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미끼 설정
세하는 아이에르의 상태를 보고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눌린 건 아니었다.
‘이거 골치 아플 것 같네.’
단순히 적대적인 상황이거나 전투가 벌어진다면 세하는 그냥 전력을 다해서 제압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에르는 처연하면서도 뭔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아무튼 세하의 두 눈이 날카로워졌고 아이에르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감염 현상이 일어난 건 저 뿐이에요. 하지만 다른 팀원들에게 옮길까봐 걱정이네요. 하지만 민세하 헌터님은 다르신 걸로 알아요. 최근에 엑펠트들을 무수히 상대해오셨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로군.”
정말로 처음이었다. 그래서 난감했는지 루이제 조차도 다른 말을 못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아무튼 현 시점에서 억제는 가능해요. 하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민세하 헌터님께서 바로 처리해주셨으면 하네요.”
아이에르가 다시 한 말에 세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재수 없게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다. 아무튼 현장을 조사해봐야겠군. 지금 있는 곳도 일종의 결계나 이계 같은 거지?”
아무래도 세하도 이차원을 돌아다니다보니 제법 눈썰미가 생겨 있었다. 거기에 아이에르가 다시 팔소매를 내리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헌터가 아니시군요.”
“원래 대관령에 이런 성 같은 건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최근 경험도 무시 못 하고 말이야.”
아무튼 세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축객령을 내렸다.
“내일 아침부터 조사해 볼 거야. 아무튼 감염이 시작된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아이에르는 손쉽게 물러났다. 하지만 세하는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
“희한하구만.”
본래 양떼가 높은 언덕에서 뛰노는 것이 어울릴 광경이었지만 지금 세하가 보기에는 무슨 마경처럼 보였다.
-일반적인 게이트 현상은 물론 엑펠트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네요.
문제의 구역 상공을 비행하면서 루이제도 세하와 같은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그래. 엑펠트 놈들이 다른 차원이나 여기 게이트를 통해서 조금씩 영향력을 드러내는 건 봤지만 저렇게 사람한테 들러붙는 꼬라지는 처음보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른 아침부터 아이에르에게 안내를 받아 문제가 있는 구역을 돌고 있었다. 하지만 세하는 별 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해서 루이제에게 묻고 있었다.
-사람에게 간염이 되는 사례가 없진 않았죠. 하지만 저렇게 고위 능력자에게 붙는 경우는 못 봤습니다. 보통은 저렇게 되기 전에 죽거나 사전에 처리하니까요.
아무래도 전생을 해오며 오랜 시간을 지낸 루이제로서도 별 다른 데이터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하는 갑갑함에 어느새 지면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물론 그 지면은 조금 달랐다. 마치 회색의 점액질 같은 것이 붙어 있었는데 세하가 내려가면서 슈트를 라인버스터 슈트로 바꿨고 사이킥 파워를 화염 속성으로 뿜어내자 그 주변 점액질들이 죄다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면 이렇게 설쳐봐야겠지.”
이렇게 세하가 지면으로 내려서자 사방에서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균열 지대 마냥 게이트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온갖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하로서는 코웃음만 나왔다.
“이래서 고인물들이 나태해지는 건가 보군.”
세하는 말 그대로 부수고 태우고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점액질의 공간이 어딘가 불쾌했고 바로 태워버리는 것이 가장 즉효하다는 생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괜찮으세요?”
그렇게 아침부터 정오까지 난리를 치고 있자 어느새 아이에르가 상황을 보러 왔다. 놀랍게도 마법 소녀마냥 허공에 떠서 날아오고 있는 터라 세하는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이거 놀라운데?’
-저도요.
주종이 이렇게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이 아이에르는 사뿐하게 지면에 내려섰다. 안 그래도 세하가 방역 작업이라도 하는 것 마냥 사방을 쓸어버렸기에 그녀의 주변은 상당히 깨끗한 공간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굉장하시네요. 확실히 민세하 헌터님 정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한 일 같아요.”
