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변수의 연속 1
-마스터.
루이제가 조용히 세하를 불렀다.
“왜 그래?”
세하는 라인버스터 슈트로 단단히 무장한 상태에서 큰 문을 앞에 두고 있었다. 레이린이 경고한대로 상당히 위험한 루트였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괴물 따위는 죄다 박살내버리고 여기까지 왔다.
-저 안은 위험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엘리미네이터 아머로 전환하고 들어갔으면 하지만 그 높이와 크기 때문에 기동성에 문제가 생기겠네요.
루이제도 경고하고 있었다. 그만치 저 문 뒤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도망가기도 그렇잖아?”
세하는 연구소 외각의 상황을 떠올렸다.
“다시 오니 지원을 부르니 하는 건 시간 낭비고 희생만 늘어나는 건 잘 알겠지?”
-할 수 없네요. 하지만 엑펠트 본체가 있는 거 같은데... 안되면 제가 최대한 보조해볼게요.
루이제도 상황을 이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시간 끌어 뭐하겠어. 들어가자!”
쾅!
화염이 휘감긴 커다란 철권이 문을 박살냈다. 적어도 높이가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문이었지만 그대로 박살이 나는 것이 세하의 사이킥 에너지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허이구.”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세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온갖 짐승 형상의 존재들이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마찬가지로 두 발로 선 눈에 띠는 존재가 보였다.
“저놈이군.”
온몸에 잔혹하게 뒤틀린 가시가 돋아 있었고 핏빛을 띤 존재. 하지만 신장만 3미터에 이르는 그 늑대인간의 모습에서 세하는 앞서 상대했던 ABW-404를 연상할 수 있었다.
“루이제. 저 놈. 상대했던 실험체 맞지?”
-맞는 거 같군요. 하지만 지금은 엑펠트가 육체를 차지한 것 같습니다.
루이제가 확실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안 그래도 헬멧의 디스플레이에도 서서히 붉은 경고음과 표식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대는 누군가?”
그리고 그 존재가 제법 덤덤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세하는 코웃음 칠 수밖에 없었다.
“어이. 어이. 그렇게 물을 정도면 통성명부터 먼저 하는 게 우선 아니야?”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넌 여기서 죽을 텐데.”
목소리에 감정은 없었지만 내용은 묘하게 재수 없었다. 그래서 세하는 사납게 미소 지으며 사이킥 에너지를 일으켰다.
퓨화화확!
주변에 강렬한 화염이 일어나며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존재도 놀란 것 같았다.
“이거 놀랍군.”
“어지간해서 여기까지 들어오겠냐? 넌 뭐하는 놈이냐?”
그렇게 무력시위를 하면서 세하가 다시 물었다.
“네 놈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그럼에도 엑펠트로 추정되는 존재는 뻣뻣했다. 거기에 세하는 툭 뱉듯 말했다.
“엑펠트 아니야? 남의 몸을 턱하니 차지하는 꼬라지가 딱 그건데.”
“.......”
말문이 막혔는지 엑펠트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세하는 쐐기를 박을 겸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나서나 싶겠지. 하지만 말이야. 나는 너 같은 놈들을 꽤나 만나봤으니까 말이야. 사실 강점을 살리는 건 죄가 아니지. 그런데 나나 여기 사는 인간들로서는 역겨울 정도로 위험 짓거리라서 말이야. 그러니 더 이상 말 말고 죽여주마!”
퓨화화확!
세하가 선공을 시작했다. 온 몸을 화염으로 휘감은 채 돌격해 들어갔는데 엑펠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라이칸스로프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키에에에!
하지만 세하가 일으킨 화염들이 워낙 강렬해서 라이칸스로프들은 접근하기 무섭게 순식간에 타오르며 잿더미가 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엑펠트는 세하의 강력한 돌격력에 당황한 것 같았다. 아무튼 그 사이에도 라이칸스로프와 각종 생체병기들은 세하에게 달려들고 있어서 그 전진이 좀 늦춰지기는 했다.
“크으으......”
엑펠트가 이를 악물더니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핏빛의 기류가 일어나더니 그대로 세하의 전진을 막고 있는 라이칸스로프들과 생체병기들에게 덧씌워졌다.
크아아아!
당연할 정도로 폭주하며 그 기운들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세하의 화염에도 단숨에 불타지 않았다. 물론 세하는 거기에 당황하지 않고 주먹으로 후려치거나 거리가 벌어지면 양손을 사이킥 캐논으로 변환시켜서 날려버리는 등 착실하게 공략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마스터. 이대로는 불리합니다.
