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존재 증명 1
파베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세하는 거기에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윗대가리에서 도구처럼 이용당한다면 끝내주는 게 오히려 축복이겠지.’
계속해서 사이킥 에너지의 출력을 높였다. 그래서 사이킥 블레이드의 검날이 더욱 거대해졌고 거기에 파베의 거체는 순식간에 베어져나가며 아예 빛의 파편으로 변해버렸다.
와아아아!
그렇게 파베가 처리되자 연합군의 기세가 더 높아졌다. 케나아찰의 몬스터들은 아예 쓸려나다가 시피 하며 사라져갔다.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케나아찰 계의 왕자라는 노타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 우습게도 세하가 파베를 죽이고 얻은 코어를 건넸더니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지금은 2미터는 넘을 인간형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고슴도치처럼 등에 수북한 가시가 달리고 머리는 포유류의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그 외의 전신은 갑옷과도 같은 금속질의 장갑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제법 강인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기운을 차라니 다행이네.”
세하는 일단 안심했다. 파베를 처리하고 프로타 에고라 불리우는 엑펠트의 군집을 한 번 물리치고 났더니 노타가 기운을 회복했고 본래 노타를 따르던 케나아찰의 존재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한창 연합군이 전장 정리를 하는데 발견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
아무래도 프로타 에고가 그녀를 조종하긴 했어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투명해 보이는 구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는데 이 구체가 아무리 후려쳐도 깨지질 않았다.
“일단은 좀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요.”
아무래도 엑펠트 담당관인 레이린은 그레이스를 관찰하길 원했다. 그건 제너럴 마이트의 엘페렌도 동의한 바여서 비교적 엄중한 보안 조치를 취해서 운반되어 갔다.
‘음. 나도 좀 쉴까?’
세하도 솔직히 좀 피곤했다. 케나아찰 계는 세하가 파베를 처리하고 거기서 얻은 코어로 노타를 회복시키자 본래 케나아찰의 존재들이 노타를 구심점으로 모여들고 있어서 엑펠트에게 상당한 견제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선지 당분간은 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제일 먼저 귀환하기로 했다.
-마스터. 그래도 그레이스는 지켜볼 생각이시죠?
하지만 루이제는 세하의 생각을 잘 읽고 있었다. 거기에 세하는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 내가 보기에도 꽤나 약화된 것 같으니까 별 일 없겠지.”
그래서 세하는 바로 제너럴 마이트의 본사로 이동했다.
*
“많이 약해진 것 같네요.”
제너럴 마이트 본사의 심층 보안 연구시설. 세하의 예상대로 레이린이 거의 숙식을 이곳에서 해결하며 있었고 중앙에는 제법 과해 보이는 필드 제네레이터를 통해 그레이스가 있는 구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 아무튼 내가 왔으니까 좀 쉬어.”
일단 케나아찰 계의 상황을 보고 오느라 레이린보다는 3일 뒤에 와서 세하는 레이린에게 휴식을 권했다. 거기에 레이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민세하 헌터님이라면 저 말고도 엑펠트에 대해서는 가장 권위자 이실 테니까요.”
“뭐 수틀리면 박살내는 것도 내가 제일이겠지만 말이지.”
세하가 그렇게 말함에도 레이린은 안심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혼자 남은 세하는 근처의 의자를 끌어다 앉아서 그레이스의 구체를 바라보았다.
“음. 골칫거리가 하나 더 늘어날 것 같은데요.”
어느새 루이제가 실체화해서 세하의 옆에 와 섰다. 이번에는 단정한 정장차림인지라 세하는 휘파람부터 불었다.
“왜 그래?”
“그레이스가 지금까지 보여준 성향 상 마스터를 적대할 것은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인류에게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서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레이린 리처럼 엑펠트 조사관에 준하는 존재가 될 지도 모르죠. 저는 솔직히 거북합니다.”
루이제는 이제 표정을 확실히 보일 수 있어선지 걱정과 불만의 감정이 엿보였다.
