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레벨의 차이
라설연은 일단 침묵했다.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세하의 웃음이 더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아무튼 네가 자객으로 온 건 아닌 거 같네.”
이어진 세하의 말에 라설연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맞아. 자객으로 움직일 거면서 통보를 하니 하는 건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이지.”
“넌 많이 실용적일 거 같긴 해. 저번에 정체를 숨긴 아티팩트도 그렇고 말이지.”
세하가 지난번의 일을 언급하자 류설연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길드 상부의 지시였어. 사실 나로서는 굴욕이었지. 일라이저 녀석은 재밌겠다며 좋아했지만 말이지.”
라설연의 말에 세하는 제너럴 마이트 한국지부의 S급 헌터 일라이저 하퍼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놈과는 친해?”
“S급 헌터가 나서야 할 때 가끔 보긴 했어. 일단은 한국지부라서 말이지.”
라설연도 일라이저에 대해 생각했는지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 그 쪽도 지난 번 일로 제법 벼르는 분위기니까 말이지. 일라이저는 딱히 의리나 그런 건 생각 않고 움직이니 더 그렇고.”
“고마워. 아무튼 개인 자격으로 만나러 와준 것도 그렇고. 협회에서 제법 검증이 됐으니 이렇게 만나게 해준 거겠지?”
세하는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지금 내가 봉황 길드의 정보를 물으면 말해줄 수 있나?”
“그건 좀 아니지. 적어도 내가 몸 담은 곳이니까.”
라설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답했다.
“다행이네.”
“뭐?”
“다행이라고. 난 생각 없이 불었으면 신의 없는 사람이라고 안 믿으려고 했거든. 적어도 자신의 몸담은 곳에 대한 의리가 있으니 믿을 수 있지. 그래서 개인 대 개인으로서 만나러 온 것이 마음에 들어.”
세하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기왕 온 김에 길드나 헌터 쪽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들 좀 하자. 장소도 옮기고.”
*
세하는 말 그대로 라설연과 별거 아닌 시간을 보냈다. 적당히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눴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라설연과 헤어지고 나서야 루이제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수상한 낌새가 있었으면 너부터 알아챘을 거 잖아?”
-그건 맞습니다. 라설연의 말대로 오히려 이런 식이니 신용이 가는 군요.
“그래. 아무튼 봉황 길드는 현재 한국에서 최대의 길드인 게 맞아. 그곳 소속이면서 나 개인에 대한 의리로 위험을 알려준 것이니 더 욕심 부릴 것도 없지.”
세하는 다시 지하철역으로 가려다가 멈칫 했다.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는 거 같은데?”
세하의 말에 루이제도 긍정했다.
-네. 벌써 4명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인적이 많은 곳에서 사고 치진 않겠지. 그냥 협회 지부로 들어가서 버틸까?”
-그래봐야 미봉책일 겁니다. 그리고 지난번 드레인라이징으로 마스터의 사이킥 에너지는 상당히 증가했습니다.
루이제의 말에는 제법 투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레벨의 차이를 알려드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좋긴 한데 사람 많은 곳에서 그러는 것도 우습지 않아?”
소위 역세권에다가 헌터 협회의 지부가 근처에 있는 곳이라서 감지된 기척들은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세하의 움직임에 따라 추적의 강도가 올라갈 것은 자명했다. 그렇게 세하가 고민하자. 루이제가 다시 의견을 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죠. 단순 무식하긴 하지만 차라리 넓은 곳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어떨까요?
루이제의 제안에 세하는 귀가 솔깃했다.
“무슨 방법인지 들어볼까?”
-지겹겠지만 연천 균열 지대로 우선 가죠. 봉황 길드에는 제가 메일을 넣도록 하죠.
지난번에 난리를 쳤던 곳으로 가자는 말에 세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필드 보스들이 죄다 죽었으니 거기 몬스터들이 많이 약해졌다고 들었어. 그럼 그리고 가자고.”
세하의 전신이 검은색의 날카로운 슈트로 둘러싸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허공으로 치솟으며 유선형의 모습으로 변하며 초고속으로 비행하기 시작했다.
