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다가오는 것 1
“너는 누구냐?”
생각보다 깔끔한 음성이 용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의외로 육성으로 말하는 군. 엑펠트 놈들은 죄다 공기를 울리면서 폼을 잡는데 말이야.”
세하는 용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에도 용인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우리를 상대해본 것처럼 말하는 군.”
“맞아. 지겹도록 상대했지. 물론 융합체 같은 역겨운 것들을 개떼 같이 몰고 와서는 뒤에서 숨어서 수작질이나 하는 놈들이 대다수였지만.”
세하의 말에는 제법 경멸의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용인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랬군. 하지만 난 다르다. 내 이름은 헤러커. 엑펠트 중에서도 무투파라고 자신한다!”
“.......”
순간 세하는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엑펠트 맞아?’
혹시 감정을 들킬까봐 세하가 마음속으로 말하자 루이제도 마찬가지 반응이 나왔다.
-그러게 말이에요. 엑펠트 중에서 이렇게 알아서 이름을 대는 존재가 있다니 믿기질 않네요.
아무튼 문제의 엑펠트인 헤러커는 그렇게 이름을 밝히고 나서 두 눈을 번들거리며 세하와 일행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뭐냐? 각 차원에서 모여든 모양인데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말해두마. 우리의 세력은 각 차원에 걸쳐있으니 말이... 커헉!”
하지만 헤러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세하가 돌진해서 그대로 전격의 펀치로 그의 턱을 가격했기 때문이었다.
“주둥이로 싸우냐?”
그렇게 수차례 펀치 러쉬로 헤러커를 가격해 물러나게 만들었고 순식간에 양 손을 사이킥 캐논으로 바꿔서 연사했다. 이번에도 화염 속성으로 구현된 탄환들이 헤러커의 전신에 내리 꽂혔고 삽시간에 전신이 불타오르게 되었다.
“크윽! 어떻게 이런.......”
워낙 세하의 공격이 거센지라 헤러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육체의 결합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불안정해지며 흩어지려는 판국인지라 당장에라도 해체 당할 것 같은 위급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뭐하냐?”
그 모습에 놀라고 있는 이차원의 대표들을 보고 세하가 말했다. 그제야 마그티스를 비롯한 이차원의 대표들도 헤러커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이킥 블레이드의 칼날이나 뇌격과 빛의 파동 거기에 날카로운 혈류(血流)의 창 등등이 헤러커에게 날아들었다. 헤러커는 이를 어찌어찌 막아내는 가 싶었지만 세하가 돌진하기 시작하자 다시금 행동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젠장!”
헤러커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전격과 날카로운 빛의 파동이 화악 퍼지며 세하와 이차원의 대표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나는 다른 동족들과는 다르지! 두고 보자!”
세하는 두고 보자는 놈 하나도 안 무섭다며 끝장을 보려고 했지만 이내 헤러커가 저지르는 짓을 보고서 단념했다. 헤러커가 대뜸 자신의 팔에 상처를 냈고 거기서 나온 피가 마치 강물처럼 흘러내리며 온갖 형상의 괴물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세하는 혀를 내둘러야 했다.
‘이거 아주 가관이네.’
게다가 그 괴물들은 케나아찰 계와 파흐트 계 그리고 린시지오 계의 특성까지 모두가지고 있었다. 그 수 또한 100 여 개체에 가까워서 세하가 엘리미네이터 아머의 파워에다가 이차원의 대표들이 가세해도 이를 해치우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헤러커는 사라지고 말았다. 거기에 세하는 욕이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다들 봤지?”
용케도 엘리미네이터 아머의 시간이 남아 있어서 세하는 그 상태로 이차원의 대표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렇게 위험한 놈들이라고. 다들 몸으로 실감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조만간 만족스러운 답을 가지고 오라고. 알겠어?”
세하가 그렇게 으름장을 놓자 이차원의 대표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훗날을 기약하며 각자의 게이트로 사라졌다. 하지만 마그티스와 프로스는 남아있었고 그제야 세하는 엘리미네이터 아머를 해제하고는 느와르레이드 슈트 상태로 돌아왔다.
“마그티스. 저 녀석들이 얼마나 따를까?”
그런 상태에서 세하가 헬멧까지 해제하고 묻자 마그티스는 별로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 오늘 이 꼴을 봤는데 말이야?”
