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5화 〉연결되는 것 (35/72)



〈 35화 〉연결되는 것

“하퍼 수석조사관님. 다 됐습니다.”

경비 병력이 말을 걸자 토마스가 앞으로 나섰다.
망막 센서와 지문 센서는 기본이었다. 거기에 토마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제너럴 마이트 수석조사관 토마스 하퍼입니다.”


음성 인식까지 끝나자 두터운 금고 같은 문이 둔중한 굉음을 울리며 열렸다.

“자. 들어가시죠.”


토마스가 앞장서서 걸었다. 세하는 문득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참아내고 그 뒤를 따랐다.

‘흐음. 의외로 괜찮은데?’

처음에는 어두웠지만 토마스와 세하가 들어서자 환해졌고 장내는 무기질의 회의실 같은 분위기였다.
직사각형의 긴 테이블이 존재하고 있었고 8개의 의자가 있었다. 세하는 제일 근처에 보이는 의자에 앉았고 그건 토마스도 마찬가지였다.

“하퍼 조사관님. 여긴.”


세하가 뭔가 물어보려 할 때 토마스가 돌연 박수를 쳤다.

“이제 임원진 분들께서 입장하실 겁니다.”


토마스의 말에 세하는 일순 긴장했다. 하지만 사방의 벽에 영상이 켜지는 걸 보고 순간 맥이 빠져야 했다.


“당신이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블랙메탈. 민세하 헌터군요.”

5명의 얼굴이 그 영상 안에 보였다. 일종의 화상 회의 같은지라 세하는 자꾸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대답도 시원치 않았다. 그 모습에 토마스가 미소를 지어서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직접 나타나지 못하고 이렇게 멀리서 뵙게 돼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5명 중 제법 노회한 정치인으로 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세하는 그를 보기 보단 근처에 있는 토마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눌리는 기색 없이 문제의 상자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임원 여러분.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엑펠트의 마커가 들은 상자였다. 그걸 확인한 임원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설마.......”

그들 중 30대 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부드러운 인상의 여성이 말했다.

“네. 이번에 콜로라도 주 지역에서 발견한 엑펠트의 마커입니다. 여기 계신 민세하 헌터님의 활약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봐주시죠.”


토마스가 상자를 개방했다. 그러자 희미한 빛을 발하는 작은 구체가 떠올랐다.


“오오... 이건 그리운 느낌이로군.”
“하지만 불길한 것이기도 하지. 이것 때문에 다른 차원의 이들이 피해를 보게 되니까.”

세하는 임원들이 중얼거리는 말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이걸 아십니까?”


세하가 묻자 임원들의 시선이 세하에게 집중됐다. 비록 가상화면을 통한 것이지만 세하는 이상하게 직접적으로 시선이 집중되는 기분을 느꼈다.

“알고 있지. 마커. 우리 동족들이 다른 차원을 침공할 때 표식 내지 워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이미  알고 온 것 아닙니까? 민세하 헌터님. 하퍼 수석조사관에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까?”


임원들은 오히려 세하에게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세하는 다시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오해가 조금 있었던 것 같군요.”

토마스는 몸을 일으키더니 임원들의 영상을 가리켰다.

“여기 계신 5분은 지금  자리에 실재하고 계신 겁니다.”
“뭐?”

세하고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토마스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엑펠트 이십니다.”
“........”


세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레이린을 만났던 경험이 있는지라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우선 한껏 긴장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설마 했더니 사람을 잡는 군요. 다섯 분이나 계신 겁니까?”


세하의 질문에 임원들은 어딘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건 우리의 대외적인 모습들이지.”
“정말 실제로 모습을 드러낼 때는 이 모습을 본 딴 안드로이드를 쓰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말들에 세하는 자꾸 위화감을 느꼈다.  사이 토마스가 회의장 구석에 있는 콘솔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테이블의 중앙이 열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뭔가가 올라와 고정되자 세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보통 사람 머리의 2배 정도 되는 구체였다. 그리고  안에는 마치 전기처럼 바직거리는 기운들이 뭉쳐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마치 사람의 뇌와도 같아 보였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를 유지하는 본체라네.”