“이해해. 하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 마냥 복수심에 일을 그르치는 클리셰도 많지 않아? 우리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하지만 세하는 피식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거기에 루이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스의 구체에서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세하는 짓궂은 미소를 띠며 루이제를 바라보았다.
“지금 깨어나려는 거 같은데?”
“마스터는 진짜 악취미세요. 혼자 상대하실 수 있죠?”
아무래도 엑펠트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지 루이제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거기에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루이제는 모습을 감췄다.
“여어. 그레이스. 깨어났어?”
세하는 친근감 있게 물었다. 거기에 그레이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몸은 구체 안에 있었지만 복색은 제대로 갖추고 있는 터라 뭔가 부끄러워하거나 놀랄 일은 없어 보였다.
“역시 잡혀왔네요.”
아무래도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그레이스는 태연해 보였다.
“그래. 그리고 앞으로 네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대우도 달라질 거야. 그나저나 프로타 에고라는 놈은 뭐지?”
세하는 준비된 것처럼 질문을 던졌다. 거기에 그레이스는 두 눈을 끔뻑이더니 황당하다는 듯이 세하를 바라보았다.
“정말 작정하시고 물어보시는 군요.”
“네가 언급했으니까 물어보는 거야. 네 놈들의 우두머리냐? 아니면 그냥 명칭이냐?”
그레이스는 이어지는 세하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명칭이죠. 엑펠트의 특성상 단일 개체로서 위에 설 수 없어요.”
“그렇구나.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제법 영향력이 쎄더군. 필요 없다 싶으면 내치기도 하고 말이야. 내가 볼 때 진짜 변태 같은 놈들이야. 개별개체로서 자아를 주고서도 필요 없다 싶으면 그대로 몰수하듯이 써먹던데 말이야.”
“.........”
그레이스는 이어진 세하의 말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왜 그래? 대답하기 힘든 문제인가? 아니면 지금도 그 빌어먹을 프로타 에고가 네 머릿속에 있는 건가?”
“아니에요... 다만 많이 혼란스러워요. 제가 왜 만들어 졌는지 말이죠.”
아무래도 그레이스에게는 혼란의 감정이 뒤늦게 퍼지는 것 같았다. 거기에 세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것 같네. 나보다는 대화가 잘 통할 거 같은 사람을 불러올게.”
세하는 일단 대화는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레이린이 고생해줘야 할 시간인 것 같았다.
*
헤러커는 어떤 면에서 자유로웠다. 그리고 눈치가 빨랐다.
‘참 골 때린다.’
프로타 에고가 결국 그레이스를 총알받이로 써먹고 말았다. 자신도 그렇게 안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우리는 무얼 생각해야 하는 가?’
그리고 지금 엑펠트의 군체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헤러커는 가만히 듣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온갖 가상 화면들이 전면을 가득 체운 가운데 각 차원계의 상황들이 표시되고 있었다.
‘파베가 쓰러짐으로서 케나아찰도 저항할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솔직히 그 정도도 생각 못한 것은 아니다. 지구의 저력이 의외로 강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민세하. 그 자가 문제다.’
프로타 에고는 솔직히 엑펠트 군집체들이 합쳐져서 움직이는 최상위 결정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엑펠트들이 빠른 판단을 요구할 때 갖춰지는 시스템 적인 존재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걸까?’
하지만 그 외에는 어딘가 불규칙적이고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나 그레이스. 파베 같은 존재가 생긴 것부터가 그랬다.
‘헤러커. 그대는 할 말이 없는 가?’
일단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엑펠트 개별개체인지라 그에게도 발언권이 부여되었다. 그러자 헤러커는 일단 생각한 바를 말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나는 언제 폐기처분할 거지?”
듣기에 따라 상당히 용감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헤레커는 상관없었다.
‘모르는 일이지. 적어도 그대는 잘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뭔가 규칙을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필요에 따라 그대의 존재 또한 이용하게 되겠지.’
‘일단은 그대가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라. 우리가 할 말은 그것뿐이다.’
역시나 예상대로의 답변이 들려왔다. 그래서 헤러커는 오히려 갑갑해졌다.
