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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화 〉사전조율 (27/72)



〈 27화 〉사전조율

“제너럴 마이트는 그런 식이군요.”


레이린은 찻잔에 내려놓고서 말했다.

“그렇군. 현명하다고 해야 할지.”

류한호는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일견 듣기로는 나쁘지 않은  같습니다. 봉황 길드의 사례도 있으니 제너럴 마이트 측도 경거망동하진 않겠죠.”


세하는 그런 그들 사이에서 비교적 편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류한호는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미 협회에 협조공문이 오긴 했네. 대략적인 내용으로 봐서 엑펠트 오염에 추정되는 현장을 조사하고 싶어 하는데 그 중 민세하 헌터를 꼭 참여시켜줬으면 한다니 말일세.”

봉황 길드를 한바탕 뒤집어 놓은  사흘 뒤, 세하는 협회 본부에서 류한호, 레이린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관련이 없는 단순히 강력한 게이트에 관련된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협회장님께서는 제가 참여하길 원하시는 거 같군요.”
“크흠.”

정곡을 찔렀는지 류한호가 헛기침을 했다. 거기에 세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같습니다. 제너럴 마이트 측에서도 상당히 정중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봉황 길드가 이번에 당한 김에 차라리 우호적으로 나가자는 걸로 보입니다.”

세하는 이미 루이제가 제너럴 마이트의 정보를 해킹해서 어느 정도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긴 좋게 풀  있다면 다행이겠지. 그럼 맡기겠네.”


류한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세하는 더 이상 볼 거 없다는 몸을 일으켰다.


*
“세하님은 오염 반응을 어떻게 감지하시나요?”

류한호와 헤어지고 세하는 협회 본부 지하에 위치한 레이린의 구역에 와 있었다.
레이린이 문득 이렇게 묻자 세하는 대답이 궁해졌다.


“아무래도 전생의 일 때문에 자연적으로 알게 된 달까.”

하지만 그녀가 엑펠트이고 자신의 전생을 아는 이상 오히려 답은 쉬웠다. 레이린도 그런 세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요. 엑펠트 학살자셨으니까요.”
“학살자는 무슨. 솔직히 그 놈들이 조종하는 융합체나 단말체는 많이 처리했지. 하지만 본체는 그다지.”

세하는 레이린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레이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마 단말이라고 생각한 것이 본체인 경우가 많았을 걸요? 동족의 네트워크에서는  말이 많았어요.”
“그런가?”
“네. 그러니 제 동족, 엑펠트에 관련된 느낌은 무척 민감하게 느끼실 거예요. 저 같은 경우에는 이미 이 육체에 깊이 동화되었으니 모르셨을 테고요.”


레이린은 자신을 가리키며 어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엑펠트로서 저는 무척 미숙했어요. 오로지 본능에 따라서 보이는 것을 침식할 뿐이었는데 레이린 리는 달랐어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주변 이들을 지키려 했어요. 아무래도 이 분의 영혼이 정신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침울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세하는 가볍게 넘겼다.


“사실  같은 걸 만난다면 당장 머리통을 깰 생각부터 했었다.”
“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이렇게 대화가 되잖아? 그러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고마워요. 확실히 세하님을 알게 되니 많이 편해진 거 같아요.”

그제야 레이린이 환하게 웃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한 구석이 저절로 따뜻해질 미소인지라 세하도 자기도 모르게 입가가 느슨해질 뻔했다.


“뭐 아무튼 할 말이 뭐야?”

세하는 레이린이 이번 미국행 때문에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온 터였다. 그래서 분위기가 이상해지려하자 본론을 꺼냈다.

“제너럴 마이트가 만약 엑펠트를 언급한다면 믿으세요. 하지만 뭔가 숨기려한다면 조심하세요.”
“뭐?”
“게이트가 나타나고 기존의 국가체계들이 좀 달라지긴 했어도 제너럴 마이트가 본부를 둔 미국은 예전부터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어요. 그만치 기술과 세계의 위협에 대해서는 민감한 나라죠. 그리고 제가 모르는 동족이 있던 다른 방법을 쓰던 엑펠트의 존재를 알아채고 있을 수도 있어요.”


레이린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잠시 진지한 눈으로 세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하님이 현장에서 엑펠트의 오염을 느낌에도 뭔가 숨기려 한다면 조심하세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기까지예요.”
“생각할만한 문제이긴 하네.”