임원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임원들의 영상은 꺼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중대한 반역을 했다는 명목으로 본체를 잃고 존재를 소멸당할 뻔했지. 하지만 뜻을 뭉친 우리 다섯은 하나가 됐다네. 우리의 지식과 기억을 담은 융합체로서 말일세.”
“.......”

아예 직접 융합체가 되어버린 이들. 그것이 제너럴 마이트의 임원들이라는 사실에 세하는 한동안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마스터?


물론 루이제가 즉각 불러서 세하가 넋을 놓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오히려 얼굴을 차갑게 굳히면서 다음 행동을 했다.

“레이린. 준비 됐어?”

순간 토마스가 당황했다.

“민세하 헌터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 쪽에서 어렵사리 정체를 드러내셨으니 우리 쪽도 소개시켜 드릴 사람이 있어서 말이죠.”

세하는 그렇게 양해를 구한 후 다시 통신을 이었다.

“현재 마커의 좌표가 활성화된 상태야. 지금 올 수 있지?”


세하의 물음이 이어지기 무섭게 장내에 공간의 일그러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토마스가 놀랐지만 세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우리 협회 측에서도 성의를 보이려는 겁니다.”


세하가 말하는 사이 공간의 일그러짐, 게이트에서 레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따라 더욱 단정해 보이는 정장 차림인 그녀는 상당히 긴장한 표정으로 장내에 들어섰다.


*
“굉장하군! 이렇게 동족을 만나게  줄이야.”


제너럴 마이트의 임원들, 엑펠트의 융합체는 레이린이 나타나자 금세 그 기운을 알아채고 놀라고 있었다.


“저도 그래요. 레이린 리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소속입니다.”

레이린은 우선 융합체를 앞에 두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허허허. 우리와는 다른 경우인 것 같군.”

인자한 노인의 음성으로 융합체가 말했다. 그러자 레이린은 잠시 침을 삼키더니 긴장 어린 어조로 답했다.


“굉장히 어린 상태에서 뜻이 있는 인간의 육체를 취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이 모습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반갑군 그래.”


융합체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에는 민세하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동족을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요. 민세하 헌터님.”


이번에는 부드러운 여성의 음성으로 답하는지라 세하는 절로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뜻이 통할 거라 생각해 불렀습니다.”
“마커를 통하다보니 게이트로 이동이 가능한 모양이군요. 이건 앞으로 전략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 같군요.”


융합체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들이 담긴 구체를 울리며 재차 말했다.

“우리는 알페렌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알페렌.......”

레이린은 그 이름을 입에 담더니 갑자기 두 눈이 흐려졌다.

“왜 그래?”

세하가 그걸 놓치지 않고 묻자 레이린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엑펠트의 언어로 구속된 죄라는 뜻이에요. 저 분들 스스로를 옥죄는 의미 같아요.”
“.......”

세하도 그 이름을 입에 담아봤다.

“뭐 아무튼 각자의 생각을 드러내는 거니 존중해드려야겠지.”

세하는 그렇게 정리하더니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레이린은 바로  자리에 앉게 했다.


“그럼 레이린까지 왔으니  본질에 대해서 말해야겠지?”

세하는 루이제의 존재는 숨기고 자신이 전생 아니 회귀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알페렌과 토마스마저 놀라서 격한 반응을 보일 지경이 되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토마스가 재차 묻자 세하는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그 때문에 엑펠트의 오염이나 게이트의 출몰이 뒤섞인 것 같아서 기분이 복잡합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득인 것 같군. 민세하 헌터님.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의 전생에서는 이보다 엑펠트의 위험이 심대할 정도였다는 말이 되니까요.”

알페렌은 레이린처럼 긍정의 뜻을 보였다.


