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접근의 방향
-안녕하십니까? 민세하 헌터님. 저희는 북미 최고의 헌터 길드인 제너럴 마이트 한국 지부입니다.
메일의 도입부야 정중해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입체화면을 통해 보는 세하로서는 쓴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별 내용 없네. 귀하의 가치를 인정하는 곳으로 오라 이건데?”
-하지만 엑펠트에 대해 언급된 것이 있어 신경 쓰이는 군요.
루이제의 말대로 메일의 말미에는 현재 대한민국 지역에 엑펠트의 존재가 염려되니 이에 대해 힘을 보태줬으면 좋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북미 지역에서도 보인다는 거겠지?”
-네. 하지만 아직까진 급한 건 없어 보입니다. 일단은 연천 균열 지대를 좀 더 파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루이제의 조언은 타당했다. 4대 필드 보스급 몬스터 중 둘을 처리했고 그 중 하나가 엑펠트와 관련이 있으니 그럴 만했다.
“아무 곳이나 들쑤시고 다니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나저나 이 메일은 무시할까?
-아마 마스터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다시 연락을 해올 겁니다. 한국에 지부까지 있는 마당이니 지금 마스터가 협회와 접촉한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마냥 내치는 것이 답은 아닙니다.
“알았어.”
세하는 일단은 메일을 갈무리해두기로 했다.
*
때는 10월 중순 경. 서서히 싸늘해지는 기운이 밀려올 때인지라 제법 몸이 움츠러들 만하지만 세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도 익숙하다보니 이젠 별 감정도 없네.”
연천 균열 지대 초입은 이제 어려움이 없었다. 단순히 마크2 슈트만으로도 몬스터들을 격살하며 나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현재 협회 정보로도 다른 네임드 몬스터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좀 더 들어가 봐야지. 어?”
세하는 다시 몸을 공중으로 띄우려는데 뭔가 디스플레이에 잡히는 걸 보고 멈췄다.
-헌터들이군요.
멀리서 보기에도 상당히 중무장하고 분대 규모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여기 들어오려면 허가가 있어야겠지?”
-마스터는 마크2 슈트 덕분에 막 날아다녔죠. 뒤늦게 허가가 떨어지긴 했지만요. 아. 잠시만요.
루이제가 세하를 놀리듯 말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세하는 왜 그러나 했더니 디스플레이에 레이린의 번호가 표시되었다.
-레이린 리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요.
“연결해.”
세하의 허락이 떨어지자 레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혹시 지금 사냥 중이신가요?”
“네. 연천 균열 지대입니다.”
세하가 현재 위치를 밝히자 레이린은 해맑게 웃었다.
“역시 그 쪽부터 파보시는 거군요.”
“다른 곳을 들쑤시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으니까요. 무슨 일입니까?”
“듣자 하니 봉황 길드와 제너럴 마이트 한국지부에서도 그곳에 헌터 팀들을 보냈다고 해요.”
레이린이 일러주는 말에 세하는 순간 뭔가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그래요?”
“네.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시라고 알려드렸어요. 사실 그 두 길드처럼 대규모인 길드들은 어느 정도 엑펠트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 민세하 헌터님의 활동도 신경을 쓰는 눈치니까요. 그럼 안전하게 움직이시고 혹시라도 참고할만한 정보나 샘플이 나오면 부탁해요.”
레이린은 그렇게 통화를 끊었다.
-부탁하는 자세가 됐군요.
“그래. 뭐 아무튼 가는 도중에 나온다면이 조건이니까.”
세하는 일단 좀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
콰콰콰쾅!
몬스터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서는 마크3. 라인버스터 슈트의 성능이 발군이었다.
-확실히 공세가 거센 만큼 리버스 필드 게이지가 금세 차오르는 군요.
“이거 자꾸 맛들이면 위험한데.”
세하는 어느새 게이지가 찬 것을 확인하고 몬스터들이 달려드는 순간 리버스 필드를 발동했다.
헌터 협회에서 각성자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풀게이지를 소모해서 날리는 충격파인지라 대다수의 몬스터들은 몸에 있는 구멍에서 죄다 피를 쏟으며 거꾸러지고 있었다.
“그만치 코어도 잘 벌어들이니 좋지 뭐.”
아예 숨이 끊어진 몬스터들은 세하가 손도 대지 않고 염동력으로 상처를 째서 코어를 꺼낼 수 있었고 뒤이어 나타난 아공간 인벤토리가 청소기처럼 그걸 빨아들이는 행동이 반복되고 있었다.
