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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화 〉비공식 회담 (44/72)



〈 44화 〉비공식 회담

게이트에서 나타난 린시지오의 존재는 처음에는 온통 핏빛으로 이루어진 인간 형태였지만 서서히 제대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붉은 머리칼을 지닌 청년의 모습이었는데 그 복색은 마치 중세 귀족이 떠오를 정도로 고풍스러운 형식이었다. 그렇게 형태를 갖춘 그는 멋들어지게 예를 올렸다.

“생각 외로 많은 분들이 모여 계시는 군요. 린시지오 계의 이성파 귀족대표인 벨레토르 후작이라고 합니다.”
‘후작?’


마치 인간 귀족처럼 행세하는 것이 세하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일단 예를 갖추고 있어서 세하는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성파라고 했나?”

마그티스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러자 벨레토르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싱긋 웃어보였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 린시지오는 본성파와 이성파가 나뉘어서 대립중이라서 말입니다. 본성파는 당연히  회담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 저열한 작자들은 어떻게든 상대의 뒤를 치고 그 피를 빨아먹고 힘을 키우거나 노예를 부릴 생각만 하니까요.”

세하가 보기에도 벨레토르는 상당한 권한을 가진 귀족으로 보였다. 그 여유가 넘치고 자신 있는 모습에 머릿속이 살짝 복잡해졌다.

‘루이제. 어떻게 생각해?’

보는 눈이 많아서 세하는 마음속으로 루이제에게 말했다.


-일단은 대화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적어도 대화를 한다는  그만치 생각이 있다는 거니까요. 무조건 다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루이제도 신중론을 펴서 세하는 다른 생각은 안기로 했다. 그러자 마그티스가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일단  시점에 대해 정보를 공유했으면 한다.”


그렇게 4개 차원의 비공식 대표들이 한때 사람들이 오가던, 지금은 황량해져버린 병원의 로비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
‘거참. 말들 되게 빙빙 돌리네.’


다들 규격 외의 존재라선지 가만히 서 있는 데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세하로서는 답답하고 확 뒤집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일단  차원도 의견이 많이 갈린다는 거로군.”


마그티스가 간신히 의견을 정리했다. 하지만 이미 바깥이 어둑어둑해진 것이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하는 침묵하던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회담이 시작되고 계속 지켜만 보다가 입을 연지라 좌중의 시선이 세하에게 향했다. 하지만 세하는 느와르레이드 슈트로 전신을 감싸고 있었기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고 그래서 더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다들 속한 곳이 어찌되었다 싸우는 중이다. 달리 힘을 쓰기 어렵다  수준이지 않았나? 말들은 참 장황했고 특히 엘파타르? 파흐트 계의 로드라는 녀석은 무슨 창세기 강연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거  중요해.  같은 엑펠트 놈들이 각 차원을 쑤시고 다니고 그 여파로 게이트가 이곳 지구에 주구장창 열려서 엿 같은 각 차원의 몬스터들이 지구로 몰려와서 사람이 죽어나는 판이라고.”

세하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에는 벨레토르를 바라보았다.


“벨레토르라고 했나? 그쪽이 본성파하고 이성파로 나뉜다고 했는데 네 말 대로면 오늘 온 놈들은 본성파 놈들이겠네?”
“하하하. 그런 셈이지요.”


벨레토르는 곤란하다는 식으로 웃어보였다. 하지만 세하는 그런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괜히  흐리지 마라. 이성파 놈들 중에서 수작 안 부린다는 보증은 있나? 나는 지금 네 놈도 의심스러운데 말이야.”
“아무래도 오늘 참사가 있었으니 그러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속한 이성파의 귀족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비록 수하들을 부리고  밑에 수많은 슬레이브를 두긴 하지만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우리의 원칙입니다. 하지만 블러디 헤스나 크로브 다이노 같은 몬스터들은 본성파에서 주로 부리고 소모품처럼 써먹는 저주 받을 피조물들이죠.”


벨레토르는 의외로 부드럽게 세하의 말을 넘겼다. 하지만 세하는 공세를 늦출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결국 그 놈들이 넘어와서 여러 사람이 죽었지. 그래서 네 놈은 신뢰를 보이려면 나한테 잘해야 되는데 결국은 그냥 면피에 불과한 말만 하는 군. 너희 파 짓이 아니니 모른다?  쪽에게 따져라 이건가?”

