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구원과 가능성
융합체라는 것들은 처음에 볼 때는 그냥 별개의 존재로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 끔찍함에 놀라고 정신적인 타격을 받아서 몸이 굳기 마련이었다.
‘지랄 맞은 소리지.’
물론 세하에게는 아니었다. 눈앞에 나타난 4미터 정도는 될 화염의 거인. 하지만 그 불타는 인간의 형상을 자세히 본다면 그 표면에 온갖 것들이 뒤엉켜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람. 동물 그리고... 아 이제 언급하기도 지겹다.’
세하는 화염 거인 형태의 융합체에게서 많은 것들이 얽혀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거기에 대한 사념을 읽을 수 있었지만 이내 떨쳐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돌격했다.
퍼억!
라인버스터 슈트의 양 주먹은 이미 강렬한 한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중하기 무섭게 화염 거인의 타격점이 삽시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원소 변환........
루이제는 그런 세하의 전법에 제법 놀란 것 같았다.
아무튼 위에서 아래로 내리 찍는 것 같은 훅에 강타 당한 화염 거인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세하는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대로 뛰어 올라 어퍼컷 식으로 화염 거인의 턱을 강타하고 뛰어오른 상태에서 양 주먹을 캐논으로 변환해 이번에는 강렬한 냉기의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콰드드드
삽시간에 화염 거인의 몸체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세하는 그렇게 화염 거인을 침묵시킨 후 착지해서 주변을 살폈다.
-마스터. 마그티스는 이미.......
“알아.”
화염 거인이 뒤에서 기습하는 바람에 마그티스의 거체는 이미 녹아 없어진 지 오래였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가디언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세하는 이를 뿌득 갈았다.
“저 개 같은 놈이.......”
루이제는 순간 세하가 가면 갈수록 지오 그라함에 가까워짐을 깨달았다.
‘영혼의 충돌이 없는 게 다행이군. 자연스럽게 동화된달까.’
아무튼 전생처럼 엑펠트나 융합체에 대한 투쟁심이 대단했다. 당장 양 손에 사이킥 블레이드를 발출하더니 그대로 얼어붙은 화염 거인을 후려치려고 달려들고 있었다.
크아아아!
갑자기 화염 거인이 포효하더니 자신을 둘러싼 얼음을 부셔버렸다. 그리고 삽시간에 주변을 화염으로 휘감았다.
“이거야 원........”
세하는 화염 거인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서 어이가 없었다. 화염의 기세가 점점 커지면서 형상도 커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앞서 당해버린 마그티스와 같았다. 다만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 격렬한 화염이었고 그 몸 주변에 온갖 생명체들의 형상이 드러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엘리미네이터 아머. 기동합니다.
세하의 명령에 따라 루이제가 움직였다. 세하도 엘리미네이터 아머 상태로 전환했다. 이미 앞서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변환했었고 오가면서 라인버스터 슈트의 리버스 필드로 사이킥 에너지를 충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워워워!
이제 화룡이 되어 버린 융합체가 포효했다. 긴 목과 머리만 해도 20m가 넘었고 주변에 일렁이는 온갖 형태의 존재들도 화염에 휘감겨서 세하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콰아아아!
하지만 세하가 엘리미네이터 아머의 형태를 갖추자마자 그 주변에서도 강렬한 냉기가 폭발했다. 거기에 휘말린 화룡의 수하들이 그대로 얼어붙더니 산산조각 났고 화룡은 더욱 더 자신의 화염을 키우며 부딪쳤다.
그 여파로 사방에 지독한 수증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화룡은 거기에 물러설 생각이 없는 지 그 거체로 돌진해서 세하에게 부딪쳐왔다.
“이 자식이!”
세하도 양 손에 냉기를 휘감고 화룡의 양 턱을 붙잡았다. 높이에서 차이가 남에도 세하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턱을 잡고 있는 세하의 양손이 점점 과열되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마스터. 아머의 양 손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알아!”
그럼에도 세하는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다. 더욱 두 눈에 힘을 주며 정면을 노려볼 뿐이었다. 눈앞의 디스플레이에 아머의 양손 파츠가 한계에 달했음을 표시하고 있었다.
크워워워!
