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뒤엉킨 진실 2
“야이!”
세하는 마그티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달려갔다. 하지만 프로스가 그 앞을 막으며 거칠게 짖기 시작했다.
“이런... 인테르프 폐하께서 모든 걸 말씀하셨나?”
마그티스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하지만 세하는 제법 격하게 외쳤다.
“내막을 알면서도 그딴 식으로 정보를 주냐!”
“너무 많은 걸 알면 힘들어 질 수 있으니 그랬다. 결과적으로 인테르프 폐하와 체펠카 대공을 만나고 진실을 들었으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마그티스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 옆에는 전에 보았던 기겔슈와 벨레토르 후작이 서 있었다. 벨레토르는 세하의 성난 기색에 아예 어깨가 움츠러들고 있었다.
“후우! 뭐 어쩌겠냐.”
이미 인테르프에게 설명을 들은 지라 뭔가 화를 내기도 뭐했다. 그래서 인테르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작자들은 왜 왔습니까?”
“아무래도 손이 부족하니 불렀다. 꽤 도움이 될 거다.”
인테르프 또한 포기한 것처럼 말했다. 거기에 세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
결전을 앞둔 린시지오 군의 주둔지는 예상외의 분위기였다. 세하가 이를 돌아보며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무슨 괴물들 집단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인간적이라는 게 옳았다. 물론 평균적인 신체가 과하게 강해보이긴 했지만 적어도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광신적인 열기와 강함에 대한 숭상이 지나칠 정도였다.
-마스터는 서운 하신 거죠?
루이제가 그런 세하의 마음을 알고 물었다.
“사실 이 정도면 너무 양호해서 탈인데? 인류의 역사에서 봐도 이런 시기가 없던 것도 아니고 나는 린시지오 계가 무슨 피에 취하고 살육에 미친 괴물들 인줄만 알았다고.”
이런 선입견을 심어줘 버린 마그티스에게 자연스레 원망이 들었다. 하지만 루이제는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마스터가 다른 쪽으로 잘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마그티스는 실제로 마스터를 은인으로 여기니까요.
“은인은 쥐뿔. 어?”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마그티스와 마주쳤다. 언제나 함께 하는 하얀 늑대와 프로스를 동반하긴 했지만 그도 진중에서 세하와 마주칠 줄은 몰랐는지 제법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 마그티스. 나한테 할 말 없냐?”
처음보다는 흥분이 죽어 있었지만 세하의 말에는 충분히 뼈가 들어 있었다.
“크흠.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네 상황을 생각해보니 많은 걸.......”
“그래. 나 원래 머리가 좋은 놈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도 감정이 있다 보니 서운한 감정이 없진 않네.”
마그티스가 마지못해 말하는 걸 중간에 싹뚝 끊어버리고 세하는 걸음을 옮겼다.
“엑펠트 놈들 잘 보이는 곳은 없나? 좀 부탁 좀 하자.”
그렇게 말하는 통에 마그티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프로스를 바라보았다. 프로스는 그냥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아 징글징글하다.”
그렇게 마그티스의 안내를 받아 와서 제법 솟아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보며 세하는 중얼거렸다. 상당한 거리이긴 하지만 눈대중으로도 상당수의 대군이 밀집한 광경이 보였으며 이미 슈트의 보정을 받아서 세하는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수 있으면서 왜 오자고 한 거지?”
마그티스는 그 옆에서 짐짓 볼멘 음성으로 물었다.
“그냥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말이지. 그 쪽 차원은 어때?”
“음.”
마그티스는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세하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여기 임금님이랑 대공한테 사정을 들었다. 엑펠트 놈들이 아주 기가 막히게 나타나서 대공을 홀려서 틈을 만들었다는 군.”
“그건 맞다.”
마그티스는 순순히 긍정했다. 하지만 세하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속한 세계가 멸망했다고 하지 않았냐? 이거 순 뻥쟁이네.”
“.......”
마그티스는 스스로의 실수를 자각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도드라지도록 붉어지고 말았다.
“그... 그건... 나도 마음의 정리가 필요해서.......”
“됐다. 저 늑대 녀석이랑 기겔슈라는 놈이 나올 때부터 대충 눈치는 챘어. 있던 세상이 정말 망해버렸으면 그런 여력도 없을 테니까.”
