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멀티 컨택
ABW-404는 서서히 머릿속을 자극하는 느낌에 눈을 떴다.
‘이건 뭐지?’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갑자기 나타나서 연구진들을 쓸어버리고 자신에게 생각을 주입했던 녀석보다 더 질이 나쁜 것 같았다.
‘죽여야 된다.’
저절로 살의가 돌았다. 매일매일 실험을 빙자해서 가혹한 짓들을 당했지만 그때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크아아아!
목청껏 외쳤다. 주변에 무엇이 있던 자신의 감정을 담아 널리 퍼지도록 외쳤다.
*
“?!”
세하는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 소리를 들었다.
-마스터.
루이제는 이제 포기한 것처럼 음울하게 말했다.
-문제의 대상이 깨어났습니다. 아무래도 마스터의 사이킥 에너지를 감지한 것 같습니다.
“그럼 별 수 없지. 어떻게 하겠어?”
그 반면 세하는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전투를 위한 마음가짐을 다지며 천천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좁은 통로를 지나서 일종의 사거리가 나왔다. 4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고 세하가 바라본 방향에서 왼쪽에는 커다란 도어락이 존재하고 있었다.
콰앙!
그리고 그 도어락이 마치 포탄처럼 터져나갔다. 세하는 공간에 들어서기 무섭게 가만히 서 있어서 거기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크르르르
그리고 한 마리의 늑대가 나타났다. 물론 몸길이만 5m가 넘었고 체고도 3m는 될 대형종이였다.
‘이놈 봐라.’
세하는 그 늑대를 보고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 늑대 또한 푸른 눈을 세하에게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신의 털이 새하얗기 까지 해서 상당히 깨끗하고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크아아아!
하지만 그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늑대의 푸른 두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전신이 회색으로 변하며 그 표면에 수도 없는 가시가 자라나고 있었다.
“개는 맞아야 정신 차리지!”
세하는 애견인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내뱉으며 먼저 달려들었다. 사이킥 블레이드보다는 아예 꽉 주먹 자체에 화염의 사이킥 에너지를 담아서 그대로 늑대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퍼억!
하지만 늑대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하의 주먹에 맞아서 고개가 돌아가기 무섭게 몸 전체를 턴하더니 그대로 앞발을 훅 식으로 세하를 후려갈긴 것이었다.
“이 놈 봐라?”
세하는 헬멧에 제법 묵직한 타격감을 느끼며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차차창!
늑대의 눈앞에 투명한 형태의 칼날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이킥 블레이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정신칼날. 그것이 크게 궤적을 그리며 세하에게 날아들었다.
“큭!”
세하도 양 손에 사이킥 블레이드를 만들어내며 이를 막았다. 출력이 상당해서 세하의 발밑에 불꽃이 일어날 정도로 간신히 버틸 정도였다.
크아아아!
늑대가 포효하자 다시금 사이킥 블레이드가 사방에서 일어나며 세하에게 날아들었다. 세하 또한 수중의 사이킥 블레이드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이를 막아내기 바빴다.
‘어?’
그렇게 날아드는 공격들을 전부 막았다 싶을 때 갑자기 늑대의 커다랗게 벌려진 입이 세하의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콰득!
그대로 늑대의 커다란 입이 세하의 팔을 물었다. 물론 라인버스터 슈트의 두꺼운 장갑은 뚫지 못했다.
“이 자식이.......”
하지만 세하는 제법 심대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늑대가 문 부위에서부터 이질적으로 보이는 생체 조직이 뻗어오며 세하의 전신을 잠식하려 들었다.
퓨화화학!
“감히 어딜!”
세하도 포효했다. 그리고 그 감정이 구현 되서 막대한 화염이 늑대를 휘감았다.
키에에에!
늑대는 온 몸이 화염에 휩싸여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몸부림치는 꼴이 제법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지만 세하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양손을 캐논으로 변화시키고 겨눴다.
“음?”
하지만 이내 놀라서 아무 행동할 수 없었다. 늑대가 불타오르더니 순식간에 굉장히 작은 크기로 줄어들면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루이제.”
-네. 마스터.
“방금 뭐였지?”
-이곳에서 연구하던 생체병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
세하는 우선 문짝이 날아가 버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들어갔다.
“이거 봐라?”
