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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화 〉각각의 자아 (53/72)



〈 53화 〉각각의 자아

세하는 잠시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마스터!


그리고 루이제가 외치고 나서야 차분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엑펠트 주제에 너무 고상하게 나오는데?”
“그런가요? 하지만 초면에 건방지게 굴어서 좋은 건 없겠지요?”

분명 에너지체로 보이는 흰빛에 둘러싸여 있긴 했지만 눈앞의 엑펠트 개체는 무척 아름다웠다. 많이 쓰이는 표현으로 자애로운 천사 같았다.
하지만 전신을 실전적인 갑옷으로 감싸고 있었고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다. 금발벽안. 전형적인 천사의 이미지에 전투적인 장비가 어우러진 모습이라 할  했다.


“제 이름은 그레이스라고 해요. 눈치는 채셨겠지만 엑펠트지요.”

자신을 그레이스라 밝힌 엑펠트가 고요한 신색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헤러커 때도 그렇고 엑펠트가 이렇게 개별적인 개체와 의사를 지나고 나타나는 꼴이 반갑지는 않은데?”

세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자 그레이스가 쓴 웃음을 지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에요. 우리 엑펠트는 항상 전체를 중요시했고 그 전체로서 다른 것을 뒤덮고 정복하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서서히 변해가고 있네요. 바로 당신 때문이에요. 민세하.”
“.......”

자신을 똑바로 지목하는  때문에 세하는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세하는 절대 질 생각이 없었다.


“말은 잘하는 군. 어디 영향을 받은 거지? 그 꼴로 봐서는 파흐트  같은데?”
“맞아요. 헤러커와도 안면이 있어요. 그 남자는 아무래도 다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각 차원의 특징을 다 지녔더군요.  개체별로 생각이 다르니 이해는 해요. 하지만 저는 제가 원하고 마음에 드는 것만 얻었지요.”

아무 것도 없이 가만히 공중에 떠 있던 그레이스의 등 뒤에 찬연한 빛의 날개 한 쌍이 펼쳐졌다.


“이제 말로만 하는 건 지쳤지요? 당신도  같은 엑펠트를 보면 참지 못할 것 같으니 한 번 덤벼보세요.”
“사양하지 않지.”


콰쾅!


답하기 무섭게 세하가 양 팔로 사이킥 캐논을 날렸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앞에서 날카로운 빛의 파장이 일어나며 막아냈다. 그러자 세하는 더욱 가속해서 그레이스의 주변을 돌면서 계속해서 사이킥 캐논을 연사했다.


콰쾅! 콰콰쾅!

적지 않은 정신파 폭발과 충격이 사방을 덮쳤지만 세하는 계속해서 보이는 빛의 파장을 보고서 안심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전방에서 날카로운 섬광이 찔러 들어왔다.


카캉!

“역시 쉽지 않으시네요.”

어느새 들고 있던 빛을 창을 뻗은 자세 그대로 그레이스가 감탄하고 있었다. 물론 세하는 양 손을 사이킥 블레이드로 전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쉬웠으면 진즉에 죽었지.”

그리고  존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검격과 창격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로 인한 빛의 파편이 사방에 흩날렸고 그 여파로  밑의 숲과 얼어붙은 호숫가가 영향을 받아서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흐트 계의 특성만으로도 강한 편이죠?”

연속해서 창을 찔러 오며 그레이스가 물었다. 허공을 유영하며 격한 움직임을 펼치면서도 호흡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건 인정해야겠네.”


세하도 마찬가지로 그 창격을 받아냈고 다시 충격으로 빛의 파편이 튀는 찰나에 블레이드를 순식간에 해제하고 그대로 캐논으로 바꿔서 쏘아냈다.

“!?”


파콰콰쾅!


세하의 순간적인 기지로 그레이스는 그대로 폭발에 휘말렸다. 그럼에도 세하는 방심하지 않고 뒤로 거리를 벌렸고  어깨에 강렬한 전격을 퍼붓는 블릿츠 캐논을 준비했다.


파치치칙!


파괴의 현상이 어느 정도 걷히고 그레이스의 실루엣이 보이기 무섭게 다시금 뇌격의 폭풍이 그 위로 작열했다. 하지만 그렇게 포격을 쏘아내고도 세하는 재빨리 양 손에 사이킥 블레이드를 생성하며 뒤로 휘둘렀다.


카캉!

“역시 안 속네요.”