-현재 사이킥 에너지 총량은 80퍼센트입니다. 아무래도 리버스 필드 덕분에 에너지가 충전되니 유지력이 상당하군요.
“하지만 이 슈트를 쓸 때만 그런 거잖아? 게다가 기동력이나 신경감응은 마크2보다 둔해. 정면으로 맞부딪쳐서 싸울 상대가 아니면 고생할 거야.”
세하가 생각 이상으로 슈트에 대해 이해하고 있자 루이제는 과장될 정도로 칭찬했다.
-훌륭하십니다! 벌써 그 정도 시라니요. 게다가 사이킥 에너지의 운영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난 네가 칭찬하면 그렇게 안 들리더라. 차라리 욕을 해 줘.”
그런 식으로 사냥이 잘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도 세하는 항상 탐지 레이더를 주시하고 있었다.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황무지가 펼쳐져 있을 뿐이고 지면에 돌아다니던 몬스터가 때로는 땅 속에서 튀어나오는 등등의 일만 펼쳐질 뿐이었다.
라인버스터 슈트의 방어력이나 리버스 필드로 충격을 저장 방출해버리는 사기적인 능력 때문에 세하는 별 일 없이 진전하고 있었다.
콰르르르!
“음?”
세하가 위치한 곳은 아니었다. 레이더를 보니 약 300m 전방에서 발생하는 일이었고 제법 커다란 몬스터가 땅속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킬러웜이군요. 매스커 웜보다는 격이 떨어지지만 수가 많으면 위험합니다.
루이제의 보고에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확대한 화면으로 보니 일단의 헌터들이 주변에서 튀어나온 킬러웜들에게 둘러 싸여 고전하는 모습이 역력해보였다.
“저걸 도와줘야 해?”
-의무는 없죠. 하지만 마스터는 본래 인간이시죠? 돕고서 뭔가 대가를 요구하면 좋겠죠.
루이제는 어딘가 시니컬하게 답했지만 세하는 바로 움직였다.
“안 보이면 모르겠지만 보였으니 가봐야지.”
일단 리버스 필드 게이지가 남아 있어서 마크3 슈트 상태로 전력 질주했다. 마크2의 비행보다는 느렸지만 적어도 마크1 슈트 때보다는 제법 빨랐다.
-현재 킬러웜의 개체 수는 10개체 정도입니다. 헌터들은 중앙에 부상자가 있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원진을 형성한 것 같습니다.
“그렇네.”
세하는 점점 가까워지는 킬러웜을 보고서 각오를 다졌다.
검은색의 외골격에 전체적으로 지네 같은 몸이었고 머리 부분에는 마치 가위처럼 날카로운 입이 달려 있었다.
몸길이는 적어도 7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런 몬스터가 10마리나 나타나서 주변 땅을 헤집으며 히트 앤드 런으로 헌터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우선 간다!’
일단 헌터들이 위급해 보여서 세하는 크게 도약하며 등을 보인 킬러웜에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착지하기 무섭게 리버스 필드의 충격파를 펼쳐서 헌터들에게 달려드는 킬러웜들을 휩쓸었다.
콰아아앙!
“헉? 누... 누구.......”
한창 공격당하던 헌터들은 두텁고 육중한 슈트차림인 세하를 보고서 놀라고 있었다.
“브... 블랙메탈!”
게다가 그들 중 누군가가 세하를 알아보았다. 평소의 세하라면 거기에 답변을 해주겠지만 한창 충격파에 휘말렸던 킬러웜들이 태세를 갖추며 세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일단 괜찮군.’
세하가 급히 펼친 충격파에 헌터들도 말려들었지만 다행이 다친 이들은 없어보였다. 헌터들은 세하가 뛰어들기 전부터 배리어 같은 것을 펼치고 있었는데 1차적으로 주변을 둘러싼 킬러웜들이 대부분의 충격파를 얻어맞아서 배리어만 날아간 상태였다.
키에에에!
그렇게 세하가 헌터들의 안위를 확인하는 사이 가장 근처에 있는 킬러웜이 가위 같은 큰 입으로 세하를 물려 달려들었다.
콰득!
세하는 그 입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사이킥 블레이드를 발출해서 베어버렸다.
입이 날아간 킬러웜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졌다. 하지만 세하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이킥 블레이드를 채찍처럼 변화시켜 지면을 쓸 듯이 후려갈겼다.
