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칼날의 흐름 (21/72)



〈 21화 〉칼날의 흐름

크아아아!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벽이 단순한 벽이어도 위압감을 느낄만한데 그 벽의 표면에 울부짖는 이들의 표정이 생생하고  무너지는 감정이 가득 담겨 절규한다면 이를 보고 맨 정신을 유지할 사람은 몇 없을 것 같았다.

파파파팟!

하지만 세하의  손에는 굵직한 사이킥 블레이드가 나타났고 그 문제의 벽들을 버터라도 자르는 것처럼 베어버렸다.


“너희 같은 것들은 수도 없이 봤어.”


한 번도 아닌 수십 여 차례 빛의 선이 그어지자 벽들은 온데  데 없었고 감정을 울부짖던 얼굴들도 조각조각 나뉜  사라지고 말았다.

-마스터.......


루이제는 한없이 가라앉아 보이는 세하를 걱정했다. 하지만 세하의 뒤이은 말은 그것을 일소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싸워왔는지는 너도 잘 알잖아? 루이제.”
-잘 알지요. 마스터는 전생의 최후의 순간에서도 엑펠트를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갈 생각이셨으니까요.
“어찌 보면 제정신은 아니었지. 다들 친구나 연인 아니면 가족이 휘말려서 사느니 만도 못한 꼴이 되는데 나는 주저 없이 베어버리고 없애버렸으니까.”


라인버스터 슈트의 육중한 발이 아직 남아있던 얼굴의 조각을 뭉개버렸다.

“그랬으니 전생에 아마 다시  수 있으면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 거 같아.  기억나지?”
-네. 기억나요. 어느 날 힘들다고 엘렉티오 콕핏 안에 주저앉아서 하루 종일 징징.......
“시발. 물어본 내가 등신이었네.”


말은 욕이 나왔지만 세하의 표정은 편안해보였다.

“보이는 대로 다 썰어버리자.”
-네.  정도면 초기 상황만 못하니까요.

그렇게 주종이 한 마음이 되자 세하의 진격이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
계속 보이는 것은 미로 같은 석벽과 가끔씩 튀어나오는 융합된 벽이나 맛이  인간들뿐이었다. 벽은 부셔버렸고 인간들은 단순히 염동력에 가까운 힘만 때려 박자 픽픽 쓰러지더니 마치 지워지는 것처럼 사라질 뿐이었다.


“코어도  나오고 뭔가 별로네.”


세하의 투덜거림은 심해지고 있었다. 루이제는 그런 세하의 감정을 배려해서 굳이 태클 놓는 소리는 안하고 있었다.

-아무튼 엑펠트와 관련이 있는 곳임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시원한 게 나올까? 내가 엘렉티오를 우주 단위로 몰고 다니면서 그놈들을 부수기만 했지. 정작 대화를 한 적은 없는데 말이야.”

세하는 뭔가 회의적인 기분이 들었다.

-지금것 균열 지대에서 죽인 몬스터들이 기억하십니까?


갑자기 루이제가 꺼낸 말에 세하는 멈칫하고 말았다.


“어이.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드는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엑펠트가 주로 하는 짓거리들은 생명체든 뭐든 죄다 융합시켜서 써먹는 일이 많죠.
“그것들  두 놈 정도가 이상한 말을 하긴 했지.”
-네. 아마 이 던전의 끝에 가게 되시면 못 볼꼴을 보시게 될 것 같습니다.
“망할 것... 던전 들어오기 전에 그런 말을 해야지.”
-라설연과 일라이저에게 통수 맞을까봐 서둘러 이곳에 오신 게 누구인지 생각해보시죠.


루이제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세하는 달리  말이 없었다.


‘지오......’


그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무슨 잡소리냐?”


세하는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 자신이 왠지 거칠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스터. 무척 예민해지셨습니다.

“웃기잖아.  전생했는데 이 안에서 그 전생한 이름으로 부르는 작자가 있으니 말이지.”


세하는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헬멧의 디스플레이에는 서서히 사이킥 반응이 나오고 있었다. 색이 점점 붉어지며 표시되는 것이 심상치 않은 일의 전조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 이상 적도 안 나오니 한  가봐야겠군.”

세하는 육중한 슈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덕에 상당한 굉음에 던전 내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전진하다보니 어느덧 하나의 광장처럼 넓은 곳이 나왔다. 물론 천장은 석벽의 재질과 같은 곳으로 되어 있고 충분히 높아보였다.