주변이 정리된 것에 아이에르가 감탄을 표했지만 세하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어지간한 상위급 헌터라면 가능한 일이지. 그나저나 언제부터 이런 상황이 계속 됐지?”
“1달 정도 됐네요. 우리 팀으로서는 이렇게 거점을 마련하고 더 확산이 되지 않게 막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이런 상태가 됐고요.”
다시 아이에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거기에 세하는 내심 신경이 쓰여서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그래도 잘 버티고 있었군. 어찌 되었든 내가 왔으니 사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
어찌 들으면 틀에 박힌 소리였다. 하지만 아이에르는 금세 미소를 지었다.
“네. 잘 부탁드려요. 그런데 뭔가 특이점이 있나요?”
아이에르의 황금빛 눈이 어딘가 의혹의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거기에 세하도 동의했다.
“그러게. 이 정도로 두들겨 댔는데도 뭔가 핵심이 안 보이는 것 같군.”
그리고 눈에 보일 정도로 점액질의 공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세하가 주변을 스캔해보니 메이지 클랜에서 설치한 결계 방어선은 간신히 유지되고 있을 정도였다.
“혹시 상부에 연락은 해봤어?”
세하는 메이지 클랜에서 이 사태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지 궁금했다. 그래서 물은 말에 아이에르의 표정이 한층 더 흐려졌다.
“솔직히 별 다른 말이 안 나오고 있어요. 아무래도 우리 클랜은 헌터 협회처럼 개방적이진 않으니까요.”
‘이거 대책 없네.’
세하는 하도 대책이 없다보니 헌터 협회에 손을 벌렸고 자신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렇게 온 이상 물러가는 건 세하의 자존심에 용납이 되지 않은 문제였다.
“결계나 저지선을 유지하는 것은 문제없지?”
세하가 의도적으로 물은 질문에 아이에르의 두 눈이 동그랗게 됐다.
“아 네. 적절하게 교대제로 확인하고 있고 아티팩트나 결계 요소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너는 계속 나랑 다니면서 탐색을 해야 하니까 말이야.”
“아......”
이어진 세하의 말에 아이에르는 그제야 납득했다.
“일단 엑펠트의 융합체가 접점이 있고 현장에 있는 마법사 중에서는 네가 가장 강하겠지? 거기에 내 보조가 있다면 상황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봐. 괜찮겠지?”
세하가 다시 동의를 구하자 아이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 팀원들에게 말해두겠어요.”
아이에르가 동의하자 세하는 일단 현장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
세하와 아이에르가 철수하고 난 후 거점인 성에서 꽤나 긴 회의가 이어졌다. 외부인인 세하로서는 구석에 팔짱만 끼고서 듣고 있었지만 아이에르가 가진 발언권이 상당했고 이미 대부분의 마법사들도 세하의 결정에 찬성하고 있어서 그리 어려운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후방을 든든해야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복잡하군 그래.’
세하가 알기로는 마법사라는 종족들은 원래 비의에 대한 탐구심에 비례해서 서로의 자존심이나 알력이 장난 아닌 걸로 알고 있었다. 메이지 클랜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긴 했지만 지금 방법론에서 논의하는 것이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보고서 세하는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무튼 어떻게든 됐네요.”
아이에르가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후 1시 경에 시작된 회의는 밤 10시가 돼서야 끝났다. 생각보다 메이지 클랜 상부에서도 인원적인 지원은 힘들어도 기타 아티팩트나 마법의 촉매 등에 대한 지원은 가능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평이 대다수였다.
“그렇네. 아무튼 내일부터 힘들 거야. 그야말로 극한까지 쥐어짤 생각이거든. 네가 좀 고생할 거다.”
세하는 아이에르에게 당부했다. 거기에 아이에르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뭐... 뭘 쥐어짠다는 거죠?”
“으음. 뭐랄까.”