‘좋아.’
거기에 몇몇 킬러웜들이 땅속에 묻고 있는 몸이 베어져 나가며 비틀거렸다.
세하에게 구함을 받은 헌터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빈틈을 보이는 킬러웜의 머리에 이내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고 세하는 그렇게 틈을 보이는 개체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콰앙!
아예 두터운 포신이 된 양 손이 빛을 내뿜었다. 적중당한 킬러웜의 머리가 아예 날아가며 그 긴 몸을 지면에 뉘이고 있었다.
‘제법이네.’
세하는 잠시 틈을 봐서 헌터들을 살폈다. 세하가 틈을 만들기 무섭게 반응 하는 걸 보니 보통 정예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몰려 있었지?’
-저들의 중앙을 보면 알 수 있겠네요.
루이제의 지적에 세하는 그제야 헌터들의 중심에 있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헌터들처럼 각종 급소를 단단한 아머로 감싼 속칭 헌터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가녀린 여성인 것이 확인됐다. 게다가 뭔가에 시달리는 지 안색이 새파랗게 돼서 벌벌 떨고 있는 상태였다.
‘저 사람을 지키려는 거였군.’
-네. 아무튼 현장을 마무리 짓죠.
루이제의 말대로 세하는 치명상을 입고 부들거리는 킬러웜들의 숨통을 끊었다. 대구경의 핸드캐논이 빛을 뿜을 때마다 머리통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 같이 싸운 헌터들로서도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세하는 안심시키려는 의도로 일단 헬멧만 해제했다. 거기에 헌터들은 다들 주저앉으며 한숨을 토했다.
“감사합니다. 블렉메탈.”
“조금 불편한 호칭이지만 일단 받아들이죠. 헌터 협회 소속 S급 헌터 민세하입니다.”
세하가 먼저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헌터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는 봉황 길드 소속의 헌터들입니다. 민세하 헌터님의 구함에 감사드립니다.”
‘쩝. 하필 봉황 길드냐.’
세하로서는 조금 껄끄러운 상대들이었다.
-오히려 봉황 길드에 빚을 지웠다고 생각하죠.
레이린의 경고가 있기도 해서 마주칠 거라 생각했지만 자신이 먼저 다가간 셈이라서 세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벌써 소속을 정하셨군요. 아쉽습니다.”
연장자로 보이는 헌터가 말했지만 세하는 무시하고 물었다.
“보아 하니 실력들이 출중하시던데 어쩌다가 그렇게 포위 되셨습니까?”
세하는 이유를 짐작했지만 우선 물었다. 그러자 앞서 말한 헌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팀원 중 한 명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서 살피는 사이 킬러웜에게 습격당했습니다.”
‘발작?’
세하는 뭔가 머릿속에 쎄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맞을 겁니다.
루이제가 세하의 희망을 부셨다. 아무튼 세하는 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발작이요? 다른 분들은 괜찮습니까?”
“네. 아무래도 쓰러진 지원 외에는 모두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보통 몬스터들의 기척을 읽거나 탐지를 하기 때문에 중요했는데 말이죠.”
지원이라는 헌터가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제가 잠깐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네.”
아무래도 자신들로서는 별 수가 없는지 세하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지원을 중심으로 다들 둘러싸고 있을 뿐 별 다른 행동을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아... 더 이상 접근하면 안 돼... 더 이상........”
지원은 아예 머리를 감싸 쥐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하는 그 모습에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루이제. 이거 정신 오염 같지?’
-네. 굉장히 불안한 파장이 이어지는 군요. 여기서 무리했다간 아예 폐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루이제는 제법 암담한 결론을 내놨다. 그래서 세하도 심각한 표정으로 리더격인 헌터에게 말했다.
“일단 이 지역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라고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좀 더 심해지면 아예 정신이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세하가 그렇게 봉황 길드원들에게 심각함을 말하고 있을 때였다.
쿠르르르!
뭔가 거대한 것이 지면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인가 싶어 세하가 급히 헬멧을 장착하고 레이더를 살폈지만 루이제가 안심시켰다.
-몬스터가 아닙니다.
“그래? 어?”
세하는 지점을 포착하고 확대된 화면을 보고서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황색으로 도색된 커다란 장갑차 1대가 흙먼지를 일으키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여기서 차량을 보게 될 줄은 몰라서 세하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루이제가 말했다.
-제너럴 마이트의 표식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