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도발의 의미
세하가 지오 그라함이던 시절부터 엑펠트에 대해 느낀 것이 있었다.
‘어떤 것이던지 엑펠트에게 감염되면 추악해진다.’
감염되기 전에 그 어떤 아름다운 것이라도 비틀리고 본래보다 흉포하게 변했다. 물론 헤러커나 그레이스 같은 예외 차원도 있었지만 세하는 지금 그걸 눈앞에 보고 있었다.
키아아아!
회색빛으로 물든 처절하게 비틀린 얼굴이 세하의 눈앞에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물론 지금껏 상대하던 플롯 형태의 변이체가 그렇게 된 것인데 세하는 기계적으로 사이킥 블레이드를 그 면상에다 찔러버렸다.
거기에 적중당한 변이체는 오히려 처음 나타나서 세하를 공격했을 때보다 허망하게 기운을 잃고 추락하고 말았다. 상대가 쓰러지기 무섭게 사이킥 블레이드의 전원을 끈 덕분에 세하의 디스트로이어 플롯이 거기에 딸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게 문제로군.’
앞서 처치한 플롯 형태의 변이체들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장거리에서부터 강렬한 광선의 포화를 날리는 터라 세하로서도 조금은 난감했다.
-아직 경험치가 부족하네요.
루이제도 상황의 급박함을 아는 터라 이제는 음성으로 말하지 않고 평소처럼 세하의 머릿속에서 직접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경험치 말이야?”
세하는 급하게 공격을 회피하거나 리버스 필드로 막아내면서 물었다. 그럼에도 루이제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설마 디스트로이어 플롯 정도가 화력의 정점이라고 보시는 건 아니겠죠? 사실 지구연방군의 데이터에는 온갖 것이 있습니다. 당연히 엘렉티오의 AI였던 저에게도 다 기록이 있고요.
급박한 상황에서 루이제는 잘 도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니 마스터의 경험치만 충족된다면 지금보다 강력한 병기를 쓸 수 있어요. 엘렉티오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위의 것도요. 엑펠트가 아무래도 우리 영향을 받아서 흉내를 내는 모양인데 저런 허접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답니다.
“젠장... 아무튼 죽도록 해보라 이거군.”
세하는 일말의 가능성을 떠올리며 계속 싸웠다. 계속 몰려드는 적들에 대해서는 루이제가 멀티 락온 시스템을 보조해서 연산해주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플롯 형태의 적들도 지금 세하의 디스트로이어 플롯을 흉내 내긴 했어도 어딘가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서 차례차례 격파해나갈 수 있었다.
“후우.......”
이제 공세가 수그러들었다. 변이체들도 한도가 있었는지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고 세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한 상태에서 힘겹게 디스플레이를 응시하며 상황을 살피게 되었다.
“이거 굉장하네요.”
어느새 루이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서 세하의 옆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평화로운 초원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었고 지금은 오로지 파괴되고 회색으로 물든 대지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꼭 질척거리는 게 엑펠트 놈들 그 자체고 말이야.”
세하의 말대로 단순히 땅이 아닌 진흙처럼 회색의 물질들이 질척거리는 상태라는 게 문제였다. 하늘은 마치 피처럼 붉었다. 그러니 아주 괴악한 풍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크으으으... 네 놈.......’
그리고 변이체들이 달려들기 전 세하에게 외쳤던 음성이 들려왔다. 세하가 화면을 확대해서 보니 질척거리는 회색의 땅에서 어떤 존재가 서서히 형태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커다란 말이 연상되는 모습이었지만 커다란 날개가 펼쳐졌고 살벌한 두 개의 뿔이 머리에 자라고 있었다. 몸길이만 15m를 넘는 것이 상당한 거구로 보였는데 그 존재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홰를 치더니 날아올랐다.
‘나는... 아르길... 지금은 위대하고 드높은 프로타 에고의 뜻을 받는 자.......’
“.......”
세하는 그 존재가 눈앞에 이르면서 자신을 소개하자 잠시 표정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르길이면 파흐트 계 7인의 로드 중 한 놈이잖아?’
그리고 엘파타르에게 들었던 존재여서 세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아무래도 엘펙트에게 감염된 것 같습니다.”
