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올 마스터 #84
살(殺).
발터 밀란에게 밀린 2인자라는 칭호를 지닌 그들은 사실 헌터가 나타나고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음지에서 활동했다.
세상이 격변을 맞이하고 양지에 모습을 드러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을 뿐.
초반에는 그들은 분명 완벽한 황금기를 얻었다.
사람 하나둘 정도는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그 중심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실리를 위해 움직였다.
“젠장, 빌어먹게도 한가하네.”
“조용히 해. 살주께서 보신다면 너 모가지다.”
“....쯧.”
다만 그런 그들의 황금기는 짧았다.
최강의 10인의 등장과 그들과 비슷한 부류의 발터 밀란이 세운 암조는 살(殺)의 암살자들을 압살했으니까.
그들이 처리하지 못하는 암살 대상도 암조는 처리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살(殺)의 암살자 중에서 암조에게 암살 당하는 이들마저 나왔다.
결국 살(殺)의 위상은 바닥에 처박혔고, 그들은 영원한 2인자, 콩의 타이틀들을 얻게 되었다.
결코 얻고 싶지 않았던 타이틀과 명성이지만 그들은 반발할 수 없었다.
“발터 밀란, 개자식.”
“입조심 하라니까. 난 아직 죽고 싶지 않거든.”
“암살자가 암살자를 조심해야한다니 이게 무슨 코미디냐고 대체!”
발터 밀란.
암살자 중의 암살자이자 독인, 살왕 등.
거창한 별호로 불리는 동종업계 최강자가 너무나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살(殺)은 발터 밀란의 최중요 감시 대상으로 격상한 지 오래였기에 그들은 그에 대한 말 하나 제대로 꺼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유는 하나.
“그때 올 마스터 암살 명령을 받으면 안 됐어.”
“....살주께서 하신 유일한 실수시지.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주를 따른다.”
“....알아, 나도 안다고. 그냥 그때 만약 우리가 올 마스터 암살이 아니라 철혈 녀석을 노렸다면....”
“헛된 가정이다.”
같이 경호를 서는 단원의 말에 말을 꺼낸 이도 이를 갈며 고개를 숙였다.
헛된 가정.
그 말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이미 시간은 지났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철혈 김승태와 달리 올 마스터 이강혁은 날개를 단 듯 날아다녔고 엎지른 물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
의미 없는 가정에 시간을 쏟는 것보단 주위 경계에 힘 쓰는 게 더 유익하고 남는 장사일 터.
살(殺)은 암살 단체인 만큼 외부의 습격을 받는 경우가 빈번하기에 경계를 게을리 했다간 살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대화를 마치고 경계에 돌입한 그들을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터벅터벅-
살의 본거지가 위치한 곳은 중국 내부에서도 슬럼가로 통하는 곳.
당연히 일반인이 올 곳은 아니고, 슬럼가 내부의 존재들에게는 두려움의 상징이기에 올 사람은 없다.
즉.
“....멈춰라.”
“더 이상 오면 죽이겠다.”
살을 노리고 온 방문객이라는 의미.
여기서 손님일 경우 그들의 말에 걸음을 멈출 것이고 그 반대라면....
터벅터벅-
“....젠장, 종을 쳐!”
“....요즘 잠잠하다 했더니 또 누구야?”
살을 노리고 온 습격자라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습격자는 그들의 말에도 멈추지 않고 속력을 점점 올렸고.
점점 빨라지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경비를 서던 단원의 외침과 동시에 정문에 달린 종을 치려는 순간.
습격자 쪽에서 먼저 선공을 날렸다.
푸화아악-
“....이건?”
“빈센트의 그림자술이다!”
“발터 밀란의 암조 소속인가?”
그들의 발밑에서 치솟은 그림자가 종을 치려는 이의 전신을 꽁꽁 묶어 움직임을 제한한다.
당연하게도 형체가 없는 그림자를 풀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그들이 기를 쓰고 움직이려고 하지만 이미 습격자는 그들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고작해야 A급인 그들의 힘으로 그림자술로 만든 포박을 풀기란 요원했고, 드러난 습격자의 얼굴을 본 순간 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올 마스터.”
“살주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니라 살(殺)에서 죽이려고 했던 올 마스터 강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강혁의 말에 그들은 곧바로 자살을 시도했다.
콰득-
어금니 안 쪽에 마련된 독단이 으스러지고, 그들의 전신으로 독이 퍼져나가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극독.
하지만 점점 멀어져가던 그들의 의식은 강혁의 한 마디에 제자리를 찾았다.
“정화.”
파아아앗-
눈앞이 멀 것 같은 신성력의 광채가 터져나옴과 동시에 그들의 몸에 깃든 독기를 단번에 정화시켜버린 강혁이 무뚝뚝한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살주에게, 안내해라.”
“....”
두 번째 기회.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은 없다는 생각에 살주의 두 단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콰가가각-
살(殺)의 본채.
그곳에 모인 수십 명의 암살자들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갑자기 쳐들어온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살의 모든 전력이 갈려나가고 있다.
마치 예전 발터 밀란이 쳐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광경에 그들은 분노보다 공포란 감정이 앞서는 걸 느꼈다.
항거할 수 없는 적을 눈앞에 두었을 때나 느낄 수 있던 기묘한 감정이 몸을 잠식하는 순간.