그 안에서는 실험실로 보이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중앙에 깨져버린 대형 포트부터 시작해서 온갖 실험기기들이 보였고 몇몇 시체들을 보고서 그들이 연구진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있던 존재가 풀려난 건가 봅니다.
“그래. 도망치는 법을 아는 거 보니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 같기도 하고.”
세하는 근처의 콘솔에 손을 댔다. 그러자 루이제가 접속을 시도해서 정보를 빼내기 시작했다.
-ABW-404. 실험체의 모델명인 모양입니다.
이윽고 앞서 세하를 공격했던 늑대의 모습이 가상화면으로 펼쳐졌다.
“그래. 일단 도망쳤으니 나중에 다시 보겠네. 이곳에 이런 놈들이 제법 있겠지?”
세하는 늑대, ABW-404의 모습을 눈에 새기며 각오를 다졌다.
“서두르자.”
세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앙관제실로 향하는 경로를 디스플레이에 띄우고 있었는데 오염의 정도나 기타 사항을 무시하고 오로지 최단 코스를 찾아가고 있었다.
*
“민세하 헌터님?”
세하가 방금 20 여 개체의 몬스터들을 썰어버린 직후였다. 다시 레이린의 통신이 들어와서 세하는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러지?”
“지금 코스는 위험해요. 오염 지수가 높은데다가 여러 가지로.......”
“알아. 하지만 시간 끌수록 안 좋을 거야. 아까 제법 강한 생체병기와 만났어. 게다가 그 놈이 사이킥 에너지까지 쓰더라고.”
“네?”
음성만 들리고 있었지만 레이린이 꽤 놀랐다는 건 세하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엑펠트 오염의 수치도 상당해지고 있어요. 마커 이상일 수도 있다고 알페렌 분들도 알려오고 계세요.”
제너럴 마이트의 임원진들이자 엑펠트 융합체인 알페렌. 그들이 우려할 정도면 이곳 시설의 중앙에 존재하는 적은 상당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 놈들 박살내라고 날 보낸 거잖아?”
“하지만........”
레이린의 음성이 염려의 기색을 띠고 흔들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언제나 했던 식으로 해결하고 올 테니까.”
세하는 그렇게 통신을 끊었다.
-참 매정하신 분이네요.
그때 루이제의 딴지가 이어졌다.
“뭐가?”
-여자의 마음을 그렇게 모르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
세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생 때도 주변 마음을 그리 몰라주시고 엘렉티오만 타시고 정비하는데 정신이 팔리셨으니 참 한심해보이십니다.
“그때 내가 한가로이 연예나 할 때냐?”
그제야 세하가 평정을 찾고 물었다.
-지금은 다르니 주변을 좀 더 살피시기 바랍니다.
“아냐. 저 안 쪽에 얼마나 더한 괴물이 있을지 모른다잖냐? 그러니 얼른 가서 박살을 내버려야지. 안 그래?”
-참 한결 같으시네요. 긴장하시는 거 같아서 농 좀 던졌더니 그리 정색하시다니 말이죠.
“........”
세하는 더 이상 답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아무튼 지금은 마치 구름다리처럼 길고도 넓은 폭을 가진 지점에 있는지라 세하는 급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여기에 있었군.”
그때 모든 것이 백색으로 물든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세하는 놀라지 않았다. 무척 구면인 존재라서 오히려 미소를 띠면서 다가갔다.
“마그티스? 왜 겁도 없이 여길 왔냐?”
“그대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찾아오기가 쉬웠지.”
마그티스는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상당히 위험한 곳이다. 온갖 악의가 뒤섞인 곳 같구나.”
“맞아. 인간이라는 것들은 자주 이래. 극한에 치달으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게 인간이거든. 안 그래도 레이린도 걱정이 되서 안절부절 못하는 거 같더라고.”
세하가 레이린의 이야기를 꺼내자 마그티스의 백색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엑펠트의 화신이라는 그녀가 그런 말을 했는가?”
“그래.”
“흐음.......”
마그티스는 턱에 손을 대며 생각에 잠겼다.
“너까지 왜 그러냐? 유령 같은 꼴을 하고서 말이야. 너 회복 좀 해야 한다며?”
“그건 맞다. 하지만 지금 사안이 중대하고 그대는 서두르고 있으니 안 와볼 수가 없었다.”
마그티스는 상념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세하를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그 무엇보다 근원에 가까운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근원?”
세하로서는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마그티스가 어떤 존재인가를 떠올린다면 그것도 이해가 됐다.