*
세하는 비행 중에도 헌터 협회에 통신을 넣어 연천 균열 지대로 가는 것을 알렸다. 류한호와 레이린은 살짝 난색을 표했지만 라설연이 말한 내용을 전하자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알았어요. 현재 엑펠트에 관련 조짐은 없지만 조심하세요.”
레이린은 특히나 걱정스러운 표정이라서 세하의 마음속이 아릴 지경이었다.
-마스터. 봉황 길드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내용을 보시겠습니까?
루이제가 봉황 길드에 전언을 남긴 터라 세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적당하게 그것들이 빡 치도록 했겠지.”
-그럼 정해진 대로 가겠습니다. 시간이 걸릴 테니 야영 하실 각오를 하세요.
당연한 절차여서 세하는 별 말 하지 않았다. 이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세하는 한줄기 빛처럼 나아갈 뿐이었다.
아무튼 사전에 조치를 취한 덕분에 균열 지대의 방벽 수비대는 별 다른 제지 없이 세하를 통과시켰다. 봉황 길드에서 반응이 와서 균열 지대로 들어오려면 시간이 걸릴 터이기에 세하는 머지않아 마치 집 안마당에 들어온 것 마냥 착지했다.
“어디 움직여 볼까나.”
세하는 일단은 마크2 슈트 상태로 움직였다. 제법 어두워진 터라 돌아다니는 몇몇 몬스터들이 반응하기 시작했지만 세하가 내뿜는 사이킥 라이플에 족족 나가떨어질 뿐이었다.
*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겠군요.”
봉황 길드의 한 회의실. 5명의 인물들이 하나 같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해 있었다.
“어떻게 임원진의 메일로 보냈기에 망정이지 공개적인 메일로 왔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라설연 헌터가 개인적으로 민세하를 만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이어지는 음성들에서는 곤욕스러움이 절로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가장 가운데 앉은 사람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민세하가 당당하게 도전의사를 드러냈으니 우리는 거기에 맞춰서 대응하면 될 겁니다.”
“하지만 회장님........”
회장이라 불리는 이의 여유에도 임원들은 우려를 금치 못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왜 대한민국 최대의 길드인지 알려드리도록 하죠. 아무리 한 개인이 강하더라도 그 격의 차이가 있다는 걸 말입니다.”
회장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지시를 내렸다.
“연천 균열 지대에 봉황참마단을 보내죠.”
“?!”
회장의 지시에 장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봉황참마단이요? 아무리 상대가 S급 헌터라고는 하나 단 한 명입니다. 우리 길드의 최대 전력을 이렇게 꺼내서는.......”
임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장은 다시 말했다.
“보내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봉황 길드의 방향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세하는 정말 산책이라도 나온 양 걸었다. 황폐해진 대지라지만 이제는 조금씩 풀이 나고 있었고 어딘가 자연의 일부로 변해가는 모습이 보이고 있어서 한층 기분이 좋았다.
“저번에 몬스터들 좀 처리한 게 빛을 보는 거 같은데?”
-하지만 여전히 이 구역에는 작던 크던 게이트들이 생기고 몬스터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4대 보스 몬스터들을 처리한 것만으로는 아직 멀은 것 같습니다.
중간에 루이제가 딴지를 놓았음에도 세하는 콧노래를 부를 지경이었다.
“뭐 어때? 일단은 한가로우니 이런 여유라도 부려야지.”
-어느 정도 긴장은 하시기 바랍니다. 아마 봉황 길드에서는 봉황참마단을 투입할 것입니다.
“봉황참마단이라........”
세하는 안 그래도 평소에 단련 외에도 루이제가 분류해주는 정보들을 파악하고 있어서 그들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봉황 길드의 최대 전력이라는 녀석들이잖아?”
-보통 길드에서는 최고의 헌터 10명 정도가 팀이겠지만 봉황참마단은 의미가 좀 다릅니다. 아예 제대로 된 군대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군대라... 이거 좀 피곤해질 거 같은데.”
세하가 그 말에 잠시 멈칫하자 루이제의 음성에 장난기가 서렸다.
-지금와서 겁나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번 기회에 마스터의 성장한 힘을 느껴보실 차례입니다. 사실 봉황 길드는 이런 식으로 한번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스터가 대한민국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말이죠.