어느새 세하의 뒤에서 빛의 창을 찔러오던 그레이스가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 빛의 날개에서 마치 화살 같은 기운들을 마구 쏘아냈다.

“확실하지 않은  싫어해서 말이지.”

세하도 무심하게 말하며 사이킥 블레이드를 휘두르며 날아드는 빛의 화살들을 모조리 쳤다. 그러자 그레이스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만 싸워 봐도 당신의 강함이 짐작이 가네요. 이대로 계속 싸운다면 어느 한 쪽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네요.”
“지금  될 거 같으니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거냐?”


세하는 비아냥거렸지만 루이제의 조언은 달랐다.

-마스터. 쉽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세하가 생각하기에도 그레이스는 단일 차원의 특징만 흡수했음에도 확실히 강했다. 심적으로는 신중함을 생각해도 밖으로 나오는 말은 타고난 반발심 때문에 격했다.


“엑펠트도  됐군. 너희들이 양식으로 생각하던 인간처럼 행동하고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하지만 이렇게  것은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에요.”


그레이스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하가 놀랄 정도였다.


“어느 한 존재에 의해서 엑펠트의 대대적인 침공이 막혔죠. 그래서 엑펠트는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존재가 세하를 뜻하는 걸 알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세하가 잠잠해지자 말을 이었다.


“물론 부작용이 있죠. 이렇게 개별적 존재가 된 개체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저도  전에는 엑펠트 군체의 일원으로서 오로지 파흐트 계의 생명들을 흡수하고 힘을 늘릴 생각만 했었죠. 하지만 그 존재감이 커져서 단일 개체로 분리되면서 달라졌어요.”

어찌 들으면 레이린 리와도 비슷한 상황 같았다. 하지만 뒤이은 말에서 세하는 그레이스가 결국은 엑펠트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전체 군체의 본질적인 기조는 무시할  없어요.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흡수하고 지배하는 일이죠.”
“그래야 엑펠트겠지. 이제 할 말 다했냐?”

그래서 세하는 다시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돌연 빛의 창을 없애버리더니 갑옷도 해제해버렸다. 그러자 흰색의 법의 같은 옷차림만 남았다.

“본래 있는 기조는 무시할  없지만 저는 민세하. 당신을 만나고 나니 생각을 좀 더 해봐야  것 같아요. 이런 번민 또한 허용하는 걸 보면 전체 군체의 생각도 저의 행동을 용인하는  같거든요.”


세하로서는 이런 그레이스의 행동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엑펠트에 대한 증오 못지않게 그 존재들에 대한 이해를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나와 루이제가 이렇게 된 것은 엑펠트와 엮인 탓이니까 말이지.’
“아무튼 제가 오늘 온 것은 단순히 당신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어요. 역시 헤러커가 말한 대로 당신은 특이하고 관심이 가는 존재에요. 그러니  가지 충고할게요. 머지않아 있을 침공은 쉽지 않을 거예요. 그곳의 개별 개체는 저와 같은 식으로 힘을 얻었지만 생각은 전혀 다르거든요.”

세하의 생각이 어떤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레이스는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에 세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전혀 다르다고?”
“네.  차원의 힘만을 파고들었지만 그 생각은 달라요. 자신의 방식만이 옳고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싸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이죠. 그래서 현재 전체 군체에게 가장 지지를 받고 있는 개체이기도 해요.”


거기까지만 들어도 이번에 케나아찰 계를 통해 침공할 엑펠트가 상당한 개체라는 것이 짐작이 갔다. 그 말에 세하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친절하시군.”
“지금  표정이 안 보이니 아쉽네요. 하지만 저는 정말로 친절을 베푸는 거랍니다. 결국 당신과는 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쉽지만 오늘 저는 여기까지네요.”


서서히 그레이스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평온할 때 뵐  있기를 바라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그레이스는 사라졌다. 뒤에 남은 것은 고요한 밤하늘의 풍경뿐이었다.

-잘 참으셨어요. 마스터. 평소의 마스터라면 끝장을 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렇게 그레이스가 물러가자 루이제가 말했다. 거기에 세하는 헬멧을 해제하고 얼굴을 드러냈다.

“사실 인사차 온 것도 보였고 정보를 좀 캐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  성질대로 때려 부순다고 될 것도 아니고.”


세하는 차가운 공기를 흡입했다. 저절로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에 미소마저 지었다.


“이용할 것은 이용하자는 생각뿐이야.”




