작전.

그것이 보기 좋게 성공한 순간이었다.

제129장 세상에 이름을 알리다

황연수는 아무런 수확도 없이 자료실을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당연한 결과였다. 달나라 언어를 몰라 자료실의 영상을 재생시키지 못했을 테니.

계속해서 다른 방들도 샅샅이 뒤져봤지만,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어떤 방에는 간단한 가구들뿐이고, 어떤 방에는 복잡한 기기들도 있었지만, 너무 고차원적이라 용도나 조작법을 당최 알 수 없었다.

지구상 과학자들이 전력을 다해 연구하고는 있지만, 당분간은 쓸만한 결론을 얻지 못할 게 뻔했다.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황연수는 혹시라도 잘못 건드려 자기들에게 위협적인 프로그램이라도 작동시킬까 봐 감히 함부로 만지지 못했다.

조심조심 들어갔다가 조심조심 나오는데 임산호로부터 아래로 내려가 나서준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서준은 별장에서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커다란 책꽂이를 발견했다. 책장은 종이가 아닌 고분자 재료였다. 보드랍고 매끈한 책장에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달의 도시를 탐색하는 동안 동국 과학자들은 도대체 뭘 가져와서 연구해야 할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우주선의 공간과 연료가 한정적이다 보니 안전하게 돌아오기 위해서는 무게부터 개수까지 엄격하게 제한해야 했다.

그러니 아쉽지만 나머지는 기회가 되면 다시 연구하더라도 지금은 이 방대한 도시에서 극히 일부만 골라서 가져가야 한다.

과학자들은 처음에는 암석과 흙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파란색 결정체 조각을 가져오라고 했다.

말이 자꾸 중구난방으로 바뀌어서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캡슐 관에 봉인된 시체를 가져오라는 사람도 있고 달나라의 각종 정밀한 기계들을 가져오라는 사람도 있었다. 서로 자기가 요구한 물건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박한지 피력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매일같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책상을 쾅쾅 두드리며 피 튀기는 언쟁을 이어갔다. 그러는 과정에 깨먹은 컵이 몇 개인지. 몇몇은 흥분한 나머지 멱살 잡고 싸우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이상하리만치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른 건 됐으니까 가능한 많은 책을 가져오라고.

어쩌면 그들의 역사와 문화, 과학 지식과 연구 자료가 기록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연애 소설일지라도 달나라 문자를 해독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연구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 그러면 더는 지금처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추측과 상상에만 의지해 그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지 않아도 됐다.

* * *

“용명아! 용명아! 얼른 나와봐!”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부름에 허용명은 허둥지둥 휴대폰을 숙제 노트 밑에 숨겼다. 그러다가 야단법석을 떨던 어머니가 기습적으로 들어와 확인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아, 왜요! 숙제하고 있으니까 방해하지 마세요!”

“거 참, 얼른 나오래도! 나와서 TV 좀 봐!”

허용명 어머니가 끈질기게 불러댔다.

“웬일로 TV를 다 보여줘요? 엄마가 언제부터 그렇게 깨어 있는 엄마였다고?”

조금 뜬금없긴 하지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하는 것도 아니고 TV 앞에 잠깐 앉아 있으라는 것쯤이야 기꺼이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허용명은 못 이기는 척 어기적대며 서재에서 나와 사과 하나를 집어 들고 와그작 물어뜯으며 물었다.

“뭔데 그래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잘 봐!”

허용명 어머니는 성가시다는 듯, 한 마디를 툭 내뱉고는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프닝 화면이 끝나고 미모의 여자 아나운서가 활짝 웃으며 시작을 알렸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XX토크쇼를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자영입니다. 대학 입시가 끝난 지금 시청자 여러분들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래도 대학 입시 성적과 최고 득점자일 텐데요, 오늘은 동국 역사상 최초로 대학 입시 만점을 받은 태안시 제1고등학교 서원영 학생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다 함께 태안시로, 대학 입시 만점자의 일상으로 가보시죠!”