“으음.”
세하는 어느새 멈춰 서서 적당한 지점에 털퍽 앉았다. 슈트의 안정성이 좋아서 별 거부감은 없었지만 심리적으로 걱정이 되선 지 한층 무거워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어떻게 올 것 같아?”
-봉황 길드 정도면 방벽 수비대를 구워삶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장비와 인원을 투입할 겁니다. 봉황참마단 본래의 규모도 있는데다가 말이죠. 드론 같은 무인병기들의 선행 투입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이것들이 나를 무슨 몬스터로 보고 있나.”
세하는 그 말에 왠지 발끈했다.
-그리고 봉황참마단에는 라설연도 소속되어 있습니다.
“........”
이어진 루이제의 말을 세하는 경시할 수 없었다.
“하긴 S급 헌터인데 그쪽 최대 전력이 아닐 순 없겠지.”
-네. 하지만 마스터는 단순히 강화 슈트만으로 날뛰는 존재가 아니니 걱정 안 합니다. 저와 강력한 사이킥 에너지. 그리고 그 산물로 지금의 슈트가 구현화 되는 거니까요.
“알았어. 일단은 별이나 보고 있자고.”
워낙 세하가 산보하듯 다니며 몬스터들을 박살낸 탓에 그 어떤 것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하는 모처럼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
“1차적으로 드론과 무인병기로 장거리에서 타격을 가할 것입니다. 그 이후에.......”
이동하는 거대 헬기 안에서 가상화면들이 떠올라 있었고 한창 브리핑이 진행되고 있었다.
봉황 길드의 최대 전력인 봉황참마단. 그리고 그 핵심전력이라 할 수 있는 S급 헌터들도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중 라설연은 지극히 차가운 얼굴로 자리하고 있었다.
“설연 언니. 왜 그래요?”
그때 설연의 옆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보랏빛의 긴 머리칼을 트윈 테일 식으로 묶은 발랄하고 어여쁜 소녀였다. 하지만 라설연은 그녀가 더 없는 몬스터를 학살한 S급 헌터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존재라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이렇게 전력을 동원해야 하나 싶어서 그래.”
라설연이 한숨이 나올 걸 참고 말하자 트윈 테일의 소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머! 언니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 가 봐요?”
두 여성이 말하는 것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이야 어찌됐든 그녀들이 희소성 높은 비대칭 전력들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브리핑 잠시 중단해.”
하지만 이를 놓치지 않고 나서는 이가 있었다. 검은색의 전신 방탄복이 연상되는 헌터 슈트 차림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청년이었는데 마치 현직 군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짧은 머리칼에 왼쪽 귀 전체가 금속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피어싱이 가득 찬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은 뭐가 그리 걱정이지?”
“아. 진후 오빠. 오늘따라 설연 언니가 걱정이 많아 보여서 말이야.”
트윈 테일의 소녀가 무척 반기며 말하자 진후라 불린 청년은 피식 웃었다.
“주리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심각한 게 맞군. 뭐가 걱정되는 거니? 설연아.”
“아. 단장님 죄송해요.”
라설연은 솔직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현 봉황참마단의 단장이자 S급 헌터인 김진후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지난번에 만났던 상대라서 그런 거니? 오늘 일은 길드의 명예를 걸고 나서는 일이란다. 그 자는 우리 길드를 더없이 모욕했다. 지금까지 우리 길드가 쌓아온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다.”
“네.”
라설연은 뒷말 않고 깔끔하게 시인했다. 그러자 김진후는 물러나서 다시 장내의 중심으로 돌아갔다.
“항상 하던 대로 진행하도록 하자. 물론 절대 방심은 하지 말도록 적어도 AAA급 몬스터 이상을 사냥한다는 마음으로 나서도록 하자.”
다시 영상이 켜지며 브리핑이 재개되었다. 그럼에도 라설연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빠져야 할 거 같은데.’
불길한 예감은 계속 들었지만 라설연은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균열 지대의 초입임을 알리는 통신이 들려오고 있었다.
“자자. 일단은 주변의 몬스터들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움직이자. 각 포인트 선점이 우선이다.”
김진후는 각 팀원들에게 상황을 상기시키며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라설연은 그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다른 생각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