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오픈
이른 아침. 세하는 제법 피로함에도 토마스의 집무실을 찾았다.
“오셨습니까?”
토마스는 반가움을 얼굴에 드러내며 세하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도 잠을 잘 못자서 피로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해보였다.
“뭔가 알아낸 게 있습니까?”
“일단 한 번 보시죠.”
토마스가 살짝 손을 들어 음악 지휘자처럼 휘저었다.
그러자 세하가 간밤에 보았던 부드러운 바람의 기류가 일어났다.
“와. 이건.”
세하는 솔직히 감탄했다. 그 기류 안에서 수많은 형상들이 희미해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스피릿 리딩. 제너럴 마이트에서는 제 능력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가상화면들을 자신의 주변에 띄웠다.
“크윽! 어떻게 저런 것이.........”
“절대 접근하지 마! 으아아악!”
그리고 그 화면들에 퍼스트 캠프라 불렸던 지점. 그곳에서 벌어졌던 참상이 흐릿한 화질이지만 재생되고 있었다.
“이건.......”
세하는 짐작이 감에도 물었다. 그러자 토마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퍼스트 캠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일종의 전진기지이기도 해서 상당한 방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렇게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민세하 헌터님이 잡아냈던 거대한 융합체는 그곳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융합해서 만들어진 것이고요.”
토마스는 이제 영상들을 지웠고 기류들도 사라지게 했다.
“영적인 분야까지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 같군요. 아무튼 민세하 헌터님이 활약해주신 덕분에 융합체로 잡혀있던 영혼들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토마스가 무척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하는 지라 세하는 잠시 민망해졌다.
“하퍼 수석조사관님. 이건 좀........”
“당연히 인사를 드릴 일입니다. 아무튼.”
토마스가 안경을 치켜 올리더니 다시 냉정한 인상으로 돌아갔다.
“민세하 헌터님이 좀 더 고생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세하도 각오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소수정예로 문제의 지점을 탐색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인원은 역시 한국에서 동행한 구성이면 되겠습니까?”
토마스가 다시 가상화면들을 띄웠다. 거기에는 일라이저를 비롯해 한국에서부터 세하와 동행한 4명의 헌터들의 신상명세가 표시되고 있었다.
“네. 충분합니다.”
“이 쪽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계속 본사와 북미의 각 헌터 길드 그리고 미합중국 병력이 충원되고 있으니까요.”
토마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세하는 두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민세하 헌터님.”
그때 토마스가 세하를 불렀다.
“네?”
“제 못난 동생을 잘 부탁합니다.”
동생이 기가 죽을 정도로 강하면서도 정작 이런 말은 본인한테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핏줄이라 이겁니까?”
“크흠. 사실 전 솔직하지 못합니다. 일라이저 그 녀석도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어젯밤에 보니 제법 성장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어제 민세하 헌터님과 호흡도 좋았고요.”
토마스는 애써 감정을 숨기려 들었다. 그러자 세하는 작정하고 한 마디 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 마음 꼭 전해요.”
“네?”
“안 그러면 나중에 정말 후회합니다. 그럼 이만.”
세하는 토마스의 집무실을 나갔다. 뒤에 남은 토마스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보더니 생각에 잠겼다.
*
“뭐? 형이?”
일라이저는 세하의 생각 이상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래. 잘 부탁한다고 하더라.”
세하는 두 눈에 장난기가 어린 채 일라이저를 보았다. 일라이저는 곤욕스러워 하며 말했다.
“끙... 이걸 애니에서 뭐라고 하더라.”
“츤데레.”
세하가 바로 말하자 일라이저의 표정이 볼만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본 것 같은 모습이라서 세하는 그를 무시하고 장내를 돌아보았다.
“부족 하긴 하지만 팀장으로서 브리핑을 시작하겠어.”
임시 막사에 세하를 비롯한 5인의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적당한 탁자와 의자. 추위를 막을 정도의 천막과 난방기기 외에 별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지금 모여 있는 헌터들의 전력을 생각한다면 그 장소가 가지는 의미는 상당했다.
“오늘 무인기와 드론으로 살펴본 바로는 문제의 호수까지 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아. 지난 밤 화끈할 정도로 쓸어버릴 여파가 아닐까 싶어.”