화면이 바뀌고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왔다. 허용명은 입을 삐죽삐죽하며 제 어머니를 흘겨봤다. 그럼 그렇지, 맨날 쫓아다니면서 공부하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잔소리를 퍼붓는 어머니가 TV를 보여줄 리가 없지.

프로그램이 시작한 지 채 몇 분도 안 되어 허용명 어머니는 눈물을 훔쳤다.

“엉엉…… 아이고 착해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 저 친구는 저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런데 너는 어떤지 한 번 봐!”

TV 속에서는 왕호준이 한창 감격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잘 눈에 띄지 않았지만,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일부 프로그램에처럼 조작된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더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덩달아 감동에 젖어 있던 허용명은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비교하는 말에 바로 눈을 흘기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 * *

진옥현은 소파에 옹크리고 앉아 매니큐어를 칠하며 TV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대학 입시 수험생에 관한 토크쇼였다. 일을 시작한 지금 고등학생을 보니 ‘나 때는 말이야’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뭔지 모를 우월감이 느껴졌다.

진옥현은 곁눈질로 TV를 힐끗 보고는 다시 손톱을 칠하는 데에 열중했다. 입술을 오므리고 호호 부는 모습이 마치 여름잠을 자는 고양이처럼 나른해 보였다.

허름한 문이 천천히 열리고, 느린 화면을 일부러 더 느리게 한 것처럼 문 뒤 사람이 차차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진옥현은 숨이 탁 멎어버렸다. 매니큐어 병이 데굴데굴 구르며 떨어져 찐득찐득한 보라색 액체를 소파 패드에 잔뜩 묻히고 땡그랑 땡그랑 나무 바닥으로 굴러갔다.

“아, 여보, 여보, 뭐해! 얼른 닦지 않고!”

옆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던 남자가 그 소리에 놀라 돌아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진옥현은 꿈쩍도 하지 않고 TV를 빤히 보더니 뜬금없이 말했다.

“여보,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으응?”

남자는 무슨 개소리냐는 듯 진옥현을 응시했다.

* * *

드디어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되었다. 하준영은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피둥피둥 살찐 모종 잡식성 포유동물의 정의를 몸소 실천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 입시 성적이 하도 엉망진창이어서 아버지가 불량 친구들과 휩쓸려 다니지 못하게 외출 금지에 휴대폰이며 컴퓨터를 몰수하고 신용카드마저 뺏어가는 바람에 지갑에 배춧잎 한 장 남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가 어찌어찌해서 겨우 유명 대학에 욱여넣어 줬다. 하준영은 이제 아버지의 속박에서 벗어나 괘씸한 그 이름을 더는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살 것 같아서 자면서도 실실 쪼갰다. 그러니 당분간의 온갖 시련은 이를 악물고 버티기로 했다.

그런데 이날, 한창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아버지 하진철이 갑자기 침실에 쳐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이불을 확 들치고 벌거벗은 아들놈의 엉덩짝을 철썩철썩 마구 때리는 게 아닌가.

갑작스러운 봉변에 하준영은 화들짝 놀라 ‘나 죽네’를 외치며 여기저기 도망 다녔다. 그리고 잠시 후, 하준영은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에게 질질 끌려 나와 TV 앞에 앉았다.

하준영은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한껏 불쌍한 척하며 어머니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늘 금이야 옥이야 하던 어머니는 편들어주기는커녕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심한 눈으로 노려봤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똑똑히 봐!”

한바탕 가정 폭력을 행사한 하진철은 씩씩거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준영은 더럭 겁을 먹고 재빨리 두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초등학생처럼 허리를 꼿꼿이 펴고 똑바로 앉았다. 고개를 들자마자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낯짝이 눈에 들어왔다.

하도 이를 부득부득 갈아서 이뿌리가 다 아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를 못이기던 하진철은 TV를 보자마자 손주를 보는 것처럼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팔꿈치를 무릎에 괸 채 목을 쑥 내밀고 TV에 몰두하더니 시야를 가득 채운 무궁무진한 책들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다 빽빽하게 메모 된 책장이 나오니 탄식할 기운도 없는지 멍하니 넋을 놓고 봤다.