“이건 뭐냐?”

그리고  공간의  가운데서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는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엑펠트 오염이나 융합체의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세하로서는 전생의 기억으로 눈에 익은 옷차림이었다.

-당시 지구연방군의 파일럿 슈트군요. 마스터. 혹시 기억에 있는 인물입니까?
“아니.”

루이제가 물었지만 세하는 단호하게 말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오. 와줬구나.”


그 여성은 세하가 다가오자 반갑게 웃으며 맞이했다. 하지만 세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넌 누구냐?”
“누구냐니. 지오. 나야. 나는.......”

여성은 당황한 듯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세하는 그대로 오른손의 사이킥 캐논을 발사해버렸다.


콰앙!


여성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세하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기억 어딘가에 있던 모습이로군.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이름도 나이도 몰랐고 당시 PLB 기어 파일럿 중 한 명이고 난전 중에 전사했다는 것만 안다.”

콰앙!


세하는 여성이 있던 자리에 다시  번 사이킥 캐논을 날렸다.

“당장 나와라. 어설프게 사람 머릿속을 들여다볼 생각인가 본데 제대로 대갈통을 날려  테니 나와라.”
‘킥킥킥.......’


세하가 공격을 가한 자리에는 제법 큼직한 크레이터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꼬리를 물며 장내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스터. 지금껏 감지되지 않았던 반응입니다.

그리고 루이제의 보고가 불길하게 들려왔다.

“뭐?”
-에너지의 총량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뭐랄까 그 격이... 아니 아무튼 대화가 가능한 이성체랄까 그런 느낌이 듭니다.

사실 루이제는 이제 단순한 AI가 아닌 만큼 지금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세하가 두 눈을 크게 뜨게 전방을 노려보았는데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계속커지더니 어느새 안개 같은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크어어어.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상당히 거대했다. 그 높이만 해도 10미터를 훌쩍 넘었다. 그리고 그 뒤로 늘어진 몸체까지 치면 전체적인 몸길이가 30미터는 가까이 될 것 같았다.

“아. 역겨워.”


그 압도적인 거체에 기세가 눌릴 법도 하지만 세하는 오히려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맞습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필드 보스 몬스터들이 죄다 합쳐진 것 같은 모습입니다.


루이제의 말대로 눈앞에 나타난 것은 융합이 되다 못해 뭔가 심하게 얽히고 뒤틀린 모양새였다.
6개의 머리를 지니고 있었고 5개는 조류의 것이되 다른 하나는 마치 사마귀 같은 모양새였다.
사마귀 같은 커다란 낫과도 같은 앞발이 지면을 찍을 정도였지만 그 뒤에 펼쳐진 2쌍의 날개는 분명 커다란 새의 것이지만 그 표면은 묵빛의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길게 이어진 몸통은 지네인지 뱀인지 모를 정도로 길었다. 그리고 자잘한 다리들이 무수히 달려있는 꼴이었다.


“키메라도 이것보단 절제가 있겠다. 아니 엑펠트의 융합체 답다고 할까?”

이 거대 융합체를 보고서 세하의 평은 간단했다.

“아무튼 역겨워.”
“하하하하!”


세하가 말하기 무섭게  융합체에서 높은 목소리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단순히 이계의 실험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화가  상대가 나올 줄은 몰랐군.”

 들으면 미성이라 할 만한 음성이었지만 지금 세하에게 있어서는 귀를 찢을  같은 소음에 불과했다. 그래서 헬멧 안의 표정이 한 없이 일그러지고 있었는데 그 음성은 더 없이 고양된 상태로 말했다.


“아무튼  됐어! 외부에서 누가 그렇게도 재료들을 없애나 싶었는데 잘 됐지!”
‘재료라.......’

단순히 생명체라 하지 않고 재료이니 어쩌니 하는 것이 일단 정상적이지 않았다.

“엑펠트냐?”

세하는 일단 물었다. 그러자 융합체의 모든 눈이 세하를 향했고 그 안에서 재수 없는 음성이 계속 들려왔다.

“엑펠트? 그게 언제적부터 불리는 이름인지 모르겠군. 사실 우리로서는 그 이름이 소용이 없지. 각자의 이름 자체로 불리는 것이 언제더라. 모르겠군. 모르겠어. 지금으로서는.......”
“모르시면 닥치시지?”