세하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아직까지 회의장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른 마법사들은 각자 할 일이 있는 지 다들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래서 세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미끼가 될 거라는 거다. 물론 내가 근처에 있을 거니 문제는 없을 거다.”
“미끼라.......”
아이에르는 세하의 말을 곱씹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하는 뭔가 대화가 어려울 것을 예상했지만 그녀는 생각 외로 밝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 같네요. 반응을 이끌어내려면 말이죠. 게다가 우리 측 데이터베이스에서도 민세하 헌터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됐어요. 거의 일인 군단이라 할 만한 화력을 지니고 계실 테니 문제없을 것 같네요.”
그렇게 아이에르가 받아들이자 세하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럼 오늘은 쉬고 내일 보도록 하지.”
세하가 그렇게 몸을 돌려 걸어가자 루이제의 잔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마스터. 마스터답지 않게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이네요.
‘뭐 어때?’
하지만 세하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면서도 감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나도 나름 자료를 살펴봤단 말이지. 저 아이에르라는 아이. 거의 전술 병기 수준이라고. 게다가 자체적으로 비행 마법에 대한 수준도 상당한 걸 보니 기동성이나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때 문제도 없고 말이야.’
그렇게 세하가 결론을 내놓자 루이제의 한숨 쉬는 소리가 세하의 뇌리까지 들려왔다.
-뭐 겉모습에 혹하지 않고 바로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이 낫긴 하네요. 하지만 심정적으로랄까 그녀를 미끼로 쓰는 게 내키지 않는 게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그래?”
이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는지라 세하는 육성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확실히 그냥 AI는 아니게 됐네. 그런 생각도 다하고 말이야.”
-사실상 사이킥 생명체니까요. 아무튼 메이지 클랜의 마법사들도 동의하는 걸 보고 있자니 그녀의 가치를 다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니면.......
루이제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지기 시작했다.
-엑펠트에 감염된 것을 알고 어느 정도는 포기하거나 버림패로 생각하는 걸 수도 있어요.
“메이지 클랜이 그런 생각이라면 나는 차라리 낫지.”
세하는 거기까지 듣고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마그티스의 예도 있고 너와 나의 저항력이라면 어지간한 엑펠트나 융합체는 다 때려잡거나 정화할 수 있을 테니 아이에르도 살려서 아예 우리 전력으로 삼아버리지 뭐.”
-으음... 그게 주목적이셨나요?
루이제는 세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에 적지 않게 놀란 것 같았다. 아무튼 세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탓인지 바로 침대에 몸을 뉘였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
*
다음날 아침부터 마법사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결계를 강화하기 위한 수 때문인지 부산해보였고 아이에르도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세하는 여전히 자신의 방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루이제가 걱정이 됐는지 물었다. 거기에 세하는 도리어 피식 웃고 있었다.
“하기로 한 이상 해야지 뭘 걱정하겠어?”
-아무래도 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고 누군가를 미끼로 삼는다니까 좀 그래서요.
루이제는 여전히 작전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 같았다. 거기에 세하는 느와르레이드 슈트를 장착하며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움직이는 군. 우리는 좀 더 상공으로 올라가야겠어.”
그리고 창문을 열고 그대로 날아올랐다. 평소보다 고공으로 비행을 하는 탓에 세하는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이내 적응했고 아이에르의 데이터를 사전에 입력했기에 바로 레이더와 센서에 그녀의 위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GPS와 링크 카메라를 부착하긴 했는데 아이에르가 아티팩트를 쓸 때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오늘따라 걱정이 많은 루이제였다. 아무튼 그녀가 말한 대로 아이에르의 의복에 몇몇 기기들을 설치한 덕분에 세하에게는 아이에르의 위치와 지금의 행동이 실시간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어디 메이지 클랜이 자랑하는 마법사의 실력을 보도록 할까?”
세하의 말이 신호라도 된 양 문제의 균열 지대에 들어온 아이에르를 향해 온갖 몬스터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