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전환점
세하는 눈앞이 뒤흔들리고 정말로 빛이 번쩍번쩍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몸 자체가 세차게 어디론가 날아가 떨어지는 타격을 받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제에에에엔자아앙!”
너무 아파서 저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전신의 감각이 제대로 살아있는 걸로 보아 어디 사지육신이 떨어져 나간 건 아니라서 통증을 참고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마스터. 살아계십니까?
그리고 느긋한 루이제의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에 세하는 욕이 나오려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야, 이거?”
-뭐긴요. 엘리미네이터 아머의 기능 중 하나인 자폭이지요.
루이제는 가볍게 말했지만 그 여파는 가볍지 않았다. 마치 어느 고대 신화에서 화살 하나로 나라간의 국경을 그려낸 것 마냥 광대하고도 드넓은 파괴의 상흔이 대지에 그려져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짓은요. 파괴 행각이죠. 설마 그 정도로 응축된 엑펠트 군체를 처리하는데 적당히 할 것 같았나요?
루이제의 이어진 태평한 말에 세하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관뒀다.
“헤러커는?”
-운 좋게도 도망쳤어요. 기록 영상 있는데 보실래요?
루이제의 제안에 세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보긴 싫다. 아무튼 해결된 거니까.”
세하는 그렇게 무겁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린시지오군이 다가오더니 우렁찬 함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
어떤 면에서는 광란의 밤이었다. 갑자기 수많은 짐승을 사냥해서 통째로 불에 구워버리고 그 피를 뽑아내 마시더니 자기들끼리 칼부림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 린시지오군의 모습에 세하는 그냥 그들의 문화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고맙네. 이로서 우리 세계의 수복 가능성이 생겼어.”
린시지오의 왕인 인테르프 6세는 세하를 치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세하의 표정이 구겨지고 말았다.
“수복의 가능성? 여기서 엑펠트의 뿌리를 뽑은 게 아닙니까?”
“그렇게 한 번의 싸움으로 끝나면 모든 게 편하겠지. 하지만 그대가 나서서 엑펠트군의 주력을 꺾어버려서 우리는 재정비할 시간을 번 것이라네.”
“........”
인테르프의 말인즉 지금까지 맞붙을 상황이 안 된 건데 이제야 붙어볼만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대의 공이 크다오. 우리 린시지오는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이제 정상적인 팔로 돌아온 체펠카가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봤자 지구에서 일이 생긴다고 도와줄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세하는 아직 상황이 멀었다는 아쉬움에 투덜거렸다. 하지만 체펠카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대를 기억한다오. 나중에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오.”
여전히 주둔지 내는 난리였다. 소리만 듣는다면 무슨 적이 야습이라도 해온 것 같았지만 자기들끼리 치고받는 소리며 내일 아침이 되면 전부 회복이 된다는 무서운 소리까지 하고 있었다.
“그게 왕의 권능이지요. 저들은 왕의 신민이자 검이며 린시지오는 왕의 힘과 피의 의미로서 존재합니다. 그 틈 세를 엑펠트가 끼어들어서 지금이 환난이 생긴 셈이지요.”
그런 가운데 체펠카가 넉살도 좋게 설명하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 밤 목이 달아난 병사라도 내일 아침이면 멀쩡해진다오.”
“.......”
세하는 린시지오군에 대해서 정말로 더 이상 생각하기를 관둬야 했다. 그런데 받아든 술잔 안에 찰랑거리는 액체를 보니 마치 피처럼 붉었다.
“에라이.”
세하는 그걸 그냥 목안으로 털어 넘겨버렸다. 뭔가 화끈하면서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말 그대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
“민.세.하!”
그렇게 린시지오의 일을 마무리 짓고 게이트를 통해 돌아오자 라설연이 마치 처녀 귀신 같은 낯짝으로 외치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주변을 돌아보니 군병력에 상위급 헌터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풍경은 앞서 유주리와 함께 있던 곳이었는데 유주리 본인은 세하를 보더니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주리가 얼마나 고생 했는지 알아?”
오랜만에 본 라설연은 아주 세하를 박살낼 기세로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린시지오에서 있었던 일로 깊은 피로감을 느낀 세하는 아주 살벌하게 라설연을 노려보았다.