세하는 헬멧을 해제한 상태로 그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짐짓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살기 어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렇게 오해를 풀면서 더 단단해지는 법이지. 생각보다 린시지오는 잘 잡혀 있는 느낌이야. 그리고 임금님이 아주 화통해서 단기결전을 생각하니 속 시원하군.”
세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마그티스는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리가 가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다른 차원의 대표들이나 정예를 연합시킬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차원간의 이동에 대한 문제도 있었고 각자의........”
마그티스는 오늘따라 말이 구차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하가 말했다.
“다 좋은데 그게 쉬우면 진즉에 되지 않았겠냐? 네 말대로 차원과 차원의 일인데?”
세하가 너무 쉽게 말하는 통에 마그티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만 있으면 된다고. 저 엑펠트 놈들에게 업화 같은 복수심과 쳐 죽일 힘이 있으니 말이야.”
듣기에 살벌한 말지만 마그티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다. 그대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느낌이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숨기지 말고 다 말해. 그리고 중간에서 이렇게 움직여 준 것에 고맙다.”
세하는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하지만 이를 못 믿었는지 마그티스는 의뭉스럽다는 표정으로 세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칭찬 처음 들어봐?”
“아... 아니... 그대 같은 필멸자에게... 아니지. 그대 정도가 필멸자 일리는.......”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마그티스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세하는 그의 등을 팡 소리가 나도록 후려치며 말했다.
“허이구. 거의 드래곤급인 존재가 왜 이리 부끄럼을 타시나? 아무튼 나중에 네 차원의 일도 도와줄 테니 기다리라고.”
“아... 알았다.”
“그럼 돌아가 봐. 나는 여기서 저 망할 것들 좀 더 보고 갈련다.”
세하가 그렇게 말하자 마그티스는 두 말없이 프로스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혼자가 되자 세하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참 걸물들이다 그렇지?”
강화된 시력으로 보이는 엑펠트군은 세하로서는 지겨울 정도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인간의 형태로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것들이 혼합되었고 그 위를 핏빛의 기운이 둘러싸고 있는 꼴들이었다.
뒤엉켰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렸다. 세하가 지오 그라함이던 시절 상대했던 엑펠트의 융합체들이 그랬다. 기계, 생체, 무기물, 유기물에 다가 살아 움직이는 에너지체들이 한 테 엉켜서 보는 것만으로도 본능적인 공포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네. 하지만 마스터의 정신상태도 걸물이네요.”
그리고 세하의 옆에 루이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마치 신관처럼 폼이 넉넉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복색이었는데 세하는 그 때문에 휘파람을 불었다.
“이건 무슨 바람이야?”
“아무래도 마스터의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보니 안정을 드리고 싶어서요.”
루이제는 세하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거기에 세하는 킥킥 거렸다.
“멘탈 관리해주려면 그 대상자의 눈을 보고 말해야지. 너 완전 사이비라고.”
“알았어요.”
루이제가 못이긴 체 하고 세하와 눈을 맞췄다. 그러자 세하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역시 직접 얼굴을 보니 좋네.”
“마스터. 느끼해요.”
루이제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보아하니 인테르프 6세는 전면전을 거행하고 그 틈에 마스터를 돌입시킬 생각인 거 같군요.”
“그래. 시작하자마자 엘리미네이터 아머로 정신없이 날 뛰어야 할 거야.”
세하도 이제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러자 루이제는 잠시 말없이 엑펠트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구는 괜찮으려나? 아무 말 없이 쏙 빠져나온 격인데 말이야.”
하지만 세하가 가만히 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분위기가 깨진 것에 화를 낼 법 했지만 루이제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여기 일을 잘 해결하면 지구에 도움이 되는 거니 마음 편히 가지세요.”
“흠. 주리나 라설연이 난리를 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유주리 헌터의 전투력은 마스터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높습니다. 지구의 S급 헌터들은 그 하나하나가 전략급 병기라 할 말할 텐데요? 마스터가 걱정하는 것은 마스터 자체가 너무 강해서 그런 겁니다.”
루이제는 세하가 말하는 것마다 따박따박 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세하는 뭐가 그리도 좋은 지 싱글거리고 있었다.
“역시 루이제가 있어서 다행이야.”