그리고 붙잡힌 화룡의 입 안에서 화염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형태는 시서펜트면서 브레스는 화염이냐!’
마치 불로 이름난 레드 드래곤처럼 브레스를 뿜으려 드는 것에 세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튼 디스플레이에서 요란할 정도로 양손 파츠의 파손을 알려왔다.
파콰콰쾅!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화염의 브레스도 아니었고 냉기의 폭발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순수한 충격파가 사방을 휘감았다.
키에에엑!
거기에 휘말린 화룡이 그대로 화염이 흩어졌고 그 형태조차 박살이 나서 산산조각 났다.
세하 또한 엘리미네이터 아머의 형태가 부서지며 그 안에서 간신히 라인버스터 슈트 상태로 지면에 나뒹굴었다.
“루이제. 상태 보고 해줘.”
그럼에도 세하는 침착하게 말했다.
-엘리미네이터 아머 모드는 일단 2일간 사용불가입니다. 라인버스터 슈트의 파손율은 20퍼센트 미만입니다. 아머의 양손을 폭발시켜서 수증기 폭발을 일으키시다니 굉장하십니다.
세하가 임기응변으로 대처한 것에 비해 피해가 크지 않은 편이었다. 세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화룡의 머리가 떨어진 지점으로 향했다.
사방에 자욱하게 일던 수증기가 한 번의 폭발로 말끔하게 날아가 버렸다. 그 여파로 지면과 천장 등에 금이 가 있었지만 당장 무너질 걸로 보이진 않았다.
‘막아야... 이렇게 침입을 허용해서는........’
화룡이 사라진 지점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구체 같은 것이 보였다. 예전 연천 균열 지대의 던전 게이트에서 보았던 융합체의 마커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 세하는 거기에 손을 뻗었다.
-레이린 리가 말하던 마커군요. 이것이 여기에 심어져서 이번의 사태를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세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이린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민세하 헌터님?”
일단 영상은 보이지 않았고 레이린의 놀란 음성부터 들려왔다. 세하는 일부로 담담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내가 지금 왜 말하는지 알겠지? 이거 느껴져?”
“네! 마커군요! 그곳에도 엑펠트의 흔적이 있던 거군요!”
레이린은 일견 흥분된 반응이더니 통신이 끊겼다. 그리고 세하가 있는 장소에 공간의 일그러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아.......”
이번에는 레이린 혼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급하게 와서인지 가벼워 보이는 스포츠 웨어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청초함이 오히려 돋보일 지경이어서 세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스터.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이럴 땐 좀 조용히 해.”
레이린은 예전처럼 엑펠트의 마커를 감싸 안았다. 마치 신실한 성녀가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성스러움마저 느껴지는 풍경인지라 세하는 입을 다물었다.
“됐어요.”
그러기를 수 분 여. 레이린이 마커를 바닥에 놓으며 물러섰다.
“너 괜찮아?”
세하는 레이린의 상태가 어느 때보다 감정적으로 보여서 물었다. 그녀의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보였기 때문이었다.
“엑펠트에게 휘말렸던 이들의 감정이 전해 졌나 봐요. 혹시 이 전에 누굴 만나지 않으셨어요?”
레이린의 물음에 세하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라인버스터 슈트로 몸을 감싼 상태라서 레이린에게 그 표정이 보이진 않았다.
“있긴 했어. 마그티스라는 녀석이었는데 당해버렸지.”
세하가 어렵사리 말을 꺼내자 레이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그티스요?”
“그래... 대화를 좀 하려 하니 융합체 놈이 뒤에서 튀어나와서 말이야.......”
세하가 그렇게 말끝을 흐리는데 갑자기 레이린이 흠칫하며 몸을 돌렸다.
“어?”
세하는 레이린의 뒤에 나타난 존재를 보고서 혀를 찼다.
“이제야 자유롭게 됐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온통 새하얗게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 아름다움이 지나쳐서 이미 다른 세상의 존재라는 것이 훤히 드러날 지경이었다.
“마그티스?”
세하가 묻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세하와 레이린의 앞까지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계의 단죄자인 민세하. 그대에게 감사한다.”
뭔가 낯 뜨거운 느낌이라서 세하는 버벅였다.
“그건 무슨........”
“그대 덕분에 내가 풀려날 수 있었으니 이건 당연한 인사다. 그리고.......”