루이제가 입을 열었다. 물론 세하도 알고 있었다.
“그렇겠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잖아?”
세하도 문제의 엑펠트를 빨리 치는 것이 상책인 것은 알았다. 하지만 폭주하는 라이칸스로프들과 생체병기들의 기세가 워낙 드세서 쉽지 않았다. 지금도 바로 헬멧 앞에서 이빨을 들이미는 멧돼지 같은 라이칸스로프를 사이킥 블레이드로 그 머리통을 썰어버리는 찰나였다.
-마스터. 역시 위험한 걸 생각하시는 군요?
이제는 제법 오래 있었더니 루이제가 세하의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 그 답으로 세하는 헬멧 속에서 비릿하게 웃었다.
“그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니까!”
그 사이 생체병기들의 웨이브는 더 격해졌다. 그리고 무슨 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데 뭉치며 그 크기를 키워갔고 그대로 세하를 압사시키려는 분위기였다.
“여기 연구소는 어차피 폐기할 거니 마음 놓게 저지르자고!”
세하가 기합을 넣으며 사이킥 에너지를 과부하 시켰고 그 여파로 화염이 더욱 짙어지며 덮쳐드는 생체병기의 군집을 태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커진 군집인지라 그것만으로 상쇄가 힘들었고 간신히 그 성장세와 세하의 저지력이 균형을 이루는 수준이었다.
“이놈!”
거기에 엑펠트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생체병기의 군집과 부딪치는 세하를 향해 달려갔다. 그 양손에는 핏빛의 섬뜩한 칼날이 한 손에 열 개 이상은 솟아 있어서 베이는 순간 처참한 꼴을 당할 것이 예상되었다.
“그래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세하는 오히려 기운차게 외쳤다. 그 순간 그의 몸을 감싼 라인버스터 슈트가 빛나더니 그 크기를 쑥쑥 키우기 시작했다.
그 형태도 변화했다. 거기에 일어나는 화염도 더욱 강해져서 생체병기의 군집들을 다시 불태우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거기에 달려들던 엑펠트도 휘말리고 말았다. 아무튼 크기를 키워나가는 세하의 슈트는 어느새 전고 10미터에 달하는 거인이 되었다. 현재로서 최강의 상태인 엘리미네이터 아머가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물론 그 높이 때문에 천장이 뚫렸고 화염으로 구현되는 사이킥 에너지의 여파로 그 주변도 박살이 나버렸다.
‘이거 레이린이나 토마스가 한 소리 하겠는데?’
세하는 외각에서 노심초사 기다릴 이들을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과감한 행동의 결과로 생체병기들이 거의 다 쓸려버렸고 엑펠트도 사지가 불타오르며 쓰러진 상태였다.
“네... 네 놈은 뭐냐......?”
엑펠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세하는 가볍게 답했다.
“네놈들 작살내러 온 저승사자.”
쿵!
엘리미네이터 아머 상태다 보니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슨 지진이 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거대 실험장의 중심부인지라 그 손상으로 인해 여기 저기 전원이 꺼져가는 반응이 엿보였다.
하지만 세하의 주변에는 활활 타오르는 화염 덕분에 전혀 시야가 방해받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세하는 양 손과 어깨에 커다란 구경의 캐논을 만들어내며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너 말고 여기에 다른 놈이 있냐?”
“엿이나 먹으시지......”
엑펠트는 늑대의 입으로 피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거기에 세하는 잠시 갈등했다.
‘이걸 그냥 작살내?’
-마스터.
그때 루이제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죽이고 그 사이킥 에너지를 흡수해도 정보는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네. 그럼 쉽게 가자고.’
세하는 엑펠트가 들을 것을 염려해 마음속으로 루이제에게 답하고 캐논들을 예열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엑펠트가 킬킬거렸다.
“이거 웃긴 노릇이군... 이런 놈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너무 압도적이라서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는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콰르르르!
그때 놀랍게도 엑펠트의 뒤에서 하나의 게이트가 나타났다.
“이건 뭐야?”
갑자기 뜬금없이 튀어나온 게이트에 세하는 얼떨떨했다. 그리고 세하가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게이트가 열리면서 뭔가 커다란 것이 튀어나왔다.
크아아아!
처음에는 무슨 육식공룡을 보는 것 같았다. 몸길이만 15미터는 넘을 육중한 존재였는데 그것은 게이트에서 튀어나오기 무섭게 커다란 입을 벌려서 그대로 엑펠트의 머리부터 씹어버렸다.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지?”