“아무리 칭찬 해주셔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곧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해야 하니까요. 마스터의 약한 멘탈이 버틸까 걱정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루이제의 표정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세하는 고개를 저었다.
“몰랐어? 이런 싸움은 매번 하던 일이잖아?”
그리고 시선을 뒤로 돌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싸울 아군도 많고 말이야.”
*
“모조리 죽이자!”
와아아아아!
전투가 시작되지 전 린시지오의 왕 인테리프 6세는 병사들의 앞에 와 섰다. 처음에는 제법 긴 연설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대검을 뽑아들더니 저런 소리를 내뱉었고 병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자 각기 붉은 오러 같은 것이 가득 일어나며 사방을 화끈하게 달구기 시작했다.
‘상상을 초월하네.’
그리고 그냥 봐서는 대오도 열도 없이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에서 세하는 모든 것이 약속된 것임을 알아야 했다.
콰콰쾅!
엑펠트군의 전위와 린시지오군의 전위가 순식간에 충돌했다. 사방에 충격파가 일며 각 병사들이 날려가고 피와 살육의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앙은 비었지.’
주로 린시지오군은 좌우 측면으로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 기세가 워낙 맹렬한 터라 엑펠트군이 대처를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사이킥 에너지의 충전을 끝낸 세하는 엘리미네이터 아머를 가동했고 그대로 엑펠군의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퓨화화확!
먼저 풀 버스터 모드로 6문의 사이킥 캐논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엑펠트의 융합체가 대다수인 엑펠트군의 주력들은 거기에 순식간에 쓸려나갔고 불탈 뿐이었다.
파파파팟!
그렇게 한 차례 포격으로 틈을 만든 후 세하는 돌격했다. 이미 양 손에서는 거대한 사이킥 블레이드가 빛나고 있었고 닿는 족족 융합체들을 썰어버리며 길을 만들어나갔다.
크아아아!
그렇게 무인지경인 양 엑펠트군의 중앙을 돌파하던 세하는 우렁찬 괴성과 함께 뭔가가 앞을 막았고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이건 또 뭐야?”
마치 지금 세하의 모습을 본 딴 것 같았다. 10미터 가량의 체고에 강철의 거인이 형상화된 모습조차 닮았다.
하지만 그 표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진득해 보이는 핏빛의 기류에다가 앞서 엑펠트인 헤러커에게 본 것처럼 케나아찰과 파흐트 계의 특징을 모두 지닌 존재였다. 게다가 그 입은 거대한 육식공룡마냥 찢어져라 벌리며 포효하고 있었으니 가히 흉물이 따로 없었다.
“그냥 뒈져!”
하지만 세하는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과감하게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찢어져라 벌린 상대의 입안에다가 그대로 오른손을 굵직한 사이킥 캐논의 포구로 바꿔서 영거리 포격을 날려버렸다.
순식간에 거인의 머리통이 불타서 사라졌고 뒤에 남은 몸체마저 쓰러졌다. 하지만 그런 거인들이 수십은 더 나타나고 있었다.
“하여간 지겨운 따라쟁이 놈들. 뭐든 뒤섞고 난리네.”
세하는 그 모습에 머릿속이 씨뻘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하하하하!”
그때 득의만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하가 고개를 들어보니 제법 익숙한 형상의 거인이 빛의 날개를 펼친 채 서서히 하강해오고 있었다.
“헤러커?”
드래곤의 머리를 지닌 용인의 모습이 딱 그라는 걸 드러내고 있었다. 저번처럼 잔뜩 가시가 돋친 상태에서 빛의 후광을 두르고 표면은 핏빛의 기류가 흐르는 모습이 영락없는 융합체의 몸이라서 세하는 저절로 두 눈에 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되는 군! 민세하!”
헤러커는 무슨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외쳤다. 거기에 세하는 엘리미네이터 아머 상태임에도 커다란 중지를 세워보였다.
“역겨운 자식. 친한 척 하지마라.”
“그래? 오늘 내 역할이 이래서 할 수 없군. 재회의 회포는 싸우면서 풀어볼까?”
헤러커는 양 손에서 세차게 진동하는 빛의 검을 하나 씩 쥐었다. 세하도 커다란 사이킥 블레이드를 손 마다 하나씩 사출하고는 그대로 헤러커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