세하도 내심 짐작한 것이 있어서 실망을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하지만 확인 차원에서 다시 물었다. 그러자 마그티스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인간만 하더라도 각기 생각이 다르지 않는가? 하물며 차원의 문제다. 상당한 진통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오늘 엑펠트 중 저런 개체가 나타났고 그대가 힘을 보여줬기에 가능성이 생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군. 그런데 케나아찰 쪽은 괜찮은 걸까?”
세하는 케나아찰의 대표로 보이던 개체가 융합체가 되어 나타난 것이 신경 쓰였다. 거기에 마그티스는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프로스와 기겔슈를 동반하고 찾아가겠다. 그대가 같이 가준다면 좋겠지만 일단 그대는 이 지구에서 없어선 안 될 테니 맡겨주기 바란다.”
“좋아. 믿겠어.”
세하는 더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이 머리 아픈지라 그만 마그티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럼 좋은 소식 있기를 기대하지.”
“그래. 그럴 것이다.”
그렇게 마그티스마저 프로스와 함께 게이트로 사라졌다. 세하는 잠시 병원의 로비에 혼자 있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도 걸음을 옮겨야 했다.
*
“헤러커라고요?”
레이린은 굉장히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래. 아주 당당하게 드러내더라고. 내가 전생에 상대했던 엑펠트 중에서 저런 녀석은 없던 거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세하는 부산에서 협회로 복귀하기 무섭게 협회장 류한호를 비롯해서 협회의 중진들과 제너럴 마이트가 연결된 화상 회의를 갖은 후 지금 레이린이 자리한 지하로 내려와 있었다.
“상당히 고된 하루시네요.”
레이린은 세하가 3시간 정도 회의를 하고서 자신을 찾아온 걸 안지라 그 표정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해보였다. 하지만 세하는 뭔가 열이 오른 것처럼 피곤함이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단서라서 정신이 깨이는 것 같다고. 아무튼 너도 뭔가 짐작 가는 건 없어?”
“음.......”
레이린은 그 고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엑펠트는 개체 간의 벽이 심해요.”
“음?”
그리고 꺼낸 말에 세하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본능적으로 종족 자체에 새겨진 일에 대해서는 협력을 하죠. 하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사람의 친애처럼 가까운 경우는 극히 없어요. 헤러커처럼 스스로 이름을 드러내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죠.”
그리고 이어지는 레이린의 말에 세하는 점점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냥 군체로 뭉쳐서 난리치는 것들인데 또 개개인의 인격은 따로 있고 그렇다는 거야?”
“네. 저만 해도 그렇잖아요. 물론 육체가 된 인간의 정신에 감복하고 이를 따르는 식이긴 하지만요.”
레이린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는지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하지만 다시 애써 미소 지으며 눈앞에 가상화면을 만들어냈다.
“세하님의 전생 때는 이런 구도였어요.”
지구로 추정되는 행성이 있었고 저 멀리 위치한 커다란 별의 군집이 있었다. 레이린은 별의 군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엑펠트는 오로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그 힘을 키울 뿐이었죠. 그러다가 지구가 중심이 된 태양계에 도달했어요. 그때만 해도 저나 헤러커 같은 스스로를 확립지은 존재는 극히 드물었어요. 하지만 세하님의 분투로 사이킥 에너지의 폭풍이 일어났고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렸죠.”
레이린은 가상화면을 마치 지우개로 지우듯이 손짓해서 없애버렸다.
“그러니 엑펠트도 개별적인 존재가 나타는 것이 없을 일은 아니겠죠. 게다가 다른 차원에도 퍼지고 게이트로 연결되어서 지금의 혼란한 상황이 이어진 거라고 보고 싶어요.”
“끙......”
세하로서는 답답한 마음에 팔짱을 낀 채 침음성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들으니 내가 단단히 사고를 친 것 같군.”
“아니에요. 군체로서의 엑펠트는 정말 강해요. 그건 전장에서 숱하게 싸워 온 세하님이라면 피부로 느끼실 일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나 헤러커 같이 개별화를 확정 지은 존재들이 나타나고 군체로서의 총합은 약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레이린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세하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이차원의 존재들과 협력해서 거대한 연합으로서 엑펠트를 상대하고 각계격파를 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겠지만요.”
