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버닝 타임
-사이킥 에너지의 출력이 엄청나군요.
세하가 엘리미네이터 아머를 가동시키고서 무기들을 예열시키자 루이제가 말했다.
‘응. 싹 다 태워 버릴 거니까.’
세하가 솔직하게 말했다.
퓨화화학!
그 순간 세하는 모든 무기를 발사했다. 이미 화염의 이미지로 형상화된 격렬한 에너지들이 퍼부어지며 얼음 호수를 녹이기 시작했다.
아니. 녹인다는 것은 정제된 표현이었다. 말 그대로 파괴하고 있었다.
“미친놈.”
일라이저는 그 광경을 보고서 말했다.
“아아... 이래서 오는 게 아니었는데.”
라설연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탄식했다.
“우와아아! 오빠 짱!”
그 반면 유주리는 두 눈을 빛내며 환호하고 있었다. 하워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장갑차의 운용인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 조금 다르다 할 수 있었다.
키에에에!
처음에 얼음 호수의 파면이 녹으면서 마치 지독한 안개처럼 수증기가 일어났고 그 농도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계속해서 괴성이 커지고 있었다.
단 한 개체가 아닌 수많은 개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파멸의 교향곡이라 할 만 했다. 하지만 세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과대한 출력으로 인해 제한시간보다는 에너지 총량으로 알려드립니다. 현재 사이킥 에너지 총량은 70퍼센트입니다.
한 5분 정도 화력을 쏟아 부었는데 30퍼센트의 에너지가 소모된 셈이었다. 하지만 세하는 일언반구도 안하고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저 자식. 완전 돌아버렸네.”
그 기세가 살벌한지라 말릴 생각도 못했고 일라이저는 황망히 말할 뿐이었다. 라설연은 아예 체념한 표정으로 있었고 유주리는 완전 초집중해서 세하를 보고 있었다.
“후우.”
세하가 어느새 심호흡을 하며 공격을 멈췄다. 엘리미네이터 아머가 다시 비활성화 상태가 되며 그 크기를 줄이기 시작했고 다시 드러낸 모습은 마크3 라인버스터 슈트였다.
-사이킥 에너지 총량 50퍼센트입니다.
“충분해.”
루이제가 건조하게 말했지만 세하는 개의치 않았다. 어느새 눈앞에 커다란 공동처럼 뻥 뚫려버린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히 얼음동굴이라고 할 만 했다. 세하가 엘리미네이터 아머 상태로 45도 각도로 내리 퍼부은 공격대로 뚫린 지라 그대로 뛰어들면 아래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선행한다. 다들 따라 오라고.”
세하는 그 상태로 구멍에 뛰어들었다.
*
처음에는 뻥하니 뚫린 얼음의 동굴만 보였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정 깊이까지 들어가자 세하가 저지른 참상이 속속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탄의 일자리 하나 뺏었네요.
루이제의 핀잔 아닌 핀잔에 세하는 피식 웃으며 착지했다. 이미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깊이는 500미터 정도였다.
어지간한 잠수부의 기록을 갈아치운 깊이지만 세하는 그게 의미 없는 걸 깨달았다. 이미 단단한 지면이 자신의 발을 받치고 있었고 그 너비 또한 충분히 10사람 이상이 어깨를 마주하고 들어갈 공간이 있었다.
“이 정도를 가지고 뭘. 엑펠트 놈들이 했던 걸 생각하자고.”
세하는 전생의 적들을 떠올리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의 앞에 꽤나 살벌한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이미 형상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몬스터들이 불길을 내뿜으며 마지막 재를 흩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녹다만 얼음들이 다시 세하가 들어온 공간을 얼리고 있었다. 그리고 세하는 자기 혼자만 이곳에 있는 걸 깨달았다.
“대체 뭐하는 거냐?”
일라이저의 통신이 들어왔다. 세하는 거기에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부정적으로 들은 일라이저가 다시 외쳤다.
“이 망할 놈아! 혼자 휙 뛰어드니 바로 닫혀버렸다고! 아까 했던 식으로든 어떻게든 나와!”
하지만 세하는 꽤나 시니컬한 음성으로 통신을 날렸다.
“그럼 어쩌자는 거냐? 그냥 겉에서만 깔짝깔짝 살펴보다가 물러나고 그럼 시간 되면 몬스터들이 개떼 같이 다시 나오고 막고. 그러다가 시간 보내고 지치고 그러다가 사이좋게 죽자 이거냐?”