-이럴 때 쏴요.
루이제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자 그제야 세하는 캐논을 발사했다. 강렬한 에너지의 격류가 엑펠트와 공룡 같은 몬스터를 휩쓸었지만 몬스터는 놀랍게도 자신의 몸 주변에 빛나는 문양 같은 걸 띄우더니 캐논의 격류를 버텨내며 그대로 엑펠트의 전체를 씹어 삼켜 버렸다.
크르르르!
‘드래곤?’
세하는 그제야 몬스터의 모습을 얼핏 살필 수 있었다. 가히 커다란 파충류였다. 머리만 크고 앞다리는 짧은 육식 공룡이 아닌 사지가 균형 있게 발달하고 당당한 위용이 엿보이는 존재였다.
하지만 두 개의 날개는 없었다. 하지만 전신을 뒤덮은 황갈색의 비늘은 예리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두 눈은 세하의 전신을 날카롭게 살펴보고 있었다.
‘특이한 존재로군.’
그 몬스터가 입을 열었다. 물론 육성이 아닌 공기 전체를 울려서 내는 소리였다. 거기에 세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말이야.”
‘마법 갑옷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계인 것도 아니군. 오히려 드높은 정신체 같기도 한데 그것도 아니고.......’
그 몬스터는 계속 세하를 노려보면서도 뭔가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스터. 아무래도 드레이크가 아닌가 싶어요.
‘드레이크?’
루이제가 꺼낸 말에 세하는 그제야 머릿속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네. 보통 드래곤의 하위개체로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격이 높은 개체가 있지요. 그러니 쉽게 봐서는 안 되겠네요.
루이제의 조언에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문제의 드레이크가 바로 공격할 거 같지 않자 입을 열었다.
“너는 어디서 왔냐?”
‘내가 말해줄 거 같나? 너란 존재가 워낙 특이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로군. 안 그래도 우리 세계에서 설쳐대는 놈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말이야.’
세하는 그쯤에서 드레이크가 말하는 놈들을 알 것 같았다.
“혹시 막 육체를 옮겨 다니거나 멋대로 주물러서 끔직한 것들을 만들지 않나?”
그래서 던진 질문에 드레이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나?’
“알고 있지만 너부터 부시지. 설마 내가 네 놈보다 약하다고 보는 건 아니겠지?”
세하는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협상의 여지는 있었지만 일단 약해보이면 눌린다는 걸 몸으로 깨닫고 있어서였다.
‘웃기는 소리로군. 네 놈의 뭘 보고 내가 말을 해야 하지?’
드레이크는 역시나 싶을 정도로 강하게 나왔다. 세하는 뜬금없이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상황임을 알고 루이제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이 놈 정도면 등급도 높겠지?’
-아무래도 이렇게 지성이 있으면 최소 AAA급 이지요. 드레이크로서는 최상위 존재고요. 마스터. 엘리미네이터 아머의 지속시간도 있으니 역시 쉽게 가셔야겠네요.
루이제가 말하면서 한숨을 쉬는 것 같았지만 세하로서는 명쾌해지니 좋았다. 그래서 당당하게 외쳤다.
“입 닥치고 있어라 이 드래곤이 되다만 쓰레기 놈아!”
‘뭣?!’
갑자기 세하가 폭언을 날리자 드레이크가 놀랐는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하는 빗장이 풀려서 거침이 없었다.
“한창 잘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게이트로 넘어와서 꿀꺽해버린 주제에 뭘 잘났다고 아가리를 놀리는 거냐? 말 안 할 거면 차라리 잘 됐다. 네 놈까지 박살내버리고 죄다 내 경험치로 삼을 뿐이다! 죽어라!”
그렇게 외치면서 세하는 양 손에 커다란 사이킥 블레이드를 하나씩 만들어냈다. 그 살벌한 빛의 칼날들이 그대로 드레이크를 회 뜨는 것처럼 날아드는 순간 갑자기 드레이크가 복부를 부여잡더니 처참하게 울부짖었다.
‘크아아악! 이게 무슨........’
“아. 젠장.......”
세하는 어느새 드레이크의 복부를 뭔가가 찢고 나오는 것을 봤다. 바로 ABW-404의 육체를 차지했던 엑펠트였다. 아무튼 그것은 순식간에 드레이크의 안에서 나오더니 그대로 세하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