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의문과 각오
레이린의 검은 두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이에요?”
세하가 레이린의 얼굴에서 큰 동요를 읽었다.
-마스터. 악취미세요.
세하가 레이린을 좀 오래 쳐다보고 있는 탓에 루이제가 태클을 걸었다.
“아, 미안.”
그리고 세하는 루이제에게 사과한다는 걸 입 밖으로 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레이린의 두 눈에 어느새 의혹이 가득 서리게 되었다.
“네? 뭐가요?”
“하하하...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튼 네 말대로 제너럴 마이트에서는 엑펠트를 알고 있었어. 일라이저의 형이라는 토마스 하퍼였지.”
“토마스 하퍼.......”
레이린은 잠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각성능력은 전투에 맞지 않지만 상당히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라고 들었어요.”
레이린의 기억에 있는 존재인지 곧장 답이 나왔다. 그러자 세하가 제안했다.
“이 마커는 토마스에게 넘기는 게 어때?”
“네?”
레이린은 생각 못한 일이라서 잠시 얼굴이 굳어졌다.
“엑펠트를 알고 있는 이상 제너럴 마이트의 상층부도 잘 알고 있거나 아니면 엑펠트에 준할 가능성이 있다고 난 보고 싶어. 그러니 이 마커를 매개로 한다면 너도 바로 게이트를 열고 와서 만날 수 있지 않겠어?”
이어진 세하의 제안에 레이린은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어때?”
다시 세하가 묻자 레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름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동족과 관련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아요. 하지만 이건 협회장과 협회 분들과 상의를 해봐야겠어요.”
“하지만 너무 길면 안 돼. 이번 일이 끝났으니 바로 제너럴 마이트 본사로 갈 거 같거든.”
“알아요. 길지 않을 거예요. 결정되는 대로 바로 통신을 넣을 게요.”
레이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대로 나타났던 게이트 안으로서 사라졌다.
그제야 세하는 완전히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앞에서도 게이트가 나타난지라 세하는 입맛이 썼다.
“무슨 던전 게이트 클리어한 셈이 된 모양인데 별 보상은 없네.”
세하는 코어라던가 몬스터의 부산물 등등을 아쉽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문제의 마커를 집어서 자신의 아공간 인벤토리에 넣어버렸다.
“바빠질 거 같으니 잡생각은 버려야지.”
세하는 자신도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
“어?”
세하가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본 광경은 꽤나 엉망이 된 주둔지의 모습이었다.
그 전에 세하가 힘을 썼을 때는 불의 이미지로 사이킥 에너지를 써서 몬스터의 사체가 거의 남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수많은 인력과 장비들이 동원 되서 사방에 흩어진 몬스터의 사체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아무래도 지난 시간 동안 습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도 꽤 지난 것 같군요. 지금은 아침입니다.
루이제가 빠르게 판단하고 말했다.
“습격?”
-네. 아무래도 마스터가 본진을 타격하자 안 되겠다 싶어서 외부를 공격한 거겠죠. 상당히 격렬했지만 무사히 막아낸 것 같습니다.
세하가 왠지 허탈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는 데 갑자기 누군가 그를 불렀다.
“민세하!”
세하가 급히 뒤를 돌아보니 라설연이 식식대면서 서 있었다. 아무래도 능력을 많이 쓴 탓인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파리해보일 정도로 안색이 좋지 않았다.
“너 대체 어디 갔다가 온 거야!”
“미안. 들어간 김에 처리 좀 하느라고. 완전 던전이었어.”
“으음.......”
세하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자 라설연도 간신히 화를 참는 모습이었다.
“간밤에 몬스터들이 들이닥쳤나 보군.”
세하가 다시 묻자 라설연은 앞서 열 낸 것이 허망할 정도로 기운이 죽어 말했다.
“하아... 첫날에 웨이브를 막았던 것은 장난인가 싶었어. 끝도 없이 몰려와서 주둔지 내 병력들이 멘붕이 와서 흔들릴 지경이었다니까. 그래도 간신히 막다보니 아침이 됐고 약속이나 한 듯이 몬스터들이 갑자기 숨통이 끊어지는 거야.”
라설연은 지난밤의 격전이 끔찍했는지 온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아하하! 언니. 왜 그래? 오! 세하 오빠! 살아 돌아왔어요?”
그 반면에 행색은 좀 지저분해졌지만 밝게 웃고 있던 유주리가 다가왔다.