세하가 이런 식으로 나오자 벨레토르는 난처한 표정으로 다른 대표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그티스와 엘파타르도 그다지 호의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크흠. 확실히 민세하의 말이 맞다. 나는 인정한다. 우리 세계의 몬스터들이 제어를 벗어나서  세계에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노력해서  확산을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엘파타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세하는 손을 들어 말이 이어지는  막았다. 안 그래도 엘파타르가 입을 열면 주구장창 길게 웅변조로 말이 길어지기에 처한 선제적 행위였다.

“아무튼 적어도 다른 차원으로 몬스터건 물건이던 못 넘어오게 해줬으면 좋겠군. 물론 의견이 안 맞거나 엑펠트가 난리를 쳐서 힘들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적어도 연합체를 만들지는 못할 거. 서로 간에 피해는 안 가도록 해야 하지 않겠어?”

세하가 다시 말하자 다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하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케나아찰 쪽은 왜 안 오지?”

그리고 그 시선이 마그티스에게 향했다. 헬멧에 붙은 브이자  바이저가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어서 마그티스는 거기에 움찔하고 말았다.

“모르겠군. 분명 대표 한 명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자 벨레토르가 끼어들었다.

“분명 투쟁이니 기조니 하면서 서로 떠들고 야만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겁니다. 우리 이성파로서도 케나아찰의 존재들은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원칙이 통하질 않습니다.”
“그래? 그래서 그렇게 너희들이 엉덩이가 무거운가?”

세하는 벨레토르에게 계속  좋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벨레토르도 오늘 지구가 입은 피해를 알아서 강하게 나오질 못했다.

“이거 상당히 밉보인  같군요.”
“사실 오늘처럼 떠드는 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서로 발목을 잡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내 마음이다.”


세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로비의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 이만 간다.”

 이상 할 말도 없어서 세하로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마그티스를 비롯한 각 차원의 대표들도 그걸 피부로 받아들이고 각자 게이트로 돌아가려고 했다.

-마스터.


그때 루이제의 차가운 음성이 세하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이건 뭐냐?”

로비의 입구 쪽에서 게이트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케나아찰의 것처럼 날카로운 가시들이 주변에 돋아나는 가 했더니 그것은 점점 붉디붉은 기운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허어. 이건........”

어느새 세하의 옆에 선 벨레토르가 탄식했다. 마그티스와 엘파타르도 마찬가지로 와서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마그티스. 저게 뭐냐?”

일단 세하는 가장 가까운 마그티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마그티스는 무표정한 채로 그의 동반자인 프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단 케나아찰의 게이트로 보이지만 오염된 것 같군. 벨레토르 후작. 당신이라면 저게 뭔지 알  같은데?”

그리고 마그티스가 내놓은 결론에 벨레토르는 침음성을 냈다.

“인정하기 싫지만 본성파의 입김이 닿은  같습니다.”
“그거 책임 회피다.”

세하는 날카롭게 쏘아 붙이고는 느와르레이드 슈트의 양 손을 사이킥 캐논의 포구로 만들었다. 그 끝에서 사이킥 에너지의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처음에 게이트에서 나온 것은 거인의 다리였다. 적어도 신장이 10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존재였는데 그 전신은 날카로운 가시와 번뜩이는 금속질의 피부로 둘러싸여서 자세한 용모를 알아보기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그 거인의 전신은 섬뜩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벨레토르가 고개를 저었다.

“본성파의 슬레이브가  것 같군요. 보아하니 케나아찰의 대표급이라  존재 같은데 이렇게 감염이 되다니......”
“그래? 그렇게 잘 알면 일단 막아보라고.”

세하는  던지듯 말했다. 거기에 벨레토르가 놀랐지만 세하는 개의치 않았다.

‘루이제. 엘리미네이터 아머 가능하겠지?’

세하가 루이제에게 마음속으로 묻자 바로 답이 떨어졌다.


-네. 하지만 준비 시간이 필요합니다. 잠깐만 시간을 벌어주세요.

세하는 루이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변신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그러자 전신이 검은 금속질로 뒤덮이기 시작하며 서서히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크워워워!