이어진 루이제의 말대로 아르길은 어딘가 엑펠트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회색으로 물든 것도 그렇고 날개의 표면이나 몸의 표면 곳곳이 날카로운 가시나 칼날이 가득 돋은 것 같았고 두 뿔도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 네 놈에 대해서는 들었지. 그런데 싸우다 말고 왜 이러는 거냐?”
세하는 일단 아르길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아르길은 본래는 수려했을 얼굴을 가득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네 놈을 죽이기 전에 네 놈이 얼마나 무모했고 쓸데없는 짓을 했는지 알게 해주기 위해서다.’
여전히 공기를 울리며 위압적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세하의 생각은 다른 쪽에 있었다.
‘로드 일곱 중 셋은 여전히 주신 우리스의 영향에 있고 넷이 엑펠트에게 오염됐다고 했지.’
세하는 엑펠트의 영향을 받는 다른 로드들이 어디에 있을 지를 생각했다.
“어이. 아르길.”
그래서 세하는 먼저 치고 나가기로 작정하고 말했다.
“솔직히 너 하나 즘은 내 상대가 못 될 텐데? 아무래도 다른 로드 녀석들도 있지? 다 나오라고 해.”
‘.......’
거기에 아르길이 침묵했다. 루이제는 거기에 화들짝 놀랐다.
“마스터? 그런 식으로 구시면.......”
“어차피 드러난 상태면 차라리 대처할 수 있어. 모르고 있다가 기습당하는 것 보다는 낫다 이거야.”
그럼에도 세하는 자신감을 보였고 아르길은 아무 말 없이 세하를 노려볼 뿐이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세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순간 거대한 용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싸운 변이체들 중에서도 용은 있었지만 이 용은 상당히 유려하고 신성한 느낌이 있는 존재였다. 그것도 마치 동양의 용처럼 몸이 긴 형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타나는 존재가 둘이나 더 있었다. 빛의 거인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등 뒤에 3쌍의 날개를 단 존재와 무척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소년의 존재마저 그렇게 나타나 모두 하늘로 떠올랐고 세하를 빙 둘러싸는 포진이 이뤄지고 말았다.
‘등장한 순서대로 헤르엘, 무카론 그리고 유피네쉬인가?’
이미 엘파타르와 우리스에게 들은 정보들인지라 세하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본래 천성과도 같은 파흐트 계를 수호하는 일곱 로드의 일원이었지만 지금은 엑펠트에게 오염되어서 불길한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기세 또한 흉흉하게 보였다.
“우리가 있는 걸 잘 알고 있었군. 마음에 들어.”
그 중 소년의 모습을 한 유피네쉬가 가장 양호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등 뒤에 난 2쌍의 날개는 날카로운 검처럼 보일 정도로 예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뭐가 마음에 든다는 거냐?”
일단 유피네쉬는 정상적으로 말을 하고 있어서 세하가 물었다. 거기에 유피네쉬는 턱에 손을 대더니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널 잡으면 우리가 고통에서 해방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리고 갑자기 붉게 물든 눈이 되며 유피네쉬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세하는 그 말뜻을 이해했다.
“고통이라. 하긴 너희 정도 고위의 존재들이 오염 됐었으니 고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
“뭐?”
아무래도 자신들의 기준에서는 필멸자인 세하가 이렇게 덤덤하게 대답을 해서인지 유피네쉬를 비롯한 로드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흐트 계는 우리스의 영도 하에 다들 빛나게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평소와는 다른 지배 체계에 억눌리고 있을 테니 참기가 힘들 테고 말이야.”
세하는 그런 로드들의 반응이야 어떻든 자신의 할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참 엑펠트라는 것들은 여러 가지로 민폐야. 진짜로 내가 어떻게 그것들이 탄생했는지 그 근원부터 파헤칠 거야. 그래서 그 골통을 제대로 박살을 내버릴 거라는 거지. 그런데 너희들은 방해만 될 것 같네. 그런 놈들한테 지배당하고 있으니 말이야.”
“어리석은 필멸자로다... 우리 같은 강대한 존재들조차 이렇게 지배당하는 데.......”