그러고는 아들을 돌아보며 얼굴을 확 굳혔다. 맹세코 개똥에 가까운 모자란 놈을 보는 눈빛이었다.

다시 TV에 시선을 돌렸을 때는 순식간에 얼굴을 갈아 끼우고 아쉬움과 부러움으로 얼룩진 눈빛으로 한탄했다.

“서원영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하준영 어머니는 절로 남편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하준영은 서러워서 소리를 꽥 질렀다.

여자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표정을 싹 바꾸더니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돈 좀 들이더라도 저 책들을 사 오면 안 돼요?”

하준영은 죽어라 머리를 가로저었다.

사서 뭐하게? 당연히 나 주려고 사는 거지! 이제 겨우 같은 학교에 다니는 신세를 면했는데, 결국 저 자식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하진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판다고 할걸?”

하준영 어머니가 반박했다.

“그럴 리가요.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좋다고 팔지 않겠어요? 어차피 다 읽은 건데 남겨둬서 뭐해요.”

“듣고 보니 그러네.”

어머니의 말에 홀랑 넘어간 아버지를 보며 하준영은 절망했다. 그런데 아버지란 사람이 한술 더 뜰 줄이야!

“내가 보기에 우리 준영이는 복에 겨웠어. 그래서 저 모양인 거야! 왜 압력이 없으면 동력도 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러고는 음흉하고 악랄한 눈빛으로 아들을 노려봤다!

그리고 이어지는 청천벽력 같은 한 마디.

“오늘부터 준영이 용돈 일주일에 2만 원으로 줄여! 100원이라도 더 줬다간 각오해! 대학에 가도 마찬가지야! 어디 두고 보자고! 내 돈 없이도 저렇게 빈둥거리는지!”

하준영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2만 원이라니! 커피값도 안 되는데! 일주일을 쓰라고?

* * *

김주영은 제법 높은 점수로 국방대학교에 합격했다. 원영이 출연하는 토크쇼가 오늘 밤 방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주영은 일찌감치 TV를 독차지하고 앉아 기다렸다. 할아버지도 부들부채를 살살 흔들며 옆에서 같이 봤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얼굴을 TV에서 보게 되니 저도 모르게 아련해졌다. 실험실 전경과 민이 나오자 김주영은 표정이 점점 더 멍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니?”

할아버지가 물었다.

김주영은 할아버지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 저 예전에는 원영보다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성적은 못 미치지만, 종합 소질이 더 뛰어나고 앞으로 더 성공할 거라고.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하, 저도 그 애와 비교하는 제가 우스워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늘 자신감 넘치고 억척스러운 김주영은 처음으로 실패를 인정했다. 따라잡을 용기마저 나지 않아서 더 절망스러웠다.

할아버지는 자책하는 김주영의 등을 토닥이며 다독였다.

“바보 녀석, 남보다 못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니? 세상은 넓고 너보다 뛰어난 사람은 널렸어! 그렇게 남과 비교하면서 사는 거, 피곤하지도 않아? 그리고, 네가 어때서? 훌륭하기만 하구먼 뭘. 내가 보기에는 그 누구냐, 영호나 민석이나 대명이보다 네가 훨씬 나아! 똑똑하고 착한 손녀딸을 뒀다고 다들 부러워하는걸!”

* * *

오상훈은 XX토크쇼의 열혈 시청자다. 특히 TV보다는 기숙사에서 실시간 스트리밍을 보면서 댓글로 네티즌들과 소통하는 걸 더 좋아했다. 인터넷에서 재밌는 콘텐츠를 발견하면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데 옆에 얘기를 나눌만한 사람마저 없으면 정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건 인터넷으로 시청하는 편이었다.

오늘도 흥미로운 영상을 발견하고 재빨리 채팅창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 ㅎㅎㅎㅎ 저 양은 뭐지? 표정 엄청 웃긴데?