“아......”
“걱정한 건 알겠는데 내가 일이 많아서 피곤하다. 그러니 이야기는 나중에 듣지.”
세하는 그렇게 라설연을 침묵시키고 슈트에 내장된 단말기로 어딘가 통신을 걸었다.
“협회장님. 민세하입니다.”
“오! 귀환한 건가? 게이트 캐스터가 굉장히 위험한 게이트가 감지된다며 경고했었는데 민세하 헌터였군.”
통신 회선 너머 협회장 류한호가 무척 놀란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조금 복잡합니다. 아무튼 바로 협회로 갈 테니까 긴급회의 자격이 있는 인원들을 추려서 회의 주재를 부탁드립니다.”
“알겠네. 그럼 곧 있다가 봅세.”
그렇게 류한호와 통신을 마치고 세하가 라설연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라설연은 움찔해서 말했다.
“왜... 왜 그래?”
“내가 없는 동안 고생한 건 알겠는데 내가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지?”
“1주일 지났어.”
라설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자 세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많이 안 지났네.”
“사람이 갑자기 뭔가에 잡아먹혀 사라지더니 1주일 만에 나타나 놓고 할 소리야?”
라설연은 황당해서 물었지만 세하는 이내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협회 본부에서 보자. S급 헌터라면 당연히 알 정보들이니까.”
“뭐?”
라설연이 놀라는 사이 세하는 금세 헬멧을 장착하더니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오늘따라 별빛이 밝다는 생각에 세하는 괜히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냥 쉬고 싶은데 더 떠들어야 할 판이군.’
*
대한민국 헌터협회 본부의 한 회의실. 늦은 시간에도 자리를 체운 이들은 하나 같이 세하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슈트를 통해 보이는 영상 자료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일단 린시지오 계는 이제야 엑펠트와 맞서 싸울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왕인 인테르프 6세는 그 여파로 엑펠트 측이 이쪽으로 게이트를 열기가 힘들어질 거라고 전망했습니다.”
세하는 린시지오 계에서 있었던 설명했고 이처럼 마무리했다. 그럼에도 모인 이들은 하나 같이 심각한 표정으로 세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3개의 차원이 여전히 게이트를 열고 몬스터들을 보낼 수 있다는 거로군요.”
봉황 길드 소속의 S급 헌터 김진후가 못 마땅한 표정으로 발언했다. 하지만 세하는 주눅 들지 않고 답했다.
“4개 차원이었는데 3개로 줄어든 거죠. 그나마 린시지오 계에서 넘어오는 것들은 감염의 가능성도 커서 골치였는데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이니 상황이 호전됐다고 봅니다.”
세하의 답변에 다시 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하는 당장 이딴 회의는 집에 치우고 집에 가서 잠들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계속 질문이 이어져서 세하는 성심껏 답해야 했다.
‘무슨 청문회냐?’
슬슬 세하의 시선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질문자들도 거기에 눌리기 시작했고 시작된 회의는 2시간 여 만에 파장되었다.
“수고했네. 오늘은 푹 쉬게.”
마지막에 류한호가 세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지만 세하는 뭔가를 떠올리고 표정이 다시 일그러지고 말았다.
“왜... 왜 그러나?”
무성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헌터였던 류한호 조차 그런 세하의 기세에 눌릴 정도였다. 하지만 세하는 금세 미소 지으며 답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레이린을 안 보고 갈 수는 없지요.”
“그렇군. 알겠네.”
류한호도 그 마음을 짐작하고 회의장을 나섰다. 그러자 세하는 잠시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더니 심호흡을 하고 자신도 걸음을 옮겨야 했다.
*
“죄송해요, 오늘 피곤하실 텐데.”
지하의 연구공간에서 만난 레이린은 세하를 마주하기 무섭게 사과부터 했다. 하지만 세하는 개의치 않고 바로 소파에 몸을 던져버렸다.
“엑펠트에 관련된 일인데 널 안 볼 순 없지. 게다라 알페렌하고 회선 연결되지?”
협회에 오기 전에 레이린과 통신으로 사전에 논의한 것인지라 문제는 없었다. 레이린이 허공에 손짓을 하자 바로 가상화면이 생기며 그대로 통신이 연결되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민세하 헌터님.”