*
그레이스가 지금 있는 공간은 오로지 빛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곳에서 유영하듯 떠 있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계속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역시 이상해.”


그녀가 눈을 떴다. 그때 눈앞에서 공간의 일그러짐이 일어나더니 드래곤의 머리를 지닌 인간형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어. 그레이스. 결국 민세하를 만난 건가?”


그런 헤러커의 모습을 보고서 그레이스의 두 눈썹이 곱지 않은 모양으로 변했다.

“좀 더 예의를 차리셨어야 했어요. 당신 덕분에 저도  적대적인 인상을 받았으니까요.”

그레이스가 불만스레 말하자 헤러커가 웃었다.

“그래? 그래도 많이 참았군. 우리 엑펠트에 대해서 한없는 증오만 보일 줄 알았는데 적절한 시점에서 제어를 하는 군 그래.”
“그 정도로 그는 냉정해요. 우리에 대한 증오로 온몸을 태울 것 같아도 무엇이 우선인지 아는 존재죠.”

그레이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세하에 대해 떠올리는 게 두려운지 갑자기 몸을 떨었다.


“뭐 이번에 기회가 주어진 건 파베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파베......”

그레이스는 언급된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래. 파베. 개별화 된 개체 중에서 가장 말이 안 통할 녀석이지. 그리고 가장 성과가 좋은 녀석이랄까.”

헤러커는 그 이름을 말하면서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얼굴에 스쳤다.


“하여간 ‘프로타 에고’는 무슨 생각들인지 모르겠군. 각자 자율권을 주면서 말이야.”
“우리 처지를 잊은 건 아니겠죠? 아무리 각자 달라도 결국 우리는 엑펠트에요. 지금 주어진 짧은 유예를 소중히 여기시는 편이 좋아요. 언제고 프로타 에고가 우리를 흡수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레이스는 자신들의 입지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여기에 있었군.’


그때 공간을 울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마치 쇠를 긁어내는 것 같은 거북한 음색이라서 그레이스는 아미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파베? 당신이 여긴 무슨 일이죠?”

그레이스가 불쾌감을 드러내 물었지만 이내 공간의 한 구석이 과하게 무너지며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케나아찰 계에 존재하는 생명의 집약체 같았다. 수 없이 뻗어 오른 금속질의 가시들 하나하나가 궁극의 무구처럼 빛나고 있었고 그것을 등껍질처럼 짊어진 4족 보행의 존재가 그레이스와 헤러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북이 같다는  안 들었어?”

헤러커는 그 압도적인 모습에도 주눅 들지 않고 물었다. 거기에  존재. 파베는 콧김을 살짝 내뿜으며 말했다.


‘다른 존재가 나를 뭐로 보든 상관없지. 왜냐하면 그 존재는 나를 만나는 순간 죽은 목숨일 테니까.’


자칫 광오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공간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파베의 위압감은 그걸 실현할 증거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조용하게 한마디 했다.


“하지만 여기는 제 공간입니다. 괜히 우월감을 드러내지 마세요.”
‘실례했군. 하지만 나는 큰일을 앞두고 있어서 말이지. 안 그래도 프로타 에고가 너희들에게 협조를 구하라고 했다.’
“.......”


 그래도 헤러커와 함께 프로타 에고에 대해서 말했던 그레이스로서는 움찔할 말이었다.


“협조라고 하셨나요?”
‘그래 협조다. 물론 각자 자율권이 보장된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몫이지. 그러니 미리 말해두지. 나를 도울 거면 도와도 좋다. 하지만 방해된다면 없으니 만 못하다. 경우에 따라서 내가 융합시켜버릴 수도 있다.’


이어진 파베의 선언에 그레이스와 헤러커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헤러커가 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마치 드래곤 같은 목과 머리를 지닌 파베는 그 긴 목을 늘려서 높은 위치에서 헤러커와 그레이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협박이라니. 나는 순수한 협조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없는 협조는 화를 부르는 법이지. 안 그래도 오늘 민세하를 만나지 않았나? 그레이스.’
“그래요. 개인적인... 아니  자의적인 흥미로 먼저 만나봤어요.”


그레이스는 못이긴 척 시인했다. 그러자 파베의 얼굴이 그레이스의 눈앞에 오며 말했다.

‘그것이 흥미에 그치길 바란다. 그 자의적인 생각이 나를 방해하는 쪽으로 이어지면 곤란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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