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다가오는 것 2
세하는 순식간에 느와르레이드 슈트를 장착하고 밖으로 나갔다. 제법 깊은 지하를 나와 밖으로 나오니 펜션이 연상되는 마당의 전경이 세하에게 보였다.
‘이거 봐라?’
하지만 서서히 접근하는 반응을 보고 세하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세하가 지오 그라함이던 시절 지겹도록 봤던 에너지로 이루어진 형태가 꿈틀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과 비슷한 신장을 지닌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세하는 다짜고짜 사이킥 캐논을 날리고 봤다.
콰앙!
“우앗!”
그 형태는 뒤로 펄쩍 뛰며 그 일격을 피했다. 세하는 거기에 다시 사격을 가하려 했지만 그 존재가 두 손을 세차게 흔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 그만! 싸우러 온 게 아니다!”
“그럼 뭐 하러 왔냐? 헤러커.”
세하는 눈앞의 존재가 앞서 부산에서 맞닥뜨린 헤러커임을 깨닫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마스터. 잠시만........
‘알아. 하여간 일단 누르고 봐야 돼.’
루이제가 그런 세하를 염려해서 말했지만 세하도 마음먹은 것이 있어서 바로 마음속으로 답했다. 그 사이 헤러커는 간신히 숨을 돌리고 다시 세하에게 다가왔다.
그가 헤러커임을 알아본 것은 부산에서 나타났을 때처럼 용의 머리를 하고 있어서였다. 어찌보면 용인이라 불리는 드라칸이라 할 만 했지만 세하는 헤러커를 그런 존재로 보지 않아서 잔뜩 가시가 돋친 말투로 말했다.
“엑펠트 주제에 내 앞에 나타나? 당장 죽여 달라 이거냐?”
“하하하... 내가 과연 대책 없이 이렇게 왔을까? 이건 내 단말 중 하나나 마찬가지라서 죽여 봐야 별 소용없어.”
헤러커는 그래도 세하가 대화의 여지를 드러내선지 제법 여유롭게 답했다. 거기에 세하는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죽여 말아?’
-마스터. 조금만 참으시죠.
루이제는 그런 세하를 말리느라 제법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세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헤러커에게 말했다.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아니지 엑펠트라서 간이 있긴 한가?”
“좀 웃길지 모르지만 네 녀석이 특이해서 말이다. 분명 지구의 인간인데 뭔가 우리와 비슷하면서 겁이 없어서 말이다.”
헤러커가 눌림 없이 한 말에 세하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어찌 들으면 맞는 말이군.’
세하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엑펠트와 어느 정도 닮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가? 니체의 문구가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군.’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세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네 놈이 알 런 지 모르지만 너 같은 놈들은 지겹도록 봐서 말이다.”
“그래? 나 같은 놈을 많이 봤다고? 그건 좀 이상한데? 너 우리 엑펠트에 대해서 알기는 하는 거냐? 우리는 군체에 가깝다고. 물론 각 개체별의 인격을 가질 수는 있지만 우리의 기조 때문에 보통 포기하거나 놓아버리는 일이 잦은데 나는 안 그랬단 말이지!”
갑자기 헤러커가 격하게 외쳤고 그 기세가 실려 에너지체인 그의 몸이 갑자기 부산에서 상대했을 때처럼 확 커졌다.
“지금 해보자는 거냐?”
세하는 그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차갑게 답했다. 그러자 헤러커는 다시 보통 인간의 크기로 돌아왔다.
“실례했군. 뭔가 갑갑해서 말이지. 이차원 속을 하도 헤집고 다녔더니 어떤 게 나인지 몰라서 말이야.”
“.......”
순간 세하는 레이린과 알페렌에 대해 말한다면 헤러커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꾹 참고서 비아냥거렸다.
“아무나 죽이고 흡수하고 융합체라는 엿 같은 것들을 만들고 난리를 치는 상종도 못할 것들 주제에 이제 와서 자아성찰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그 부산이라는 곳에서 벌어졌던 일을 말하는 건가? 그건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 엑펠트가 아니고 린시지오라는 차원에 속한 본성파라는 놈들의 짓이겠지. 안 그런가?”
헤러커가 린시지오의 본성파를 거론하며 말하자 세하는 잠시 침묵해야 했다.
-생각보다 잘 알고 온 것 같네요.
‘그러게. 이거 첫인상과는 다르다는 걸 감안해야겠어.’