그때 감염된 가시거인이 포효하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하가 아직 변신중이라서 마그티스를 비롯한 이차원의 대표들은  앞을 막으면서 가시거인에게 공격을 가했다.


파파팟!


먼저 마그티스가 손짓하기 무섭게  곁에 선 프로스가 포효하자  주변에서 사이킥 블레이드의 칼날들이 폭풍처럼 일어나며 가시거인의 돌격을 막았다. 그 여파로 가시와 금속질의 표면이 타격을 받아 그 파편이 흩날리며 가시거인이 멈춰 섰다.
그러자 엘파타르는 중력이 없는 것처럼 허공에 떠오르더니 그대로 전격과 빛의 파동을 내뿜으며 가시거인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벨레토르는 자신의 손목에 상처를 내더니 음산한 어조로 주문을 말하기 시작했다.

“피에 각인된 명령으로 명하노라. 일어서라.”


신장이 6미터는  오로지 피로 된 거인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달려 나가 가시거인에게 온몸으로 부딪쳐나갔다.


“제법이네.”

그렇게 이차원의 대표들이 나서자 세하는 휘파람을   있었다.  사이에 엘리미네이터 아머의 모습이 완전히 구축되어서 가시거인에게 지지 않을 높이가 되었다.


-저 정도는 돼야겠죠. 안 그러면 마스터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잖아요?

루이제가 그런 세하에게 뭔가 뼈 있는 말을 꺼냈다.

“나도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는 않아. 아무튼 힘 좀 써볼까?”

마그티스들이 한창 공격을 퍼부으며 가시거인의 발을 묶었고  공격들이 텀이 생기는 시점에서 세하는 돌진해나갔다.
엘리미네이터 아머의 강력한 출력은 순식간에 가시거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그 주먹에는 마치 뇌전 같은 성질을 띤 사이킥 에너지가 구현되어 그대로 가시거인의 면상을 강타했다.

크억!


가시거인이 고통에 찬 괴성을 지르며 머리가 뒤로 확 젖혀졌다. 세하는 틈을 주지 않고 전격의 펀치 러쉬를 퍼부으며 가시거인을 그로기 상태로 몰고나갔다.
그렇게 신나게 두들겨 맞은 가시거인은 온몸의 가시와 금속질의 표면이 떨어져 나가서 지금은 무슨 회색의 석고질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자아! 마무리다!”


거리가 벌어진 틈에 세하는 엘리미네이터 아머에 캐논들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전문 발사에 가까운 버스트 모드라고 할  있었다. 양손과  어깨 그리고  대퇴부 부위에서 사이킥 캐논의 포문들이 장착되어서 순식간에  포구들에서 강렬한 전격의 에너지를 퍼붓기 시작했다.


파콰콰쾅!

그 격렬한 에너지의 포격에 가시거인은 그대로 휘말려서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전경에 마그티스를 비롯한 이차원의 대표들은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후우.......”

세하가 그렇게 격렬한 포격을 쏟아내고 잠시 심호흡했다. 하지만 헬멧의 디스플레이에 아직도 에너지 반응이 잡히고 있어서 전투태세를 풀지 않았다. 그러다가 탄식처럼 말했다.

“와. 이럴 줄 알았어.”


세하는 왠지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투지 어린 눈이 되며 말했다.

“뭔가 감염이니 변질이니 하니 안 나올 수 없겠지?”
-네. 엑펠트 융합체 반응입니다. 아니... 엑펠트 본체가 나타났네요.


루이제도 한층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도 전격의 에너지가 만든 잔여 반응이 주변 공간에서 바직거리고 있었지만 서서히 그것들이 뭉치면서 전신이 박살이 난 가시거인을 일으키고 형상을 복구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방금 보았던 가시거인의 형태를 복원했지만 그것은 다시 변질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스러워 보이는 빛의 기운이 퍼져나가며  기운을 몸에 둘렀고 다시 핏빛의 불길한 색체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가시거인의 머리가 마치 드래곤의 것처럼 변해 세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세하는 도리어 씨익 웃을 수 있었다.

“진정으로 대화를 해볼  있겠네?”


물론 그 대화가 문자 그대로의 대화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아무튼 거대한 용인(龍人)처럼 된 적이 섬뜩한 포효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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