세하는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뭐라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며? 그럼 뭘 말하겠다는 거지? 들어줄 사람이 없는 쓰레기만도 못한 아니 배설물만도 못한 말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혼합물이겠지. 뭐 아무튼 이런 이야기도 없는 건 아니지. 자기들은 규소 기반 생명체라서 탄소 기반인 것들은 생명체로 칠 수 없다니 하면서 아주 엿 같이 사람을 죽여 대는 놈들 이야기도 있었지. 너도 그런 케이스냐? 상관없어. 나도  같은 건 산 걸로 안 칠 테니까. 그러니 더 이상 산소 낭비하지 말고 뒈져라!”

세하는 그대로 슈트의 모든 무기를 펼쳤다. 어깨 위는 6문의 블릿츠 캐논이 예열되기 시작했고  손에는 사이킥 캐논이 드러났다.
슈트의 정중앙에는 원형의 파동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무기라서 루이제가 기겁할 정도였다.


-마스터! 디스트로이 캐논입니까? 그게 지금 슈트에서 가능할 리가.......
“몰라. 저 눈앞의 자식을 보니 너무  받아서 말이지. 당장  망할 것을 박살내라고 내 혼이 울부짖는  같군. 간다!”


콰아앙!

모든 무기들이 빛을 내뿜었다. 찬란하다 못해 압도적인 빛과 뇌전의 향연에 융합체는 속절없이 휘말리고 말았다.

“크허허헉!”


그 속에서 고통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세하는 거기에 혀를 찼다.

‘이 정도로도 안 죽었어?’


세하는 일단 에너지의 방출을 멈췄다. 그러자 드러난 융합체의 신체는 마치 모래처럼 부스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세하의 라인버스터 슈트와 똑같은 형태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 조차도 융합체인 것을 알  있었다.  표면에서 꿈틀거리는 생체 기관 등이 엿보였고 그 안에서 세하의 속을 긁은 음성이 들려왔다.


“크으윽... 역시 단순히 큰 거로는 안 되겠군.......”
“어설프게 따라쟁이냐? 그럼  죽을 거다!”

세하가 이번에는 어깨 위의 블릿츠 캐논만 발사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화력이 돼서 눈앞의 융합체는 전격의 폭풍에 완전히 찢어발겨졌다.

“크으으으.......”


하지만 융합체는 죽지 않았다. 마치 불사신이라도 된 것 마냥 간신히 인간 형태의 윤곽만 남기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거 완전 허당인데?’


세하는 융합체가 완전히 죽지 않아서 놀랐지만 이내 무릎을 꿇고서 신음을 울리는 터라 조금은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엑펠트 맞냐?”
“나는 나의 존재도... 으허헉!”

다시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나오려고 해서 세하는 사이킥 캐논을 융합체의 머리에 날려버렸다.

“묻는 말에 똑똑히 대답해라. 너는 분명  머릿속에 있는 존재를 재현했었어. 그건 내 전생을 안다는 거고. 그런 짓을 할 만한 존재는 엑펠트 외에는 없어. 그러니 제대로 말해라. 괜히 내 성질 긁으면 나는 그냥 뒤도  돌아보고  박살낼 거다.”

세하가 으름장을 내놓으며 다시 사이킥 캐논의 포구를 겨누었다. 융합체는 간신히 머리를 재생시키며 고개를 들었다.
물론 밋밋하게 이복구비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세하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지경이었다.


-마스터.


그 때 루이제가 나섰다.

-아무래도 원하는 걸 못 얻으실 거 같아요.
“그래?”
-네. 결국 이 존재도 단순히 사념 정도의 수준이네요. 만약 제대로 대화가 될 정도라면 이 정도에 그치진 않겠죠. 아무래도 계속 고통이 가해지니 뭔가 말할 법도 한데 말이죠.


루이제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말하자 세하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아예 눈앞의 융합체를 박살낼 생각으로 사이킥 캐논에 에너지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갑자기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에 세하는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고 말았다.


-마스터. 이 목소리는........
“그래. 나도 지금 환청인가 싶어. 이게 무슨.......”


세하는 지금 이 목소리가 왜 들리는 건가 싶었다. 단순히 슈트에 통신이 연결된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생생한 육성으로 들리는 것인지라 세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민세하 헌터님. 죄송해요.”

그리고 시선이 닿은 곳에 그녀가 존재하고 있었다. 헌터 협회의 엑펠트 조사관이라는 레이린 리. 그녀가 막 그림으로 그려낸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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