‘그만치 나는 대체 가능한 존재라는 거겠지.’
헤러커는 더 이상 생각하는 걸 그만둬야 했다.
*
“우리는 항상 그런 식이었어요. 뭔가 실험적으로 만들어내고 그냥 나둬요. 하지만 그만치 엑펠트라는 정체성은 잊지 않게 하지만요.”
레이린이 들어오고 나서 그레이스는 한층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세하는 그 자리를 지키며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터. 괜찮으신가요?
루이제는 그런 세하가 염려스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세하는 정말 괜찮았다.
‘그냥 흥미롭잖아? 엑펠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기회니까 말이지.’
-하지만 저는 염려스럽습니다. 레이린 리나 그레이스 같은 존재들이 나오는 게 엑펠트가 의도한 바가 아닐까 싶어서요.
루이제의 의심은 타당했다. 아무래도 전생의 기억으로 엑펠트는 가히 전우주급으로 침식을 가해왔기 때문이었다.
‘글쎄다. 나는 너무 먼 일은 걱정 안하기로 했어. 지오 그라함 이던 시절에는 너무 책임에 짓눌렸다고 해야 하나?’
-.......
루이제는 세하가 전생의 일을 언급하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자 세하는 더욱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사실 그랬잖아? 계속 전황은 어둡고 나 외에는 그다지 대응할 전력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잖아? 하지만 지금은 헌터들이 잘 대처하고 있고 이차원의 지원군들도 있는 상황이지. 그러니 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어.’
- 마스터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도 생각을 달리 해봐야 할 것 같네요.
그리고 루이제가 못내 수긍하는 것 같자 세하는 다시 의식을 현실에 집중했다. 그 사이 레이린과 그레이스의 대화는 꽤나 진척이 되어 있었다.
‘파흐트 계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군.’
물론 그레이스가 이 지경이 되고나서도 파흐트 계의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래도 세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쳐들어 올 테면 오라지.’
세하는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때 그레이스가 세하를 불렀다.
“민세하 님. 잠시 괜찮을까요?”
“뭐야?”
세하는 그레이스와 대화할 생각이 없었기에 조금은 귀찮은 감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레이린이 제법 미안한 표정을 듣고 있어서 세하는 너무 신경을 안 썼나 싶기도 했다.
“레이린 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민세하 님이 더욱 특별한 존재라는 걸 알게되서 말이죠.”
그리고 이어진 그레이스의 말은 세하의 불길함을 확신으로 바꾸고 말았다.
“레이린. 너 무슨 이야기를 한 거냐?”
“아... 그게.......”
레이린이 쩔쩔 매기 시작했다. 그러자 루이제가 한 마디 했다.
-저 여자 사고 쳤네요. 그냥 후려칠까요?
평소 루이제답지 않게 격렬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거기에 세하는 간신히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혹시 나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 했어?”
“네... 그 전생에 대해서.......”
“........”
솔직히 세하로서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레이린이 그 이야기를 해버린 것이 별로 기분이 좋진 않았다.
“이따가 나 좀 보자. 지금은 그레이스와 독대해야겠어.”
“아. 네.......”
레이린도 자신이 잘 못 했다는 걸 깨닫고 물러났다. 그렇게 레이린이 나가고 세하와 단둘이 남은 그레이스는 황망한 표정으로 세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 둘이 잘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별로 신경을 안 썼더니 꽤나 나가버린 모양이네. 어떻게 생각해? 그레이스.”
“있을 수 있는 일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그 정도로 처절하게 싸워왔다면 더욱.”
“흐음.......”
그래도 생각보다 그레이스의 표정에 동요가 보이지 않아서 세하는 자신도 차분해지고 있었다.
“그래. 일반적인 상식 따위는 이제 별 거 아닌 시대가 되어버렸으니 말이지.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레이린은 검증된 존재고 너는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 어떻게 할까?”
세하는 그렇게 말하면서 순식간에 라인버스터 슈트를 장착했다. 그리고 오른손에서 사이킥 블레이드를 과부하시켜 강렬한 빛의 칼날을 만들어내며 그레이스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