음성으로만 연결된 터라 알페렌 중 대표자격인 중년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어. 다만 린시지오 측이 그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지. 그나저나 그 쪽은 헤러커에 대해서 알아봤어?”
아무래도 엑펠트 군체 중에 확실한 아군이라선지 세하는 헤러커에 대한 정보 분석을 알페렌에게 부탁한 상태였다. 그러자 알페렌은 곤란한 듯이 말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민세하 헌터님이 게이트로 들어간 지 오늘이 1주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헤러커는 그 중간에도 남미 쪽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조용히 있어서 우리 측의 요원들을 의아하게 만들 정도였지요.”
시간의 관념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세하는 헤러커의 신출귀몰함에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페렌의 설명은 계속 되고 있었다.
“일단 헤러커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해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자기 내키는 대로 나타나서 게이트가 열린 곳에 융합체를 풀어놓기도 했지만 말이죠.”
“골 때리는 놈이네.”
정말 골이 아팠다. 린시지오 계에서 그 거대한 엑펠트 군체를 처리할 때도 헤러커는 잘 도 몸을 빼내고 말았다. 계속해서 세하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 것 같았다.
“엑펠트가 그렇게 개별 개체로서 개성을 지닌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레이린 리 씨의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 자는 4개 차원의 특징을 지니고 스스로 육체를 만들고 힘을 쓰니 말이죠.”
“혹시 헤러커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존재를 본 적 있나?”
세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질문했다.
“글쎄... 그런 놈이 더 있다면 우리가 지금 태평하게 말하고 있을 때는 아니겠지.”
어느새 알페렌의 음성이 맑은 소년의 것으로 바뀌었다.
“엑펠트 자체가 거대하게 세계를 장악하려 드는 특징을 지녔지. 합쳐야 강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지. 물론 네가 돌아다니면서 본 마커나 몇몇 개체들은 이상하긴 했어. 분명 단말로 연결되어서 서로를 지원하거나 영향이 있었을 텐데 그런 일이 거의 없었지. 너의 전생으로 인해서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나 검토 중이야.”
“그런가?”
세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헤러커를 만나서 눈으로 확인하고 오늘 알페렌과 대화하면서 그 불안이 현실로 닥치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머리만 아파오는 군.”
세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거기에 동감하며 알페렌도 한숨을 내쉬었다.
“기존에 알던 것과 달라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니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오늘 린시지오 계가 엑펠트와 싸울 수 있게 된 건 굉장히 긍정적이라고 보고 싶어. 느리지만 하나씩 걸음하는 걸로 생각하자고.”
그렇게 알페렌과의 통신도 끊겼다. 그 후 정적에 세하가 잠시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레이린이 물었다.
“저기 민세하 헌터님?”
“왜 그러지?”
“뭐랄까 헌터님의 능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것 같아요. 사이킥 에너지 자체가 엑펠트에게 독으로 작용하잖아요. 이번 전투 때도 마찬가지고요.”
세하가 알페렌과 대화하는 사이에 레이린은 세하가 넘긴 영상자료를 분석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린시지오 계에서 막 엘리미네이터 아머를 자폭시켜서 엑펠트 군체를 날려버리는 광경이 가상화면으로 재생되고 있어서 세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이할 수밖에 없어요. 원래 전생 때는 저런 슈트들이 무기물로 이루어진 것들이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헌터님의 사이킥 에너지로 모든 것이 형상화되고 힘을 발휘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헌터님의 사이킥 에너지와 그 당시 전장에 몰려들었던 엑펠트 군체들이 연관되었다고 밖에 볼 수가 없네요.”
레이린은 거기까지 말하고 말 것 같았다. 더 이상 세하에게 질문하지 않았고 영상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하지?’
세하는 불안했다. 아무래도 협회에서도 주로 엑펠트에 대한 정보 분석과 연구를 하다 보니 레이린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도 제법 심도 있는 파악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마스터.
그때 루이제가 입을 열었다. 세하로서는 마치 천둥이 머릿속에서 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이 벌어졌다. 세하의 옆에서 루이제가 아예 모습을 드러내 버렸고 딱 시선을 돌리던 레이린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