세하의 말은 좀 과장된 것은 있었지만 핵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기왕 들어왔으니 끝장을 봐야지. 알겠지?”
세하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좀 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토마스 조사관한테 내가 똘아이 짓해서 들어가 버렸다고만 전 해. 뭐라고 책임을 물려하면 전부 다 내 책임으로 몰라고. 알겠지?”
세하는 그렇게 일라이저와 통신을 마치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음. 마스터는 무식한 건지 과감한 건지 모르겠네요.
그 뒤를 잇는 루이제의 말은 어딘가 탄식이 섞여 있었다.
*
세하의 전진은 순조로웠다.
‘그렇다고 마냥 편한 마음은 아니고.’
세하는 여전히 과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퓨화화확!
양손의 캐논이 아예 화염방사기처럼 불길을 뻗어내며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태워버리고 있었고 설사 이를 피해 접근한 몬스터가 있어도 리버스 필드의 반탄력에 튕겨 나가버리고 도로 불타 버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마스터. 해놓은 업적이 가관입니다.
루이제는 계속해서 불만을 말하고 있었다. 갈수록 녹다만 얼음벽하며 나자빠진 몬스터들이 시신들이 보이고 있었고 일부 달려드는 것들마저 거의 몸의 반신 이상이 타버리고 손상된 것들이 대다수였다.
‘뭐 어때? 외부에서부터 날려놓으니까 편하잖아.’
세하는 그렇게 루이제의 말을 받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세하의 말대로 몬스터들이 상대적으로 약해져 있어서 처리하는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게다가 융합체의 기운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세하가 노리는 파장이 감지되는 것도 호재였다. 그래서 세하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음?”
다시금 손상된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세하가 발을 딛은 곳에는 뭔가 이질감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곳은 대부분 흙이나 얼음 같은 자연에 가까운 물질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놓인 것은 달랐다.
‘이건 무슨 실험장 같기도 하고.......’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깔끔한 금속재질의 바닥이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세하는 일단 멈춰 서서 스캐닝을 시작했다.
-인공적인 구조물입니다. 뭔가 위해를 가할 물질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루이제의 보고에도 세하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직 걸음을 옮기기 않았는데 루이제가 어딘가 차가워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마스터. 혹시나 말인데요. 마스터와 저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봤나요?
갑자기 철학적인 질문인지라 세하는 헛웃음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장 융합체들 뚝배기를 깨러 가도 모자를 판국에.”
-왠지 마스터가 가는 곳마다 엑펠트에 관련된 것들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요. 사실 마스터가 오기 전에 이곳은 소강 상태였어요. 하지만 마스터가 오고 나서 퍼스트 캠프가 전멸했고 강력한 융합체가 나타났죠.
“.........”
재수 없는 소리 말라며 일갈하고 싶었지만 세하도 내심 생각하던 바였다.
-이번 일을 통해 더욱 알아야 할 것이 많아질 것 같아요.
“그렇네. 그리고 제너럴 마이트 쪽에서도 뭔가 아는 것 같으니 이번에 확실하게 알아야 겠지.”
세하는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다시 움직였다.
그 뒤로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뭔가 거대한 설비나 이해 가지 않을 풍경이 펼쳐질 걸로 생각했지만 그냥 바닥이나 벽만이 금속질의 걸로만 있었을 뿐 몬스터들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누구냐?’
그러기를 30분 정도나 지났을까? 갑자기 거북한 음성이 세하의 뇌리를 찔렀다. 하지만 세하는 그 반발 심리로 더욱 속도를 높여서 전진했다.
-마스터. 전방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달리다보니 어느새 마치 지하 콜로세움이 연상되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의 넓이 자체가 그렇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눈앞에서 무슨 장대한 파노라마가 녹다가 다시 얼어붙은 것 같은 광경이 세하의 두 눈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지옥도야?”
-마스터가 만들어내신 걸지도 모르죠.
루이제의 핀잔을 들으면서 세하는 눈앞의 것을 살펴봤다.
인간. 아인종 괴물, 동물,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을 크고 뒤틀린 형체들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표면은 실제로 얼음이 격한 불꽃이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어서 꽤나 퍼지고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 있었다.
“저 가운데 녀석이 심상치 않네.”
