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선전포고
“결국 또 나타났군요.”
세하가 주둔지로 돌아오고서 레이린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지고 말았다.
‘괜히 미안해지네.’
사실 다음날 말할까도 싶었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세하는 늦은 밤임에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엑펠트의 개별 개체라.......”
토마스도 꽤나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제너럴 마이트 심층부에 있는 알페렌과의 통신도 연결되어 있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측한 일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군요.”
현재 알페렌은 부드러운 여성의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분명 소년의 음성으로 말했다면 마구 화를 내거나 흔들리는 감정이 드러났을 터였다.
“그나마 긍정적인 건 그레이스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거지.”
세하는 자신이 느낀 바를 그대로 설명했다.
“그리고 정해진 날에 오는 녀석이 보통 녀석이 아니라고도 했어. 엑펠트 전체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도 하지.”
“........”
주변의 정적에 휩싸였다. 하지만 세하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다들 잘 준비하지 않았어? 왜 그렇게 굳어 있는 거야?”
“그건 그렇지만 엑펠트가 그렇게 개별 개체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건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만치 최상위급 헌터들과 대응책을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나 버틸 수 있을지.”
토마스의 고심은 깊어보였다. 하지만 세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며 말했다.
“일단 이차원의 개수대로 존재하는 거 같다.”
“네?”
그 말에 레이린이 반색하며 반응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다섯은 넘지 않겠지. 그리고 저번에 헤러커 녀석을 상대할 때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만 했지만 다른 이차원의 대표들이 합세하니 아주 꽁무니를 뺄 정도였지. 강하긴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상대도 아니라는 거지.”
세하는 거기까지 말해놓고서 자신 있는 눈으로 좌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헤러커나 그레이스가 이번 침공을 도울 것 같지 않아. 그레이스가 하는 말에는 간절함이 있었으니까.”
물론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하가 워낙 확고하게 말하고 있는지라 토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준비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물러설 수 없겠죠. 알겠습니다. 그 날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심야의 회의가 끝났다. 거기에 세하는 일부러 아무 말 않고 회의장을 나섰다.
“저기. 민세하 헌터님.”
그리고 예상한 대로 레이린이 세하를 따라 나왔다.
“그레이스가 한 말이 사실이에요?”
아무래도 여성형 엑펠트라는 것이 레이린의 심중을 건드린 것 같았다. 거기에 세하는 말 못한 것도 없어서 자신의 막사로 향하며 말했다.
“그래. 아까 전투 데이터를 보여줬는데도 안 믿으면 곤란해.”
“저...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그레이스의 출현을 경고하자 알페렌도 그렇지만 레이린의 동요가 심해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됐지만 지금도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의외로 아무 신경도 안 쓸 거 같아.”
하지만 세하가 툭 던지듯 말하자 레이린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파흐트 계는 완전 점령된 것도 아니고 케나아찰 계를 제외한 다른 이차원들도 마찬가지지. 그러니 그 쪽을 신경 쓰지 않으면 자신들의 위치가 위험해질 걸?”
“그건 그렇네요.”
안 그래도 레이린도 세하를 통해 이차원의 정보를 받고 있어서 쉽게 수긍을 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아마 나를 만나고 나서 죽자고 덤볐겠지. 나를 시험해보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 인 거야.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세하는 레이린이 안심하는 걸 보고 이렇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레이린의 표정에는 다시 걱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오는 케나아찰 계의 엑펠트는 보통이 아닌 모양이죠? 다른 차원의 엑펠트가 그렇게 경고를 해줄 정도라면 말이죠.”
“케나아찰의 왕자가 쫓겨 올 정도면 말 다 했지. 그 애 상태는 어때?”
워낙 작고 여려서 세하가 케나아찰의 왕자 노타를 애라고 불렀지만 레이린도 반감은 없었다.
“아예 아기가 된 것 마냥 잠드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그만치 케나아찰의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거 아닐까요?”
“그만치 이번에 이기면 뒤바뀔 수도 있다는 거겠지.”
세하는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 너무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긍정의 힘이 필요할 때 같았다. 주둔지 내에 순찰을 도는 병력들이나 헌터들의 표정이 제법 어두워보여서 세하는 더 이상 안 좋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스터 말대로 너무 어렵게 생각할 건 없어요.