세하는 루이제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며 좀 더 가늘게 눈을 뜨고서 헤러커를 보아야 했다.
“아무튼 네 녀석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어. 그리고 앞으로 우리 앞을 꽤나 막을 거라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그만치 흥미가 동하고 혹시 개별 개체로 자아를 지닌 나에 대해서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헤러커는 두 팔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세하는 바로 중지를 새워 보일 뿐이었다.
“엿 먹으시지.”
“이런 호의로 말하는 데 이런 거친 반응이라니. 뭐 상관없어. 아무튼 앞으로 네 녀석이 상상도 못할 일이 이 지구에 펼쳐지는 것만은 알아뒀으면 좋겠다.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네 놈을 살려둘 용의는 있다면 내 동족들은... 아니 이차원의 거친 것들은 다를 수 있으니 말.......”
헤러커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세하가 그대로 사이킥 블레이드로 헤러커를 수직으로 양단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오! 이런 ㄱ 같은 놈! 루이제. 지금은 어때?”
-사이킥 반응이 소실됐습니다.
세하가 성질을 못 이기고 헤러커의 단말을 베어버렸고 거기에 루이제는 왠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세하는 다른 의미로 걱정했다.
“저 자식이 여기로 와서 다른 놈들한테 여기 위치를 부는 거 아니야?”
-그럴 염려는 적다고 봅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레이린 리에게 지원을 받을 것을 권고합니다.
루이제는 바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래서 세하는 급히 레이린에게 통신을 연결해야 했다.
*
헤러커의 단말이 다녀간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어느새 5월. 슬슬 더워지는 시점이기도 한 터라 세하는 괜히 짜증을 부렸다.
“요즘 들어 게이트 출연빈도가 늘어나는 거 같아.”
“그래요? 저는 별 다른 거 없는 것 같아요.”
세하의 옆에는 보랏빛의 트윈 테일 머리를 한 유주리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있었다.
지금 경기도 내의 한 도시에서 두 사람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시뻘겋게 이글거리는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S급 헌터가 둘이나 나와 있으니 별 문제야 없겠다만 게이트 캐스터의 예보가 정확한지 모르겠네.”
세하는 헤러커가 다녀간 덕분인지 눈앞의 게이트가 한 없이 불길하게만 보였다. 게다가 린시지오의 것과 비슷한 색이라서 한층 기분 나쁨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 부산에서의 일 때문에 예민하신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저, 꽤 쓸 만해요. 못 믿으시는 건가요?”
유주리가 세하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세하는 그녀가 지난 미국 출장 이후로 단독으로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을 알고 있어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나이에 S급 헌터인 너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냐?”
“설연 언니는 여전히 애 취급해요. 그나저나 진후 오빠랑 다른 지역 게이트를 막는다고 했는데 잘 하려나 모르겠어요.”
유주리가 언급한 봉황 길드 출신의 두 사람 때문에 세하는 쓴 웃음을 지었다.
“김진후는 별 이야기 안 하냐?”
라설연은 둘째 치고 김진후는 세하가 과거에 사뿐히 밟아버렸기에 세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유주리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진후 오빠요? 오히려 세하 오빠 능력을 인정하는 분위기에요. 오히려 설연 언니가 봉황 길드를 먼저 나온 것 같다며 꺼려하지나 않으면 좋겠네요.”
유주리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봉황 길드가 그리 된 것에 일조한 세하로서는 뒷맛이 좋지 않았다.
‘뭐 그 놈들이 먼저 난리를 쳤으니 자업자득이지.’
하지만 정당방위의 논조를 생각하며 세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냈다. 그 순간 눈앞의 게이트가 더욱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기는 헌터 협회 소속 S급 헌터 유주리입니다. 지역 봉쇄는 완료됐나요?”
그러자 유주리가 차분하게 귀에 낀 이어셋 무전기로 말했다.
“네. 두 분이 마음껏 날뛰셔도 됩니다.”
협회 지역 본부의 통신이 바로 들어왔다. 그러자 세하는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더니 순식간에 라인버스터 슈트를 장착하고 두 주먹을 세차게 부딪쳤다.
“오빠. 오늘따라 좀 거친 느낌인데요?”
유주리가 세하의 격한 반응을 걱정했다. 하지만 세하는 라인버스터 슈트의 육중한 몸체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아무래도 린시지오 놈들이 나올 거 같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그리고 세하의 주변에 사이킥 에너지가 화끈한 불꽃으로 발현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주리도 어느새 자신의 등 뒤에 장막처럼 늘어진 어둠 속에서 커다란 낫을 꺼내들었다.