“그럼 엑펠트 본체가 있다는 거냐?”
“가능성이 높겠지. 그대도 상대하지 않았나? 지금까지 싸워왔던 존재들과 다르지 않았나?”
세하는 ABW-404를 떠올렸다. 마냥 본능에 따라 달려드는 것이 아닌 사이킥 에너지까지 써가며 지능적으로 전투하던 존재였다.
“아. 머리 아파. 그냥 보이는 대로 쓸어버리면 장땡일 거 같은데 뭐 그리 주변에서는 겁들을 주는 거야.”
세하가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마그티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짊어진 것이 많아서 하는 말이다. 나로서는 지금 이렇게 밖에 그대를 도울 수 없으니까.”
“흐음.”
그래도 세하는 빨리 이성을 찾았다.
“그럼 힘이 회복되면 날 도울 수 있는 거냐?”
“물론이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대의 맹우가 될 것을 맹세한다. 내 세계를 멸망시켰던 간악한 것들에게서 날 해방시켜줬으니 말이다.”
마그티스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총총히 걸음을 옮겨 멀어지더니 그대로 투명해지며 사라지고 말았다.
“거참.”
세하는 그래도 마그티스 덕분에 급한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마스터. 이제 좀 괜찮으신가요?
“그래. 괜찮아.”
세하는 뭔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마음 편히 싸워야지.”
-마스터. 지금까지 마그티스에게 뭘 들은 겁니까?
다시 루이제의 목소리에 날이 서고 있었다. 하지만 세하는 태연했다.
“마냥 열 받아 있는 것 보다는 낫지. 아무튼 심상치 않은 것이 저 안에 있다는 거니까 잘 해보자고.”
-알겠습니다. 뭔가 단순무식한 결론 같지만 말이죠.
“너 진짜.......”
세하는 그렇게 루이제와 티격태격하면서 다시 전진했다. 안 그래도 내벽에서부터 식물 형태의 생체 조직이 일어나고 있는지라 세하는 다시 불꽃을 일으켜야 했다.
*
마그티스는 생각했다.
‘엑펠트. 무엇이던 침식하고 융합해버리고 그 세계를 집어삼켜 버리는 자들.’
그리고 세하의 모습도 떠올렸다.
‘전생에 그들에게 맞서 싸웠던 영웅. 그들에게 더 없는 복수심을 드러내고 있는 자.’
이 둘의 상관관계를 생각하지 마그티스는 제법 긴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지금이야 나는 정령에 가까운 상태이니 주시 밖에 할 수 없겠지. 음?’
그렇게 마그티스가 떠다니다가 문제의 지점을 발견했다.
‘굉장히 큰 시설이군.’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하나 마그티스가 보기에도 눈앞에 보이는 중앙관계실의 거대한 제네레이터가 뭔가의 동력이 되고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는 건 구조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정말 작은 동물이 다가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갓 태어난 강아지 만한 것이 그것에 다가가자 점점 커지는 것이 눈에 띨 정도였다.
‘저것이 민세하와 싸웠던 피조물인가?’
점점 커지는 그것은 처음 세하와 마주쳤을 때처럼 커다란 늑대로 변했다. 그리고 특이할 만한 존재가 더 나타났다.
‘저건.......’
마그티스로서도 저절로 살의가 치솟을 뻔했다. 제네레이터 안쪽에서 온통 빛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체구는 보통 키 정도였지만 그 존재가 나타나자 주변의 공기가 변하는 것 같았다. 늑대, ABW-404는 그것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이내 그 인간의 형태가 ABW-404의 내부로 스며들었다.
‘내 세계에서 보던 것이군.’
ABW-404가 돌연 두 다리로 일어났다. 이미 표면은 회색으로 변했고 다시 핏빛으로 변했다. 온몸의 가시는 더더욱 예리함을 더해서 그 끝이 닿는 순간 살점은 물론 뼈까지 도려낼 것처럼 흉악하게 휘어지고 일그러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저것에 대적할 순 없지.’
마그티스는 미련 없이 허공에 녹아들듯이 사라져갔다.
‘민세하. 그대를 믿겠다. 그대야 말로 저것들의 대적자니까.’
그 순간 ABW-404가 포효했다. 그러자 그 주변에서 공간의 일그러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게이트였다. 그렇게 발생한 게이트에서는 웨어울프나 웨어베어 같은 강력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