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회심의 수
파카카캉!
양측의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헤러커의 대검은 순식간에 베어져나갔고 그 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던 거인 융합체들도 모조리 썰려나가며 아비규환이 연출되고 있었다.
퓨화화확!
그렇게 거리가 벌어지기 무섭게 세하는 다시 사이킥 캐논을 전개해서 사방에 쏘아댔다. 정신에 가까운 사이킥 에너지로 발현이 되다보니 오히려 자신에게 여파는 거의 없었고 오로지 그 적대되는 대상에게만 피해가 가는 판이니 반칙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크으으윽......”
헤러커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고 물러서고 있었다. 마침 엑펠트군의 중앙 지점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세하는 이를 쫓으면서 계속 포격을 가해나갔다.
‘이 정도면 별 문제 없겠군.’
세하는 그 사이 헬멧의 디스플레이를 통해 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세하의 활약으로 엑펠트군의 중앙이 완전히 분단이 돼서 혼란에 빠졌고 린시지오군이 좌우 측면에서 계속 공세를 가하는 통에 전황은 상당히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크오오오!
하지만 그 여파인지 처절한 포효가 들려왔다. 세하가 눈을 들어보니 갑자기 융합체들이 사정없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스터. 강대한 사이킥 반응입니다.
그리고 루이제가 경고했다. 하지만 세하는 투덜거리기 바빴다.
“무슨 진공청소기도 아니고. 꽤나 급하긴 한 모양이군.”
그러면서 세하는 멀찍이 공중에 떠 있는 헤러커를 바라보았다. 헤러커는 지상의 상황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제법 신경을 쓴 티가 역력해보였다.
“어이. 저거 너네 편 아니냐?”
그래서 세하가 물었지만 헤러커는 용인의 얼굴임에도 제법 굳은 표정이 확연해 보일 정도였다. 아무튼 린시지오군과 막 맞붙던 융합체들마저 빨려 들어간지라 린시지오군은 제법 황망해하면서도 급히 태세를 정비해 후방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렇게 해주는 게 좋지. 어디 보자.”
이제 디스플레이에서 격할 정도의 반응 경보가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동양의 용처럼 보였다. 하지만 점점 커지면서 그 머리와 목들이 더 늘어났고 이내 7개까지 늘어났다. 게다가 그 몸통이라 할 만한 거대한 핏빛의 기류는 마치 커다란 호수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묵시록의 붉은 용에다가 무슨 네스 호 전설이 짬뽕된 거냐?”
세하는 그 광경에 아는 전설이나 크립티드 설정을 끼워 맞추며 평했다.
-조악한 표현이네요.
루이제는 간단하게 일축했다. 하지만 세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맞다고. 그 정도로 위험하다는 뜻이지. 그나저나 저 자식은 어쩐다?”
세하는 지금 디스플레이에 엘리미네이터 아머의 지속시간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 통상적인 전투는 가능한 수치지만 아무래도 강대한 엑펠트가 2개체나 존재한다는 게 신경 쓰였다.
그렇게 세하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헤러커는 빛의 날개를 펼쳐 문제의 엑펠트 군체에게 다가갔다.
“이건 또 뭐야? 아무리 우리 동족이 섞는 걸 좋아한다지만 이건 센스가 과한 걸?”
‘헤러커? 네 놈이 여긴 왜 온 거냐?’
붉은 용의 머리들이 하나처럼 외쳤다. 거기에 헤러커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서 와봤지.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마음과 몸을 하나로 뭉쳐서 민세하를 죽일 건가?”
헤러커는 처음에 얼굴이 굳은 것과는 다르게 제법 능글맞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군인 엑펠트의 군체는 격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닥쳐라! 네놈처럼 자기만 아는 것이 무슨 동족이라고!’
7개의 머리가 일제히 외치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세하는 서서히 사이킥 캐논을 예열하기 시작했다.
“역시 둘 다 치는 게 좋겠지?”
-동감합니다.
루이제도 별 이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헤러커와 엑펠트의 군체가 다투는 사이 세하는 그대로 사이킥 캐논 6문을 다시금 풀 버스트로 발사했다.
파콰콰쾅!
‘키아아아!’
드넓은 신체를 자랑하는 엑펠트의 군체는 그대로 거기에 휩쓸렸다. 헤러커도 거기에 몸을 피하긴 했지만 이미 하반신이 휩쓸려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제길... 민세하 이 놈........”