“지금은 지구를 중심으로 국지적인 오염. 그것도 충분히 막을  있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와 레이린이 만난 이상 정보의 공유나 오염에 대한 조사도 면밀하게 이뤄질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알페렌은 지금 상황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세하도 거기에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다행이군요. 그럼 앞으로의 공조에는 문제가 없겠습니다.”
“다만.”


알페렌 중 지금껏 말이 없던 소년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대한민국의 헌터 협회와 우리 제너럴 마이트가 공조한다는 것이 표면에 드러나서는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현재 각 헌터 길드들은 자신들의 이득만을 생각하며 움직이고 있고 아직 오염 현상에 대한 주의가 없지. 봉황 길드가 함부로 접근하다가 민세하에게 털려버린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뭔가 가벼운 반말 투로 말했지만 세하도 충분히 공감이 가고 있었다.


“아무튼 알페렌과 여기 레이린이 계속 공조해간다면 적어도 엑펠트의 오염에 대해서는 앞으로 감지나 조사가 쉬워 질 걸로 생각됩니다. 그건 동의하시겠죠?”

세하가 알페렌을 보고 말하자 곧 긍정의 뜻이 들려왔다.


“물론일세. 그리고 부탁이 있네.”
“네?”


갑작스러운 부탁에 세하가 놀랐지만 뒤이은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동족인 레이린 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네. 하퍼 수석조사관과 함께 자리를 비켜줄  있겠나?”
“그렇게 하시죠.”


세하는 깔끔하게 승낙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세하와 토마스는 회의장을 나섰다. 다시 금고 같은 문이 닫혀서 들어올 때 앞서 했던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토마스가 낄낄 거렸지만 세하는 달리 답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임원 분들께서 동족을 만난 것이 기쁘신 모양입니다.”

반면에 토마스는 제법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세하는 괜한 심술이 나서 말했다.

“전 불안합니다만?”

원래 회의장 앞에 4명의 파워드 슈트 차림의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지금 멀리 엘리베이터 근처에 서 있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하의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안에 계신 양반들이 혹시라도 엉뚱한 짓을 할까 불안하기도 합니다.”
“아항! 레이린 리 씨를 좋아하시는 군요.”


그리고 반격에 나선 토마스의 발언은 제법 엉뚱해서 세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 그런 법이죠. 아무래도 비밀을 공유하셨다니.”
“그런 거 아닙니다.”

세하는  잘라 말했다. 그럼에도 토마스의 입가에는 제법 음흉해 보이는 미소가 감돌았다.

“잠시라도 곁에 안 보이면 불안하신 모양이군요. 다 압니다.”
“에휴......”


세하는 힘 빼기 싫어서 더 이상 발언을 삼갔다. 토마스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이번에는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생각 외로 화기애애하게 말하고 있어서 세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보안 구역이라면 좀 엄격해야 할 텐데.’
-각자의 룰이라는 것이 있겠죠.

루이제의 말대로 지금 토마스와 병사들의 대화는 일단 편해 보였지만 어딘가 형식이 보였다. 임원진을 지칭하는 단어도 그렇고 지금 세하를 지칭하는 단어도 그랬다.


‘무슨 콜사인이나 암호처럼 말하는 군.’


세하는 일단 신경을 끄기로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레이린의 통신이 바로 세하에게 들려온 탓이었다.


“지금 안으로 들어와 주시겠어요?”


아무튼 뭔가 대화가 오간  같아서 세하는 토마스를 불렀다. 토마스는 두 말 없이 앞서 했던 보안 절차를 다시 시행해서 회의장의 문을 열었다.


“어?”


세하는 다시 회의장에 들어서자마자 레이린이 어느새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알페렌. 무슨 일입니까?”

토마스도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는지 임원진, 알페렌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레이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페렌 분들과 대화를 나눠봤어요. 그리고 여러분께 조사를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세하는 그 말에 뭔가 귀찮아짐을 느꼈다. 하지만 피할 일도 아니어서 한숨을 푸욱 내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그러자 레이린은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북미 대륙 내에 대규모 균열 지대가 있어요. 그곳의 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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