그렇게 레이린마저 자신의 막사로 가자 루이제가 말했다.
“너 진짜 레이린을 싫어하는 구나.”
세하는 레이린이 사라지기 무섭게 말하는 루이제를 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루이제는 정색했다.
-그녀의 불안한 상태를 볼 때 제가 말을 걸지 않는 편이 낫다고 봐서입니다. 아무래도 개별 개체가 된 엑펠트로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헤러커는 재수 없긴 해도 뭔가 관찰하는 분위기였고 그레이스는 아예 나한테 조언을 했었지. 내가 앞서 말 한대로 각 차원을 담당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알고서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거겠지.”
세하는 그렇게 말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슈트 차람이 아니고 단순히 전투복 차림이라서 일반 헌터와 별 차이가 없어보여서 루이제는 그 점을 지적했다.
-지금 그런 상태로 어디로 가시는 거죠? 아.......
루이제는 그제야 뭔가를 감지해내고 반응했다.
“그래. 너도 느꼈지? 시간이 지날수록 사이킥 에너지의 주체로서 내 감각이 앞서는 거 같군.”
세하는 진즉에 사이킥 에너지의 반응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태연한 걸음을 연기하고 있었다. 사이킥커로서 능력도 발휘되어서 이미 주변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조차 흐리게 만들어서 별 의심 받지 않고 주둔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너도 왔군.”
세하가 주둔지를 벗어난 지 5분 여. 제법 빠른 걸음인지라 벌써부터 산악 지역의 초입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걸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느와르레이드 슈트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레이스 녀석. 너한테 꽤 빠진 거 같더군.”
이번에는 과하지 않게 세하 정도의 신장으로 헤러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 세하는 의아해서 물었다.
“그래서 질투라도 나는 모양이지? 이번에는 적당한 크기로 나타났군.”
“나도 싸우러 온 건 아니라서 말이야.”
느긋해 보이는 헤러커의 반응이 세하의 생각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이놈도 여기 담당이 아니군.’
헌터 협회나 제너럴 마이트 등등에서 파악된 헤러커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하는 더욱 힘을 얻고 말했다.
“너도 할 일 되게 없는 모양이군. 아니면 이곳의 상황이 그 쪽에서 보기에 중요한 모양이지?”
“틀린 말은 아니군. ‘우리’는 지금 지구의 상황을 무척 흥미롭게 보고 있어. 다른 차원들은 케나아찰을 제외하고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중이니까. 하지만 이번 침공이 성공한다면 무게추가 단박에 뒤집어 질 수 있으니까.”
헤러커도 그 말을 긍정했다. 거기에 세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지금 여기서 널 없애버리면 네가 담당하는 차원에서 난리가 나겠군. 안 그래?”
“그걸 뻔히 아는데 지금 이렇게 온 건 내 본체가 아니라는 이야기지.”
헤러커도 지지 않을 각오로 말했지만 세하로서는 비웃음만 짙어질 판국이었다.
“곱게 말할 때 꺼지 던지 내가 물어보는 걸 답하던지 해라. 케나아찰의 엑펠트는 어떤 녀석이지?”
세하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헤러커가 드래곤의 얼굴로도 꽤나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러지? 대답해 줄 용의는 있는 거냐?”
“음... 사실 이 녀석은 나나 그레이스. 그 외에 존재들로서도 골치라고 할 수 있다.”
헤러커는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 중 가장 지지를 받고 있다. 그만치 현재 엑펠트의 역량이 총동원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거다.”
“그래봐야 겁 안 먹어. 그레이스의 말에 의하면 케나아찰의 특성이 강하다며? 너처럼 도망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잡아내긴 쉽겠지. 하여간 살아있는 것들의 감정을 집어먹고 개별 개체가 되니까 인간처럼 자신들만의 입장만 생각하는 것 같네. 추하구나.”