헤러커 또한 세하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하는 그런 헤러커를 쳐다보지도 않고 한창 몰아친 사이킥 에너지에 불타고 있는 엑펠트의 군체를 향해 뛰고 있었다.
“저 미친 놈.......”
그 광경에 헤러커는 놀라서 공중에서 멈추고 말았고 세하는 그대로 엑펠트의 군체 앞까지 다다렀다.
‘이 저열한 존재가!’
7개나 되는 용의 머리가 일제히 입에서 화염의 브레스를 뿜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하는 어렵지 않게 피하며 사이킥 캐논으로 엑펠트 군체에게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키아아악!
세하의 포격이 가해진 곳에 핏빛의 기류가 흩어지며 바직거리는 에너지의 흐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조차도 점차 말라가는 것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민세하!”
참다 못 한 헤러커가 요격에 나섰지만 그의 공격은 오히려 엑펠트 군체의 커다란 몸체에 가해질 지경이었다. 세하가 엑펠트 군체의 몸을 방패삼아 헤러커의 공격을 피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나도 뭐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렇게 날뛰면서도 세하는 자신의 행동이 정상이 아님을 자각했다.
-미친 짓이죠. 하지만 마스터이니 가능한 방법 같네요.
사실 엑펠트나 융합체와 근접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오염이 일어나서 그들의 일부가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무런 힘이 없는 일반인들이라면 100 프로였고 뛰어난 사이킥커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게. 난 보통 미친놈이어야지 말이야.”
오로지 엑펠트에 대한 증오로 인해 전생까지 한 세하로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력한 원동력이 돼서 그 적인 엑펠트의 육체를 파괴할 뿐이었다.
-아무튼 엑펠트 군체에 유효한 타격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헤러커도 아군이 피해를 입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군요. 하지만 문제는 엘리미네이터 아머의 지속시간입니다. 1분가량 남았을 때 제가 알림을 드리겠습니다. 우선은 공격에 집중해주세요.
루이제의 이어진 조언에 따라 세하는 눈앞에 보이는 엑펠트 군체의 몸체를 계속 사이킥 캐논으로 쏘고 때에 다라 블레이드로 전환하며 베어나갔다. 그럴 때마다 엑펠트의 에너지체가 흩어지고 말라가며 사라지고 있었다.
크오오오!
더 이상 당하는 것에 엑펠트 군체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앞서처럼 세하의 엘리미네이터 아머 만 한 거인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조차도 세하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오히려 잘됐다 싶어서 하나씩 잡아내는 통에 엑펠트 군체는 마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이 등신아! 차라리 잡아먹어버려!”
외각에서 빙빙 돌던 헤러커가 결국 못 참고 외쳤다. 그러자 엑펠트 군체가 처절할 정도로 답했다.
‘그게 쉬울 것 같으면 이렇겠냐! 이 놈 자체가 우리에게는 지독한 독소나 마찬가지다! 닿는 것 자체가 우리 존재 자체가 무너지는 거라고! 네 놈이 해봐라!’
“........”
헤러커는 아군인 엑펠트 군체가 저렇게 말하는 통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엑펠트 군체가 만들어낸 융합체들은 죄다 세하에게 썰려나가거나 포격에 맞아 박살이 나며 엑펠트 군체가 약해지는 빌미를 낳고 있었다.
“방법이 없군.”
헤러커는 이를 악물더니 다시 외쳤다.
“좋다! 그럼 내가 저 놈을 붙잡을 테니 그 때 네 녀석들이 공격해라!”
헤러커는 그렇게 외치고는 하강하여 엑펠트 군체의 넘실거리는 몸체 속으로 뛰어들었다.
“왔군.”
세하는 헤러커가 접근하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막 거인 융합체 하나를 세로로 베어버리고 그 뒤로 뛰었다. 그러자 헤러커의 강습에 주변에 충격파가 일어나며 바다 같은 엑펠트 군체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겨버렸다.
크아아아!
그 덕분에 엑펠트 군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헤러커는 그걸 BGM 삼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냥 놔뒀다간 네 놈에게 말라죽을 것 같아서 내가 나선다.”
“그래? 사이가 안 좋아 보이던데 그런 의리는 있어?”
세하는 그런 헤러커를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엘리미네이터 아머 상태가 아니라면 그 표정을 보고서 헤러커가 광분하게 달려들 정도로 진한 비웃음인지라 루이제가 한 마디 했다.
-마스터. 아머 게이지를 체크하세요.