유피네쉬가 분노에 더욱 표정이 일그러지며 말했지만 세하는 그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패배하고 굴복한 개가 짓는 소리는 사절이야. 그만치 네 놈들도 쓰다 버리는 존재라는 거지. 어이 프로타 에고. 너 지금 있지?”
그리고 세하가 한 말에 로드들의 기세가 더욱 살벌하게 변했다. 하지만 바로 달려들지 못하는 것이 정말로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였다. 그 존재는 순식간에 지면에 솟아올라 세하의 앞에 당도했다. 그리고 공기를 진동시키며 말했다.
‘사실 우리의 의식이 수 없이 뻗어 있기에 이름 따위는 의미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두지.’
신장만 10미터가 훌쩍 넘는 거인. 하지만 그 형태는 가히 검의 천사라고 할 수 있었다. 4쌍의 날개와 전신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했고 한 손에는 작열하는 빛으로 이루어진 대검을 들고 있었다. 세하는 그런 프로타 에고의 상태를 보고 속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허이구. 본격적이네.’
그리고 투구 또한 풀페이스 형인지라 얼굴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틈새에서 회색의 기류가 스물 스물 일어나고 있었다. 특이하게 무장이나 4쌍의 날개 등등은 정말로 천상의 존재처럼 새하얗고 신성한 빛이 일고 있었다.
하지만 각 틈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회색의 기류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튼 세하로서는 이번에 나타난 프로타 에고의 모습에 제법 감탄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단단히 준비하고 나온 것 같아요.
이미 루이제는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큰 전투를 앞두고 있는 터라 다시 세하에게 제대로 서포트를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지만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 침략을 준비하고 행동하고 있지. 물론 생각보다는 다들 잘 막아내고 있어서 고민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래서 만나서 제대로 대화를 했으면 했다. 민세하.’
프로타 에고는 그렇게 운을 뗐다. 그러니 로드들은 더 이상 공세로 나설 수가 없었다.
‘호오. 이놈들 봐라?’
어차피 세하도 프로타 에고의 실체를 알고 있기에 잠시 어울려 줄 생각을 했다. 물론 엘리미네이터 아머와 디스트로이어 플롯을 붙인 상태에서 라인버스터 슈트를 착용하고 상태인지라 자세가 불편해서 피로했지만 세하는 절대 약하게 보일 생각이 없이 이를 악물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은 거냐? 이제 와서 설득이라도 해보겠다는 거냐?”
그리고 생각을 정리해서 세하가 물었다. 거기에 프로타 에고는 투구로 둘러싸인 머리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군 그래. 그런다면 우리의 탄생과 근원에 대해서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너의 존재 자체도 흥미롭고 말이다.’
‘미친놈들.’
물론 세하는 거기에 응할 생각은 없었다. 파흐트 계의 로드들이 이렇게 지배당하는 꼴을 보고서 이미 세하는 프로타 에고에 대한 투쟁심을 불태울 뿐이었다.
“솔직히 네 놈들 같은 것들은 그냥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박살내서 없애 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듣기에 따라 바로 대화가 무산 될 소리를 해버렸다. 하지만 프로타 에고는 제법 인내심을 가지고 들었다.
‘그런가? 인간들도 그런 말을 하지 않던가? 상호 교류와 이해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무척 험난하지만 그것을 이뤄낸 몇몇 성과에서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하는 말에 세하는 순간 귀를 의심해야 했다.
-마스터. 엑펠트는 그 무엇도 흡수합니다. 지식이든 기억이든 말이죠.
루이제가 세하의 감정이 격해지려는 것 같아서 말했다.
‘그래. 그렇긴 하네. 하지만 저것들이 저런 소리를 하는 게 너무 열 받아서 말이야.’
세하는 간신히 진정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인간의 역사나 사례를 좀 아는 것 같군 그래. 그래 얼마나 잡아먹었지?”
하지만 여전히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그래서 프로타 에고가 반문했다.
‘우스운 말이로군. 너는 지금까지 먹어온 것에 들어간 동물의 수를 기억하나?’
“당연히 기억 못하지! 그러니 처 맞자!”
세하는 그렇게 받아쳤다. 그리고 동시에 디스트로이어 플롯의 모든 무장을 발포했다. 거의 딜레이 없이 순식간에 펼쳐진 공격에 프로타 에고는 그대로 휩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