“어.......”
환하게 웃는 레이린의 얼굴이 오늘 따라 세하의 마음속에 와 닿았다. 그래서 세하는 잠시 멍해졌는데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지듯 루이제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저질.
‘아니야!’
세하는 깜짝 놀라서 큰소리로 외칠 뻔했다. 루이제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예쁜 사람이 웃어주니까 좋습니까? 헤벌레 한 것이 코 베어가도 모르겠네요.
‘너. 나중에 보자.’
세하는 어렵사리 마음속으로 대화를 끝내고 레이린을 바라보았다.
“저기. 레이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 봐도 될까?”
“아. 그러세요. 안 그래도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셨으니 까요.”
레이린은 표정에 못내 아쉬운 감정이 보였지만 금세 지우고 말했다. 세하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계속 있다가는 루이제가 난리를 칠 것 같아서 서둘러 작별을 고했다.
*
“마음에 안 듭니다.”
이제는 새로 구한 안전가옥에서 루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채 아예 불만스러운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왜? 엑펠트라서?”
세하는 루이제가 제법 삐친 것처럼 보여서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그녀가 제법 정색하고 있어서 바로 웃음을 지워야 했다.
“네. 마스터가 전생 전에 절망감을 넘어가며 싸웠던 존재들입니다. 거기서 분리되고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렇게 웃는 낯으로 말하는 걸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게 사실입니다.”
루이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로 엑펠트는 강대하고 모든 것을 덮어나갔었습니다. 마스터는 개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전면에서 싸워 왔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저로서는 레이린 리를 마냥 좋게 볼 수 없습니다.”
“........”
세하는 놀라면서도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다.
‘이게 루이제의 본심이겠지.’
루이제는 세하의 전용기체인 엘렉티오의 AI로 시작해서 세하에게. 아니 전생 지오 그라함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지성체로서 성장하고 공감해왔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시공을 뛰어 넘어 살아나게 해주고 이렇게 함께 해주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주니 좋네. 물론 나는 둘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루이제 너를 선택할 거야.”
“.......”
순간 루이제가 굳어버렸다. 새하얀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이 그 감정의 편린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 같았다.
“보통 이럴 때는 화내거나 도망가는 게 맞을 거 같은데요.”
하지만 루이제는 금세 신색을 회복하고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저는 마스터의 충실한 AI이자 동반자인 사이킥 생명체이니 도망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한테 너무 빠지지 마세요. 현실에서 살 수 없을 겁니다.”
“그래? 레이린의 경우도 있으니 네가 아예 육체를 얻는 것도 가능할 텐데?”
그리고 한술 더 뜨는 게 세하였다. 루이제는 이번만큼은 정곡을 찔려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예 개별 개체로서 움직일 수 있지 않아?”
세하는 정말 생각한 것이 있어서 계속 질문했다. 하지만 루이제는 거기에 답하지 않고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세하를 노려보았다.
‘어? 내가 실수했나?’
루이제의 반응이 좋지 않아서 세하는 당황했다. 거기에 루이제는 한숨을 내쉬더니 두 어깨가 축 쳐지고 말았다.
“마스터. 저는 지금처럼 존재하는 게 안전해요. 마스터와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마스터가 엑펠트나 융합체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거예요. 제가 물론 마스터가 말씀하신대로 육체를 얻어서 따로 활동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거야 말로 레이린 리가 말한 대로 각계격파 당하는 꼴이 될 수 있어요.”
이내 루이제가 차분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거기에 세하는 스스로의 실수를 깨달았다.
“미안해.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네.”
“모든 일이 마무리 된다면 생각해 볼게요. 그때까지 마스터께서 동정이시라면 불쌍한 인생 하나 구원해주는 셈치고 육체를 얻을 게요.”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를 발언이었지만 루이제는 진심으로 웃었다.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 되어가려는 시점에 갑자기 루이제가 모습을 감췄다.
“루이제?”
거기에 세하가 놀라 묻자 다시 루이제가 AI로서 세하의 머리속에 경고를 보냈다.
-마스터. 고 등급의 사이킥 반응이 감지되고 있어요.
“.......”
세하도 피부에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고도의 통신과 물리적 보안이 이루어진 가옥 안에서도 이처럼 확연한 반응인지라 세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