“동감이에요. 아무래도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니 확실히 해야겠죠.”
크아아아!
유주리가 말하기 무섭게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빨이 머리의 7할을 차지하는 블러디 헤스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퓨화화확!
먼저 세하가 유주리의 앞을 막으면서 불꽃의 사이킥 에너지를 퍼뜨렸다. 거기에 달려들던 블러디 헤스들의 일파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물론 후방에 위치한 것들은 간신히 살아남아서 유주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유주리는 당황하지 않았고 그녀의 주변에 어둠으로 이루어진 야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블러디 헤스들을 모조리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저는 염려하지 마세요. 저를 수호하는 것들은 오로지 삼킬 뿐이니까요.”
그렇게 유주리가 말하며 어둠의 낫을 휘둘렀다. 거기에 블러디 헤스들이 속절없이 베어져 나갔고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는 어둠의 야수들이 그런 블러디 헤스들을 다시 흡수하듯 삼키고 있었다.
“그렇네. 그럼 제대로 해보자고.”
유주리가 생각 이상으로 블러디 헤스를 학살하자 세하는 마음 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블러디 헤스를 불꽃으로 태워버리고 강력한 주먹으로 박살을 내버리는 등등 가히 무쌍을 찍기 시작했다.
‘이것들 봐라?’
하지만 블러디 헤스들은 물량전으로 나올 생각인지 수도 없이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었다. 물론 이 정도로는 라인버스터 슈트의 방호력을 뚫을 수 없지만 세하는 유주리가 걱정 되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서걱!
하지만 유주리는 그런 세하의 걱정을 불식하듯 여유롭게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오히려 세하가 걱정하는 것이 못마땅한지 더더욱 낫의 검날이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둠의 야수들은 더욱 거세게 블러드 헤스들을 소리가 나도록 씹어 삼키고 있었다.
‘괜한 걱정이군.’
세하는 린시지오 계의 위험 때문에 불안했었지만 유주리가 잘하고 있어서 그만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때 눈앞에서 커다란 발이 내리꽂혔다.
쿠웅!
“뭐야?”
하지만 세하는 라인버스터 슈트의 육중함이 무색하게 측면으로 회피하고 내리꽂힌 발을 불꽃의 사이킥 블레이드로 후려쳤다.
크아아아!
순식간에 발이 잘려나간 괴수. 크로브 다이노가 처절한 울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하지만 체고가 6미터가 넘는 이 괴물들은 게이트에서 속속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성가시네.’
블러디 헤스와 다르게 크로브 다이노의 단위 전투력이 강하고 튼튼한지라 처리가 늦어졌다. 거기에 블러디 헤스들의 수가 충원되면서 세하는 슬슬 걱정이 도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콰앙!
하지만 그런 세하의 걱정에 반응하듯 유주리의 기세도 강해졌다. 아예 어둠의 파동이 포탄처럼 터져 나오며 아예 블러드 헤스를 박살냈고 당장 눈앞에 들이닥치는 크로브 다이노의 상반신이 증발해버렸다.
‘나보고 화내는 거 같군.’
세하는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한다는 걸 다시 깨닫고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려고 했다. 그때 한 몬스터가 세하의 앞을 막았다.
‘어?’
처음에는 크로브 다이노 같았다. 하지만 그 주둥이가 뭔가 악어처럼 길었고 체고 또한 더 높았다. 엘리미네이터 아머마냥 거대한지라 세하는 한층 긴장의 끈을 조여야 했다.
그 몬스터는 순식간에 접근한 것과는 다르게 제법 신중하게 세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기세에 블러디 헤스나 크로브 다이노들도 눌려서 세하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이 놈이 리더인가?’
세하는 바로 판단을 내리고 움직였다. 순식간에 출력을 높여 도약했고 그대로 강해진 사이킥 블레이드를 내려쳤다.
하지만 리더 몬스터의 행동이 상상을 초월했다. 커다랗고 긴 입을 찢어져라 벌리며 그대로 세하의 전신을 집어삼켜 버린 것이었다.
‘뭐야?!’
뜻밖의 상황인지라 세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이제의 침착한 음성이 바로 들려왔다.
-마스터. 일종의 게이트입니다.
“게이트?”
그 순간 세하의 눈앞이 공간의 일그러짐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