마그티스의 하얗게 빛나는 눈이 레이린을 향했다. 거기에 레이린이 흠칫하자 마그티스는 쓴 웃음을 지었다.
“나를 농락했던 것들과 비슷한 느낌이면서 뭔가 다르군.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대화를 해도 되겠지?”
*
이제 주변의 공간은 완연히 투명한 물처럼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세하와 레이린은 숨을 쉬거나 지면에 발을 딛는 것이 평지와 같았다. 세하는 아예 슈트까지 해제한 상태라서 그 편안함을 가득히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다른 세계에 있었는데 엑펠트 놈들에게 쫓겨서 여기에 왔고 힘을 빨리고 있었다 이거냐?”
세하는 마그티스의 설명을 듣고서 다시 묻고 있었다.
“그렇다. 그 놈들은 어느새 주변의 생물, 광물 그 외의 모든 것을 잠식하더니 내가 있던 세계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다급히 도주하다보니 이곳에 왔는데 저 존재가 나에게 들러붙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그티스는 여전히 지면에서 빛나고 있는 광구, 마커를 가리켰다.
“저것에는 온갖 사념이 담겨있더군. 아마도 가공하고 또 가공했을 거다. 그 안에는 그놈들에 당했던 내 세계의 모든 이들의 사념이 담겨있을 거다.”
“.......”
레이린은 죄책감에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그티스는 소년의 얼굴로 마치 노인과도 같은 웃음을 지었다.
“죄책감 가질 것 없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는 상당히 특이한 사례로 기록될 만하고 속죄하며 살아가는 것 같으니까.”
“그런가요........”
레이린은 동족의 잔혹함이 다른 세계까지 뻗어 있음을 깨닫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그티스는 이를 탓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래 살다보면 많은 게 보이는 법이지. 그러니 포용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법이지.”
“그럼 넌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어느새 세하가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원래 있던 세계는 멸망했고 나는 살아있으니 이 세계에 뿌리를 내려야겠지.”
“.......”
순간 세하는 놀라서 다시 물었다.
“여기서 산다고?”
“걱정하지마라. 너나 저 아가씨한테 빈대 붙어 사니 하는 꼴은 안 나올 테니까. 나는 말 그대로 자연의 정령에 가까운 존재다. 시서펜트의 육체에서 해방되었으니 어디든지 존재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지. 하지만 워낙 힘을 많이 잃어서 당분간은 아무나 한 테도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살아가야겠지.”
세하는 군식구가 안 생긴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런 세하의 모습에 레이린이 짐짓 그를 노려보았지만 마그티스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겠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존재들은 죽느니 만도 못한 꼴을 겪을 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 이번 같은 일이 처음은 아니겠지?”
“물론.”
세하는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니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엑펠트... 그 놈들의 싹까지 없애버릴 거다.”
“하하하... 여기 이 아가씨도 그들의 동족이지 않는가?”
“.......”
세하는 어느덧 자신이 흥분한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하며 기세를 죽였다. 마그티스는 이제 서서히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가봐야겠군. 워낙 착취당하다 보니 기운이 쇠해서 말이야. 어느 정도 회복이 된다면 연락을 해주지.”
“알았다. 몸조리 잘하라고.”
세하는 미련 없이 마그티스를 보냈다. 거기에 마그티스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투명한 물속 같은 풍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하는 거기에 잠시 눈을 두더니 이번에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레이린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아... 미안해요. 민세하 헌터님.”
레이린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여전히 바닥에서 빛나고 있는 마커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그티스님의 말을 듣고서 생각해봤어요.”
“뭘?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아니고?”
세하가 장난기 어리게 하는 말에 레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넓은 규모로 오염이 진행될 수 있겠다는 거죠.”
제법 암담한 분석이었다. 하지만 뒤이은 말은 세하도 피식 웃을 수 있었다.
“마그티스님처럼 구할 수 있는 분들이 늘어나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어요.”
“그렇지. 으음.......”
세하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순식간에 표정이 굳고 말았다. 거기에 레이린도 불안해져서 세하의 입이 열기를 기다렸다.
“레이린. 잘들어. 제너럴 마이트에 관련된 일이야.”
세하는 작정하고 레이린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