세하도 별 이견이 없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동행할 사람들을 정할 수 있을까?”
“으음... 지금 생각이 났나요? 아까 협회장과 계실 때 말씀을 하시지 않고요.”


레이린은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 물었다. 거기에 세하는 솔직하게 말했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래. 레이린이 협회장님에게 말을 해주면 쉽게 될 거 같아.”
“이거 의심스러운데요. 아무튼 말씀해보세요.”

레이린은 뭔가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거기에 세하는 왠지 의뭉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호오. 마음을 정했나 보군.”


제너럴 마이트 한국 지부 또한 헌터 협회 본부와 머지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세하에게 출장을 제의했던 일라이저는 세하가 로비에서 요청하자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그거 잘 됐군. 일단 편하게 이야기하자고.”

일라이저는 일단 로비에 머지않은 카페로 자리를 청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자리를 정하고 앉자 일라이저는 어딘가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블랙메탈의 위명은 제너럴 마이트 내에서도 알려진 편이야. 이번에 봉황 길드 녀석들을 제대로 털어준 덕분에 더 알려졌고 말이지.”
“너, 한국어 수준이 장난 아닌데?”

세하는 일라이저의 말에서 느낀 점을 바로 말했다.


“하하하! 아무래도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야. 야구 응원 문화도 아주 열띠고 말이지.”
“됐고. 아무튼 봉황 길드가 털린 걸 안 이상 제너럴 마이트가 한국 내에서 입지가 커질 일 아닌가?”

세하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물었다.


“글쎄? 한국에서 헌터 길드가 봉황 길드 뿐은 아닐 테고. 우리야 한국은 오랜 우방국이고 헌터 세계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라서 지부를 파견한 것이지.”

일라이저는 정론을 내세우며 빠져나갔다. 아무튼 세하는 뭔가 입씨름할 생각은 없어서 주제를 바꿨다.


“뭐 좋아. 이번에 제너럴 마이트가 조사를 의뢰한 지역은 아나?”
“나도 처음 가보는 곳이야.”
“너도?”

세하는 그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래. 이번에 다시 본사 소속이 되는 거지. 이곳에 파견 된 지도  5년 됐나?”
“........”

세하는 왠지 신경 쓰였다. 눈앞의 말 많고 그러면서도 밝고도 준수한 외모를 지닌 청년이 S급 헌터인 것을 떠나서 이번 일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좋아. 구면이 있는 건 적응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

세하가 이내 참고서 말하자 일라이저는 희색이 만연했다.


“오! 이번 기회에 브로가 되는 건가? 안 그래도 이번에 하워드도 같이 복귀하게 되거든!”

세하는 순간 연천 균열 지대에서 자신과 말을 터놓았던 A급 헌터 하워드 그린을 떠올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


세하는 더 이상 정보를 얻는 것을 포기했다. 이어지는 것은 일라이저의 끝없을 수다였다.

*
“왜 하필 여기서 보자고  거지?”

라설연은 세하를 만나서 꽤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만나는 곳이 봉황 길드 본부의 로비였다. 그녀로서는 지난번 봉황참마단이 세하에게 당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길드 내에서 제법 따돌림 받는 처지였다.
다행히도 만나자마자 로비를 나와 근처 카페로 가서 라설연은 화를 죽일  있었다.

“아직 서류 작업이 완료가 안 됐나봐. 하지만 이번 일을 기회로 완전히 협회 소속이  거니 걱정하지 마.”


그 반면 세하는 자기집 안방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보였다.

“뭐?”
“제너럴 마이트 본사에서 나에게 조사 협력을 요청했어. 그래서 내 재량으로 동행할 인원들을 정하게 됐지. 그 중 한 명이 너야. 라설연.”
“.......”

라설연은 이어진 세하의 말이 믿기지 않는 지 잠시 가늘게 뜬 눈으로 세하를 보았다.

“나 말고 또 누가 있다는 거군.”
“그래. 마침 저기 오는 군.”

세하가 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하고 손을 들었다. 거기에 라설연이 고개를 돌렸다가 놀라고 말았다.


“너... 주리........”


세하에게 초장에 당해버렸던 유주리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새침하게 표정을 고치더니 그대로 라설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유주리. 저번에 당해보니 어떻던가?”
“너무 압도적이라서   없어요.”