세하는 우선 무인기와 드론의 실시간 영상을 띄웠다.
“사실 계획은 별 거 없어. 소수정예로 이뤄진 우리가 저곳으로 들어가서 무엇이 있나 살펴보고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부셔버려야겠지.”
뭔가 단순무식하게 말하는 세하를 보고 라설연이 손을 들었다.
“저기. 너무 단순하지 않아?”
“뭐가?”
세하는 뭘 물어보냐는 식으로 라설연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지금 5명으로 저기를 가자는 거야?”
이어지는 라설연의 의문에 세하는 잠시 팔짱을 끼고 그녀를 지켜봤다.
“여기 S급 헌터 4명에 A급 헌터 1명. 그래. 상당한 전력이지. 하지만 지난밤에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러니......”
“많이 약해졌네. 라설연.”
그렇다고 말을 오래 듣지도 않았다. 중간에 세하는 라설연의 말을 잘라버리고 한층 더 차가운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말했다.
“내 힘을 보더니 그 자체로 굳어버린 거냐?”
“뭐?”
라설연이 거기에 발끈했다. 하지만 세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중요하고 보통 일은 아니지. 그런데 말이지. 괜히 S급 헌터인 게 아니잖아? 어디서 폼 잡고 대접이나 받으라고 그렇게 등급을 준 게 아니란 말이지.”
“.......”
라설연은 거기까지 듣더니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금 같은 탐색에서는 이렇게 소수정예가 좋아. 하지만 이 중에서 겁을 집어 먹은 사람이 있다면 빠져도 좋아.”
세하는 그렇게 말하더니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설마 그냥 자리나 지키자고 한국에서부터 멀리 미국까진 오지 않았겠지?”
어딘가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인지라 헌터들은 움찔했다. 하지만 유주리가 어느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네요. 뭐, 재밌을 거 같기도 하고요.”
“주리야!”
라설연이 거기에 기겁해서 외쳤지만 유주리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손에 닿는 자신의 머리칼 끝을 잡고 배배 꼬았다.
“세하 오빠가 말 한 대로 우리는 자리나 보전하고 대접이나 받으려고 헌터 된 거 아니잖아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해서 눈도장 받으면 좋죠.”
유주리가 당돌하게 말하는 바람에 라설연의 얼굴이 확 붉어지고 있었다.
“잘 부탁해요. 세하 오빠. 아니 팀장님.”
유주리가 그렇게 나서자 다른 헌터들은 더 볼 것도 없었다.
“뭐 브로가 그렇다면 가야지. 어젯밤 활약은 정말 화끈해서 아랫도리가 불끈해졌다고.”
이중 가장 등급이 낮은 하워드가 농을 던지자 세하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어이. 질 떨어지는 소리는 좀 가려해라.”
“오, 실례. 숙녀 분들이 함께하는 건 오랜만이라서.”
하워드마저 너스레를 떠니 일라이저는 미소만 띨 뿐이었다.
“아무튼 다들 이 바닥에서 정점에 달했잖아?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은 못하겠는데 일단 확실히 앞은 뚫어주지. 그럼 다들 알아서들 할 정도는 되니까 괜찮을 거라고 본다. 그럼 가볼까?”
세하는 그렇게 마무리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
문제의 지점까지 가는 동안 별 문제는 없었다. 제너럴 마이트의 특별사양으로 만들어진 장갑차는 아무리 거친 지형이라고 해도 아예 바닥이 없지 않는 한 시속 60km 이상을 유지할 수 있었고 지금 로키 산맥의 초입부는 지난밤의 습격의 여파인지 무슨 고속도로 마냥 정리가 되어 있어서 승차감이 편안히 느껴질 지경이었다.
“허이구.”
하지만 장갑차에서 내려 퍼스트 캠프. 다시 말해 전진기지가 있던 곳에는 그 황폐한 여파가 남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황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현재까지 측정되는 반응은 없습니다.
루이제가 빠르게 주변을 스캐닝하고 보고했다. 거기에 세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펼쳐진 호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만 봐서는 그냥 크고 깨끗한 호수 같은데?”
세하의 평가에 일라이저는 고개를 저었다.