그들은 침입자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저절로 길을 비켜주게 되었다.
발터 밀란의 암조 다음가는 최강의 암살 집단이라는 이명과는 다른 모습에 침입자인 강혁은 혀를 찼다.
‘별 거 아닌데?’
-네가 괴물이 된 거다.
‘그럴수도 있겠네.’
하나 같이 A~S급으로 이루어진 암살자들을 상대로 무적에 가까운 신위를 보이는 강혁에게 그들은 더 이상 위험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앞길을 막는 귀찮은 날파리에 불과할 뿐.
그렇기에 핀잔을 던지는 분노의 말에 대충 대꾸하곤 정문에서 붙잡은 녀석들을 내비게이션 삼아 살주가 있는 곳을 향해 차근차근 다가갔다.
콰과과광!
막는 녀석이 있다면 부수고.
처적-
길을 터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저 그들 사이로 걸어갔다.
적진의 한가운데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길을 터주는 이들이 많아지는 모습에 강혁은 실소를 흘렸다.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과도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실상은 그들의 주인을 만나고, 이곳에 있을 칠선 중 하나를 취하러 온 침입자에게 보이는 태도로 걸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강혁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은근 마음에 들었다.
‘나도 이런 살수 집단이 있다면 편할 것 같은데.’
살수 집단의 강함은 비단 암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적에 대한 정보 및 함정과 독 등.
다양한 무기들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은 단체가 바로 살수 집단이다.
그중에서도 살(殺)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살수 집단.
당연히 휘하에 둔다면 꽤 편하게 일이 진행될 가능성이 컸다.
안 그래도 정보 집단의 부재가 뼈저리던 강혁에게 있어서 살(殺)은 먹음직스러운 집단임은 틀림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칠선부터.’
분노의 말에 따라 가장 꼭대기에서 느껴지는 칠선의 기운 따라 이동하던 강혁은 어느새 살(殺)의 주인인 살주의 방앞에 도착해 있었다.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비게이션들은 그 말을 끝으로 후다닥 아래층으로 도망쳤다.
굳이 그들을 붙잡지 않은 강혁은 방문을 열어젖혔다.
“오셨군요.”
“....여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살수 집단의 수장이 여성인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그 안에서는 강혁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두 눈을 감고 슬며시 미소 짓고 있는 여성이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자신이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강혁이 핀잔을 주자 그녀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만도 하지요. 대외적으로는 제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살주라고 소개 되어 있으니까요.”
“....기척을 숨기는 솜씨가 장난 아닌데.”
말을 꺼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던 이가 살주의 옆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강혁은 살짝 놀랐다.
아무리 본격적으로 기감과 탐지를 펼치지 않았다지만 자신이 누군가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그에게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놀람도 잠시.
타닥- 철컥-
“....!!!”
“그것도 나를 이길 수 있을 때 중요한 거겠지만.”
육중한 거체임에도 기척을 숨기는 솜씨가 일품이던 바지 살주는 고작 한 수로 내게 뒤를 내주었다.
그 사실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자, 이제 보디가드도 사라졌는데 할 말은?”
“당신이 올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밑에서 그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모르면 그게 문제 아니겠어?”
“아뇨, 그것 말고도 저는 당신이 올 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밑에서의 소란을 듣기도 전에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가는 살주의 모습에 강혁은 바지 살주의 목에 겨눈 검을 떼고 그의 앞에 주저앉으며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당신이 원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내가 원하는 거라....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 말에 따라서 오늘 불살(不殺) 다짐이 깨질지도 몰라.”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이 칠선이라는 걸 아는 강혁이기에 만약 살주의 입에서 오답이 나온다면 단숨에 그녀의 목을 벨 준비를 갖췄다.
그 모습을 보고 강혁에게 바지 살주가 달려드려고 했지만 살주가 손을 내밀어 그런 그를 제지했다.
그리곤 대답을 기다리는 강혁을 향해 살풋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제가 바로 당신이 원하는 것이니까요. 당신의 몸에 깃든 세 친구도 저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
세 친구.
그 말은 곧 자신 또한 칠죄, 칠선 중 하나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기에 강혁의 얼굴에 경계심이 어리는 순간.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살(殺)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있는 살주임과 동시에 칠선 중 ‘순결’을 담당하고 있는 장소화라고 합니다.”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소개를 하는 살주, 장소화의 말에 강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칠선이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맞다.
“....뭐?”
살아 있는 인간 칠선이라는 말에 강혁이 짓궂은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몰아붙이려 하자 분노가 그런 강혁을 말렸다.
그녀는 정말 칠선이 맞다고 증명을 해주는 분노의 말에 강혁이 당황하자 여전히 싱긋 웃고 있던 장소화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이 저를 가질 수 있는지 시험해보겠습니다.”
언뜻 들어본다면 고혹적이고 19금적인 말이었지만 그 말에 깃든 진위를 모를 정도로 강혁은 둔하지 않았다.
분노의 던전, 인내의 탑, 일본 사건 등.
여태까지 얻은 칠죄나 칠선 모두 강혁에게 시련을 주고 그것을 클리어하면 얻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꿀꺽-
새로운 칠선 중 한 명인 순결의 시험은 대체 어떤 고난이도의 시험일지 강혁이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처녀이십니까?”
“....?”
이어진 시험 내용에 강혁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