“잘 버텼네.”
“그럼요! 오빠한테 인정받으려면 이 정도도 못해서 되겠어요?”
가히 씩씩하고 밝게 외치는 유주리의 모습이 빛나보였다. 그래서 세하는 어느새 아빠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일라이저와 하워드와 다가왔다.
“여. 브로. 살아있었네.”
“너도.”
세하는 일라이저와 주먹을 부딪쳤다. 그건 하워드와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들 살아 있었네.”
세하가 그렇게 말하자 일라이저는 골치가 아팠는지 인상을 썼다.
“개떼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몇몇 헌터나 병사들이 절망감에 자살까지 하려는 걸 막을 정도였다고.”
“........”
아마도 끝도 없이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보고서 보통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기에 세하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말이야. 형이.......”
“뭐? 토마스 조사관이 뭐?”
일라이저가 다시 어렵사리 꺼내는 말에 세하는 문득 불길함을 느꼈다.
“망할 동생아. 말을 그런 식으로 하면 이상하잖아.”
하지만 문제의 인물이 바로 일라이저의 뒤에 나타났다. 거기에 일라이저는 뜨끔해서 물러났고 토마스가 얼굴에 제법 피로함과 긁힌 상처가 있는 상태로 나타났다.
“토마스 조사관?”
세하가 그런 그의 모습에 놀라서 물었다. 거기에 토마스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몸을 보며 말했다.
“워낙 상황이 급박해서 말입니다. 저도 손수 나서서 싸웠죠.”
토마스의 복색을 보아하니 전투복에 방탄조끼까지 입고 있었고 제법 큰 저격총마저 들고 있었다. 죄다 더러워지고 손상된 흔적이 가득한 걸 보니 그도 상당히 격전을 치룬 모양새였다.
“아무튼 이렇게 살아 돌아오셨고 아침에 몬스터들이 한 번에 쓰러질 걸 보니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겠죠? 일단 들어오시죠.”
토마스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몸을 돌렸다. 세하는 그 뒷모습을 조용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
한밤의 격전을 증거 하듯 지휘 막사 내도 성하질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이중으로 막사를 친 토마스의 집무실만은 무사해서 세하와 토마스 두 사람은 무사히 독대할 수 있었다.
“엑펠트의 마커가 있었습니다.”
“마커였군요.”
토마스는 세하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들었다.
“네. 그 마커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조종하고 복제하고 왜곡시켰습니다.”
세하는 마그티스를 만난 것도 털어놓았다. 토마스는 양 손에 깍지를 낀 채 세하의 말이 끌날 때까지 경청했다.
“저도 그 점을 생각하긴 했습니다. 아무래도 게이트와 엑펠트는 별개라는 느낌이 강했고 서서히 엑펠트의 오염이 게이트마저 영향을 미치는 걸로 보였죠.”
세하의 말을 듣고 나서 토마스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마커는 여기에 있습니다.”
세하가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었다. 마치 몬스터의 게이트처럼 공간의 일그러짐이 일어났지만 그 기세가 산들바람 수준인 걸로 보아 그게 헌터들도 사용하는 아이템이라는 걸 대번에 알 정도였다.
“흐음.”
흐릿한 빛을 발하는 광구가 떠올랐다. 토마스는 그걸 가볍게 받아내더니 침음성을 울렸다.
“확실히 마커군요.”
레이린처럼 뭔가 효과가 일어나진 않았지만 토마스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고 준비한 것처럼 보석함 크기의 특수해 보이는 박스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역시 대비가 되어 있었어.’
토마스가 마커를 박스에 갈무리하는 것을 보며 세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튼 토마스가 특수 박스에 마커를 봉하자 혹시나 싶었던 오염 반응이 깨끗이 사라졌다.
“제너럴 마이트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토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뭐 됐습니다. 아무튼 약속대로 제너럴 마이트의 상층부를 만나게 해주시죠.”
“네. 이미 훌륭히 스스로를 증명하셨으니 어려울 것도 없겠지요.”
토마스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승낙했다. 거기에 세하는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혹시 그 날 너무 놀라시면 안 됩니다.”
“?”
토마스의 머리 위에 순간 물음표가 떠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세하는 그걸 무시하고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
로키 산맥 초입에 있던 주둔지는 사흘 정도 지나서 철수가 완료됐다. 더 이상 그 주변에 게이트나 이상 현상이 발생하지 않아서 내려진 조치인데 함께 한국에서 온 라설연과 유주리는 귀환길에 올랐지만 세하는 주둔지를 철수하며 제너럴 마이트의 행렬에 합류해 있었다.