세하가 디스플레이를 살짝 곁눈질 해보니 잔여 시간이 5분 정도 남아 있었다. 재차 루이제의 조언이 이어졌다.
-그동안 마스터가 충분히 사이킥 에너지를 키워오셨기에 가능한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1분 정도 남았을 때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죠.
“그때까지 잘 버티라 이거군!”
세하는 그렇게 말하면서 막 눈앞에 일어나는 빛의 검날을 사이킥 블레이드로 막아냈다.
크아아아!
그 사이 거인 융합체들과 그 외에 블러디 헤스나 크로브 다이노 같은 존재들이 사방에서 무수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서와 다르게 세하의 아머에 붙어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퓨화화확!
물론 라인버스터 슈트처럼 리버스 필드가 펼쳐졌기에 자잘한 개체들은 모조리 필드의 화염에 휩쓸려서 잿더미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목숨은 도외하시고 계속해서 세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카카카캉!
그리고 헤러커는 철저하게 접근전으로 세하를 몰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세하가 사이킥 캐논을 쏠 틈도 없었고 리버스 필드의 방어도 순식간에 자르고 들어올 지경인지라 오로지 사이킥 블레이드로만 막거나 공격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신났네.’
이미 루이제가 제시한 가이드가 있어서 세하는 제법 여유로웠다. 하지만 헤러커의 참격이 예리하고 이어지고 있어서 그 공격 자체를 받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했다.
크아아아!
그 사이 리버스 필드가 뚫렸는지 거인 융합체 한 개체가 그대로 세하의 아머를 붙잡았다. 물론 그러기 무섭게 팔 자체가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거인 융합체는 세하를 끌어안을 기세였다.
“큭!”
그 정도까지 돼서야 세하의 뇌리에도 극심한 고통이 일어났다. 그래서 집중이 깨진 탓인지 온갖 융합체들이 세하의 아머에 붙었고 점점 하중이 가해지며 세하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하하하하! 다수에 장사가 없는 법이지!”
그 앞에서 헤러커는 과하게 웃으며 빛의 대검을 치켜들었다. 세하는 그때 한 마디 했다.
“등신 같은 놈. 혼자서 안 되니까 결국 이런 짓거리냐? 내가 그냥 당할 것 같냐?”
“........”
순간 헤러커는 멈칫하고 말았다. 거기에 세하는 계속 고통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이죽거렸다.
“큭.... 네 놈이 저번에 찾아왔을 때...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냐? 이대로라면... 저 괴물 같은 놈들이 날 잡아먹을 판국인 걸? 너는 그래도 좋겠냐?”
“무슨 수작이냐.”
헤러커는 거기에 기가 막혀 하면서도 대검을 내리치지 못했다. 세하는 그 사이 헬멧의 바이저에 비치는 디스플레이에 집중했다.
-오염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허용치입니다. 타이머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루이제가 빠르게 상태를 체크하고 보고했다. 거기에 세하는 용기를 얻고 말했다.
“내가 아는... 엑펠트 놈들은 탐욕스럽지... 개별 개체로 떨어져 나오긴 했어도 너도 엑펠트 잖아.......? 지금 이 놈들이 날 먹으면 네 놈에게 갈 것은 없을 거다...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엑펠트의 군체들이 세하의 아머를 무거운 질량을 지닌 핏빛의 덩어리로 변해서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세하의 헬멧부분도 그대로 지면에 처박히며 시야가 가려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라!”
그런 와중에서도 세하는 외쳤다. 그러자 헤러커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런 미친 놈.......”
하지만 이미 엑펠트 군체는 융합체들을 죄다 질량을 지닌 덩어리로 만들어서 세하의 아머를 뒤덮고 눌러버렸다. 이대로 간다면 세하는 아머 채로 지금 엑펠트 군체에게 먹혀버릴 수 있었다.
‘수고했다! 이로써 하나의 우환 거리를 덜었다!’
엑펠트 군체가 승리의 선언을 했다. 하지만 헤러커는 뒷맛이 개운치 않아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뭐하는 거지? 헤러커. 저 지구인 놈의 말을 신경 쓰고 있었나? 우리 엑펠트는 여럿이지만 하나다. 그걸 잊은 건가? 아무리 단일 개체라고 하나 네 놈이.......’
엑펠트 군체가 헤러커에게 훈계를 늘어놓았지만 바로 헤러커가 끊었다.
“아니. 이놈은 진짜 미친놈이라고. 이렇게 쉽게.......”
그리고 헤러커도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강렬한 화염이 폭발하더니 그대로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