같은 시간, 네티즌들의 댓글이 쭉쭉 올라갔다.

- 현웃터짐ㅋㅋㅋ

- 배아파 뒤지겠네ㅋㅋㅋㅋ양 생김새 뭐임? 존웃기네ㅋㅋ

- ㄷㄷㄷ시발 뭐지 잠깐 거울 봤는데 울집 거울에 꼴뚜기 있음ㅋ

- 엄마가 나한테 왜 스크린을 핥냐고;;;아ㅋㅋ딱걸렷죠ㅋㅋ

- 양 너무 귀여워요ㅠㅠㅠㅠㅠㅠ근데 좀 불쌍하다ㅠㅠㅠㅠ

- 님들 지금 뭔 상황인거임???

순간 채팅창은 놀란 네티즌들이 보낸 느낌표로 도배되었다. 오상훈은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 재빨리 채팅창을 끄고 결과를 지켜봤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새끼 양이 갑자기 공중에서 떨어지더니 바닥에 거의 다다랐을 때는 난데없이 나타난 커다란 흰 공에 갇혔다. 바닥에 완전히 닿은 다음에는 통통 튕겨 오르기까지 했다.

곧이어 김민인가 뭔가 하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애가 다가가 웬 액체를 칙칙 뿌리자 흰 공에 순식간에 구멍이 훅 들어가고 새끼 양이 입가에 묻은 실오라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멍청한 표정으로 멀쩡하게 걸어 나왔다.

오상훈은 채팅창을 볼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는 스크린을 뚫을 기세로 빤히 들여다보며 손은 쉬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 지금 뭔 상황임? 누가 설명 좀. 양이 왜 멀쩡함? 저 공은 또 뭐임? 어디서 나타남??

그러나 다들 별생각 없이 봤는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 * *

솜사탕을 선보인 지 불과 몇 분 만에 토크쇼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끝을 모르고 치솟는 시청률에 방송사 사장은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게 원영의 계획대로 높은 관심을 모으며 그 자신과 솜사탕은 순식간에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엥? 저 친구 재밌는 물건을 만들었네!”

이보아는 늘씬한 다리를 티테이블에 걸친 채 스크린 속에 줄줄이 놓여 있는 솜사탕 시리즈를 한참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헉! 이거 번지 점프보다 스릴 넘치는데!”

딱 봐도 유흥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같은 청년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유 비서, 탄력 타입 솜사탕, 그거 안전한 건지 한 번 알아봐, 괜찮으면 먼저 한 박스 사서 놀아보게!”

“지금 당장 저 친구 연락처 알아내! 아니다, 태안시로 가는 가장 빠른 티켓 끊어줘!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겠어!”

동국 XX자동차 제조업체 회장은 즉시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서둘러 원영을 만나러 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 교수가 안경을 닦으며 옆에 있는 대학원생에게 물었다.

“저 친구 어느 대학 지원했다고? ……의대? 지금 장난해! 우리 학교로 와야지! 전화 줘봐, 내가 직접 총장에게 전화 넣어야겠어! 입학처 놈들 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거야? 저렇게 훌륭한 인재를 못 알아보다니, 다 잘라야 해!”

“시작했어, 얼른 나와!”

민이 문밖에서 불렀다. 회전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정신을 수양하던 원영은 쉴새없이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버리고 호주머니에 손을 쓱 질러 넣고 나갔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컴퓨터 수치 제어 공작 기계가 나지막이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모든 과정이 자동화 생산 설비로 완성되기 때문에 직원들이 할 일은 전원을 켜고 끄고, 계기판 수치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방문자 기록을 작성하는 등 기술 정도가 낮은 일뿐이었다. 그러니 전문지식이나 기술력은 그다지 필요 없고 성실하기만 하면 되었다.

컨베이어 벨트에는 갓 생산된 따끈따끈한 솜사탕들이 종류별로 놓여 있고 한쪽에는 포장을 마친 완제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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