“불편하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세하의 옆자리에 앉은 토마스는 연신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탑승한 차량이 험비에 가까울 정도의 튼튼함을 중시한 차량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는데 세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안전해서 마음에 드는데?’
아무튼 차량은 그렇게 험지와 군사용으로 쓰이기에 적절한 것이면서 정작 뒷자리에 앉은 세하와 토마스는 무슨 대기업의 중진들 마냥 정장을 빼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너럴 마이트 자체가 엘리트주의. 특히 상층부면 그게 심해서 격식을 중시하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복색에 대해서 신경이 쓰여서 한마디 했다. 거기에 세하는 제대로 말을 받았다.
“나중에 놀랄 일이 있을 텐데 그때만 참아주시면 됩니다.”
“.......”
토마스는 거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다. 아무튼 제너럴 마이트 소속의 차량들은 계속 전진해서 어느새 넓은 평야에 건설된 방벽에 다다랐다.
‘방벽?’
세하는 마치 몬스터들을 막기 위한 시설 같아서 잠시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아무래도 보안을 요구하다 보니 오히려 외지에 시설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가 이를 설명했고 방벽의 초소에서 검문을 거쳐서 차량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방벽 안쪽에서는 첨단기술단지임을 알 수 있는 드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이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엿보였다.
‘무슨 SF 영화에 나오는 요새 같군.’
대구경 체인건이나 미사일 포트 같은 것은 기본이었다. 방벽위에 늘어선 병력들도 가히 정예라는 것을 드러내듯 하나 같이 기세가 엄정해보였다.
“자. 이 쪽입니다.”
어느새 차량이 멈췄고 토마스가 먼저 내려 세하를 인도했다. 일라이저와 하워드도 다른 차량에서 내렸지만 아무래도 갈 곳이 다른지 세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작별을 표하고 있었다.
‘그래도 고위 헌터들인데 같이 못가는 건가?’
세하는 일라이저와 하워드의 그런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다. 아무튼 전형적인 인텔리전트 빌딩의 내부로 들어갔고 그 안에서도 중무장한 병사들이 보안절차를 시작했고 무사하게 통과했다.
‘네가 안 걸려서 다행이다.’
그 과정이 제법 삼엄해서 세하가 루이제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전 단순한 기계 같은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지. 아주 대단하신 사이킥 생명체니까.’
세하가 그렇게 루이제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토마스는 지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가동시켰다.
그러자 세하와 토마스를 4명의 중무장한 병사들이 따라붙었다. 하나 같이 고성능의 파워드 슈트를 장착하고 있어서 마치 로봇처럼 보이는지라 세하가 움찔할 정도였다.
“보안층까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이들입니다. 부담 갖지 마시길.”
아무튼 호위 병력까지 함께 해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고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레이린이 있던 곳과 비슷한데.’
세하는 협회에서 지하로 내려가던 기억이 오버랩 되는 걸 느꼈다.
‘저것도 잘 가지고 있군.’
세하는 토마스가 마커를 넣은 박스를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예상대로 되겠군. 하지만 반응이 어느 정도냐가 걱정이긴 하네.’
이곳으로 오기 하루 전에 레이린에게 통신을 받았다. 각오가 됐으니 신호만 보내라는 식이라서 세하는 그녀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와야 할 때가 된 것 뿐이겠지.’
세하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러자 어느 새 해당 층에 도착했는지 호위 병력들이 먼저 나가갔고 그 뒤를 세하와 토마스가 따르게 되었다.
“음.......”
세하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어딘가 회의하기 위한 공간보다는 뭔가 단단히 보안이 이뤄지고 숨겨 놓은 금고 같은 문이 보였다.
그 앞에도 호위 병력만큼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토마스는 그때 세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좀 특이한 문이지만 들어가시면 적응이 되실 겁니다. 이 안에 우리 제너럴 마이트의 임원 분들이 계십니다.”
세하는 일단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혹시 일이 잘 못되면 엘리미네이터 아머라도 가동해서 빠져나가지 뭐.’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지만 기왕 온 것에 세하는 작정하고 걸음을 옮겼다. 호위 병력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고 금고 같은 문을 지키고 선 병사들이 그 앞의 패널을 조작해서 문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