그리고 그 중심을 점하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긴 목과 파충류의 머리. 그것만으로도 20미터는 넘어 보일 그것은 막 천장으로 포효하는 상태로 얼어붙어 있었다.
뒷부분에 온갖 형상들과 뒤엉켜서 얼어붙은 지라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었지만 세하는 대략적으로 수장룡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와. 이거 네시나 다른 크립티드 파는 양반들이 봤다면 환호 했겠는데?”
-글쎄요. 마스터가 생각한 것처럼 뭔가 낭만이나 고고학적 가치보다는 주변 환경과 뒤틀림이 지독하게 엉켜서 나타난 존재로만 보이는데요? 막 상태를 보니 뛰쳐나가려고 하다가 엉망이 되고 다시 얼어붙은 걸로 보여요.
루이제의 분석에 세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몰라. 방해되는 거니까 제대로 치워 버려야겠지.”
세하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생각이 없는지 다시 무기들을 예열하기 시작했다.
‘멈춰라!’
그때 한 음성이 외쳤다.
“닥치시고, 딱 봐도 흉물스럽고 사람 여럿 잡아먹게 생긴 게 눈앞에 있는데 멈추라고?”
세하는 그 음성에 혐오감을 담아 물었다.
‘우... 우선 대화를 하자! 대화를!’
하지만 공기를 진동시켜 들리는 음성은 세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루이제. 이거 엑펠트냐?”
-아닙니다.
그리고 루이제의 판독은 세하의 상상을 벗어났다.
-전혀 모를 반응입니다.
“그래?”
세하는 일단 무기를 내려놓았다. 엑펠트를 지독하리 상대하다 진화해버린 루이제가 저런 말을 할 정도라면 우선 대화를 할 필요성을 느낀 탓이었다.
“그럼 당장 눈앞에서 나타나라.”
‘그게 쉽지 않다.’
뭔가 주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세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수룡인지 뭔지 모를 것이 머리를 위로 쳐올려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너냐?”
‘........’
세하가 묻자 어딘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 괴물이 너냐고? 그럼 여기 주변에 녹다가 들러붙은 것들은 네가 부리는 것들이냐?”
‘솔직히 인정한다. 원래 우리 종족은 레어 주변에 가디언들을 부리는 것이 정상이니까.’
레어에 가디언. 세하는 어딘가 들어봤던 단어들이라서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너, 드래곤이냐?”
‘.......’
다시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세하는 재차 물었다.
“드래곤이냐고 물었다.”
‘시서펜트. 아무래도 드래곤 중에서는 격이 떨어질 테지만 적어도 준하는 지식이나 힘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다.’
이어 시인하는 내용에 세하는 한숨부터 푹 쉬고 말았다.
“미치겠네. 이게 실타래가 어디부터 꼬인 거야?”
-사실 이 세계에 게이트가 나타난 것부터 이상했죠. 뭔가 개별적인 존재들이었는데 최근에 엑펠트의 융합체도 엮이고 말았죠.
루이제도 한숨 섞인 말을 토하고 있었다.
“그럼 이 놈이 실마리가 될 수 있겠군. 어이. 넌 이름이 뭐냐?”
세하의 물음에 갑자기 약한 진동이 일어났다. 세하가 자세히 보니 얼어붙은 시서펜트의 목이 살짝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와. 이거 가만히 보니 공포네.’
집체만한 존재가 가만히 있다가 서서히 움직이는 것은 제법 시각적인 공포를 줄만했다. 물론 세하가 이런 것에 겁을 먹을 성격은 아닌지라 다시 두 눈에 힘을 가득주고 노려보자 시서펜트의 입이 힘겹게 움직이는 것도 보였다.
“나... 나는... 마... 마그티스........”
“뭐? 마그티스?”
세하는 답답함에 다시 물었다. 그러자 자신을 마그티스라 밝힌 시서펜트가 다시 어렵게 입을 열려고 할 때 였다.
퓨화화학!
갑자기 마그티스의 뒤편에 커다란 화염이 작열했다. 그 통에 마그티스는 공간이 뒤흔들리도록 고통에 찬 포효를 터뜨렸다.
-마스터. 융합체입니다.
“왜 안 나오나 했다.”
세하는 마그티스와 그의 가디언들이 삽시간에 불타오르는 꼴을 보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아예 머리를 지면에 박으며 쓰러지는 마그티스의 옆을 지나 한 존재가 세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