세하는 아예 헤러커를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대범하게 등을 보이는 것이 칠 테면 쳐보라는 배짱이었고 헤러커는 당연할 정도로 세하를 치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프로타 에고의 뜻은 확고하다. 너희들은 패배할 것이고 모두 하나가 될 것이다. 물론 너의 존재가 흥미롭고 주의를 끌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하를 저주하는 것처럼 그 등에다가 말했다. 하지만 세하는 계속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진짜로 이기고 싶으면 전부다 몰려와야 할 거야. 하지만 그러면 이차원에서 바로 뒤를 치려들겠지. 너희도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은데? 아무튼 이번에는 기대해볼게.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 오는 지 말이야.”
세하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고 말했고 이내 헤러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헤러커는 이를 악물더니 점점 투명해지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그 뒤로 침공 예정일까지 기분 나쁜 평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당일이 되자 주변의 흐름이 이상해졌다.
“허이구. 아주 대놓고 온다고 광고를 하는 군.”
세하가 느와르레이드 슈트 상태로 비행하며 막 게이트가 열리는 상황을 보고 있었다. 무수한 가시와 강철의 느낌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형태 또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역시 한 번 균열로서 작용한 곳이다 보니 영향을 받게 되네요.
루이제도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는 게이트 반응을 보고 탄식하는 것 같았다. 세하가 처음 미국으로 왔을 때 봤던 호수가가 지금은 케나아찰의 침공 루트가 되는 판이었다.
게다가 하나도 아니었다. 그 주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수많은 게이트가 나타나고 있었다. 거기에 세하는 미련 없이 방향을 돌렸다.
“준비는 잘 해놨는데 과연 얼마나 막으려나.”
세하는 금세 방어선이 있는 지점에 당도했다. 물리적인 방벽 외에도 강력한 플라즈마 배리어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방어 병기들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콰앙!
안 그래도 마치 오벨리스크를 연상시키는 탑에서 강렬한 광선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뻗어간 끝에서 크나큰 폭발이 일어나며 수많은 몬스터들이 부서지며 그 파편을 흩날리고 있었다.
“빨리도 왔네.”
케나아찰 계의 몬스터임은 능히 알만했다. 하나 같이 뾰족한 가시와 금속질로 빛나는 표면을 지닌 그것들은 속된 표현으로 개미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 형태도 다양했다. 굳이 따지자면 파충류, 포유류 외에도 온갖 살아 있는 종류의 것들이 죄다 뒤섞인 꼴들이었다.
크어어어!
그리고 전형적이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괴성이 들려왔다. 거기에 방벽 너머의 병력들이 불안해했지만 세하는 그냥 귀가 살짝 먹먹해지는 정도였다.
“저 자식인가 보네.”
-사이킥 에너지 반응이 상당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루이제도 제법 진지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세하도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갑자기 벽력 같이 외치는 존재가 있었다.
‘민세하! 있느냐!’
“........”
주변 공기를 울리면서 대놓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지라 세하는 과하게 민망함을 느꼈다.
‘저 잡것이 지금 무슨 짓하는 거야?’
물론 세하가 떠 있는 밑으로 케나아찰의 수많은 몬스터들이 목숨을 도외시하며 달려들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헌터들과 군병력들이 필사의 각오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세하로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대놓고 부르네요. 엑펠트들이 마스터의 정보를 상당히 공유하는 것 같아요.
루이제도 왠지 긴장감이 떨어져서 말했다. 세하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게. 그레이스는 일단 겉모습은 예쁘기라도 하지 저 놈은 구제불능의 괴물거북이 꼴이네.”
세하의 말대로 멀리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거대한 존재가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산맥 같은 가시와 금속질의 등껍질을 단 상태의 4족 보행형 괴물체였는데 그 목과 머리는 긴 드래곤 같아보였다.
‘굳이 따지자면 메탈릭 드래곤에 거북이를 섞어 놓은 꼴이군. 왜 이렇게 우습게 보이지?’
물론 그 존재, 파베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지상의 병력은 드래곤 피어에라도 걸린 것 마냥 턱턱 숨이 막히며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대로 방치했다간 전체 방어선의 문제가 될 수 있는지라 세하는 최대한 슈트의 외부 볼륨을 높이고 외쳤다.
“이 용봉탕 끓여먹을 X 만한 자라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