“오기 전에 퍼스트 캠프의 자료를 봤어. 저 안에서 아주 구역질나는 것들이 기어 나온다고. 그런데 지금은 잠잠하군.”
물론 그 자료는 세하도 봤었다.
‘이거야 원.’
일라이저 외에 라설연이나 하워드도 불안한 기색이 보였다. 유주리만이 뭔가 겁 없이 소풍 온 소녀 마냥 눈을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가지고는 들어가 전부터 지고 들어간다.’
세하는 일단 루이제에게 의견을 물었다.
‘루이제. 정말 주변에 반응이 없어?’
-일단은 그렇다는 겁니다. 일단은.
루이제도 시간이 갈수록 능청스러워졌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세하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야.’
-지금 팀원들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 거죠? 그런데 지난밤에 그런 일을 겪고 나면 겁이 나는 게 정상 아닐까요? 아무리 S급 헌터라고 해도 파도 같이 달려드는 몬스터의 수가 기천에 달했는데 말이죠.
루이제의 말은 타당했다. 보통 헌터들은 어느 정도는 제한된 싸움을 하기 마련이었다. 게이트의 몬스터들을 상대한다고 해도 개체의 별의 강함은 다를 수 있어도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던전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몬스터를 한 번에 상대하진 않지. 으음.’
세하도 다시 생각해보니 어젯밤 몬스터들의 수와 기세는 남달랐고 거기에 엑펠트의 융합체까지 있었다.
‘내가 잘 못 생각한 건가?’
너무 자신이 강함만 생각하고 주변을 생각하지 않은 대가를 치루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하의 표정이 자꾸 안 좋아졌지만 다시 말했다.
‘아무튼 다시 스캐닝 해봐. 지금 몬스터 반응이 있어? 없어?’
-지금 계신 지점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략 연산해 보면 지금 보이는 호수를 파고들어 한 50m 깊이로만 내려가도 상당한 생명 반응이 있습니다.
세하는 순간 그걸 왜 이제 말하냐고 묻고 싶었다.
-반경 정보와 깊이 정보는 좀 다르게 적용해야 합니다. 일단 호수 자체가 얼어붙어 있기에 굴착을 하듯이 파고드는 것이 맞습니다. 아무튼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하셔야 할 겁니다.
루이제가 말해주는 정보로 인해 세하의 갑갑함은 진해졌다.
‘그대로 말해주면 한숨부터 푹푹 쉴 텐데.’
아무튼 잔뜩 움츠리고 들어가다가 공격을 받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세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루이제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네?
‘지금부터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화력으로 여기를 박살낼 거야.’
-........
루이제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면 분명 세하보고 미쳤냐며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것 같았다.
‘최대한으로 한 방 먹여두고 탐색을 시작하려고 해. 난 지고 들어가는 건 싫으니까. 알았지?’
루이제가 아무 말 없음에도 세하는 자신의 생각을 다 말하고 호수를 노려보았다. 벌써부터 두 눈이 불꽃으로 활활 타는 것 같아서 근처에 서 있던 유주리가 놀랄 정도였다.
“세하 오빠? 왜 그리.......”
“아. 지금부터 좀 위험한 짓을 할 거거든. 그러니 다들 좀 비켜 있었으면 하는데?”
세하가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다들 심각함을 깨닫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대기하고 있던 장갑차와 운용인원들도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리미네이터 아머 기동. 완전 동기화까지 60초. 59. 58........
그 사이 루이제가 엘리미네이터 아머를 위한 셋팅을 시작했다. 우선 세하의 전신이 두터운 라인버스터 슈트로 뒤덮였고 그 위를 다른 금속질의 물질들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걸 가장 처음 당해봤던 유주리는 아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아무튼 세하의 덩치가 점점 커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머를 이루는 물질이 완전히 구현되서 그 크기를 드러내는 격이었다.
쿵!
마침내 체고 10m에 달하는 엘리미네이터 아머가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검은 거인은 얼어붙은 호수를 내려다보며 안광을 빛내기 시작했다.
양 손이 커다란 포구로 변했다. 어깨 위에는 그에 못지않은 굵직한 포신 6개가 나타나며 그 끝을 호수로 거눴다.
마지막으로 아머의 중심부가 열리더니 서서히 가열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세가 높아지며 주변에 화끈한 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