유주리는 의외로 깨끗하게 승부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진후 오빠는 이를 갈던데 어쩔 수 없죠. 그게 남자들의 승부욕이라나요?”
“비지니스 마인드라니 다행이군. 그러니 이번 출장도 그런 마인드로 잘 부탁한다.”
“네. 저보다 연상이시니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마음대로.”
“그럼 잘 부탁해요. 세하 오빠!”

어느새 생글생글 웃는 유주리를 보고 있자니 라설연은 그대로 표정이 얼어붙고 말았다.

“주리. 너.......”
“왜 그래? 언니. 봉황 길드가 털려버린 것인 언제인데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거야?”
“뭐?”


유주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라설연으로서는 폭탄의 연속이었다.

“헌터 협회의 하청이나 다름없게 됐잖아. 그러니 나도 이번 기회에 아예 협회 소속이 될 거야. 이번 일이 끝나면 그렇게 될 걸?”
“........”


라설연은 진정을 못하는 것 같았다. 세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내심 즐거웠다.


“제너럴 마이트 본사의 요청으로 한국에서 헌터들이 파견될 거다. 바로 협회 소속인 우리들이 말이지. 그러니 잘 따라주기 바래. 아, 그리고 동행하는 제너럴 마이트 측 인사들은 일라이저 하퍼와 하워드 그린이니 적응이 어렵진 않을 거야.”
“하아.......”

라설연은 앞으로의 일정이 상상이 가지 않는 탓에 두통을 느끼는  한껏 아미를 찌푸리고 있었다. 세하는 그런 그녀의 모습까지 즐거이 감상했다.



*
-마스터는 속도 좋으신 것 같습니다.

출발 당일. 세하는 제너럴 마이트 측에서 제공한 차량에 몸을 싣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뭐가?’

아무래도 제너럴 마이트의 수행원들이 있어서 세하는 루이제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눴다.

-사실 지난 균열 지대의 일로 감정이 상해 있을 인원들을 팀으로 꾸렸으니까요.
‘괜찮아. 라설연은 사실 내 편이나 다름없었고 유주리는 의외로 쿨 해. 제너럴 마이트의  녀석은 재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으니 괜찮다고.’
-마스터의 결정이니 따르겠습니다. 사실 마스터는 공중에서 항공기 사고가 나도 살아 돌아가실 수 있으니까요.


뭔가 재수 없는 소리였지만 그게 사실이기도  터라 세하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나저나 심상치 않아 보이네.’

제법 긴 시간을 창밖의 풍경을 보며 가다가 이제 공항의 정경이 보이자 세하의  눈이 제법 사나운 기색을 띠었다.
아무래도 작금의 게이트 사태 때문에 일반 항공편 외에도 비상 항공기를 위한 구역이 따로 존재했는데 지금 차는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내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차가 당도한 곳에 앞에 보인 항공기는 가히 대형 수송기에 가까웠다. 수송기 후면의 램프 도어가 열리면서 각종 장비들이 실리는 걸 보고 있자니 세하는 절로 심각함에 한숨이 나왔다.

“여어.”


그리고 일라이저가 눈에  정도로 손을 흔들어보였다. 세하는 그의 뒤에 하워드 그린과 자신이 선택한 라설연과 유주리도 도착한 것을 확인했다.


“전용기로 안락한 비행을 생각했는데 이건 아예 수송기네. 지금 당장 전쟁터에라도 떨어지는 건가?”

세하는  농담으로 물었다. 그러자 일라이저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답했다.


“전쟁터는 아니지만 급히 현장으로  필요는 있지. 나도 지금 들었지만 본사에서 긴급히 요청한 거야.”
“뭐?”


세하가 잠시 놀라서 묻자 일라이저는 다시 말했다.


“콜로라도 주 지역에 현장이 있어. 지금 제너럴 마이트 본사는 미합중국 군대와 더불어 합동조사에 나서고 있지. 그러니 블랙메탈. 네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으면 좋겠어.”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호구처럼 부려먹을 생각이면 각오해야  거다.”
“호구?”


그 말은 일라이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자 세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머리통에 총 맞고 사리분별 못하는 거랑 동격이라고 보면 될 거다. 아무튼 가지.”


세하는 그렇게 발걸음도 당당하게 수송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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