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화 〉이어지는 준비 (10/72)



〈 10화 〉이어지는 준비

“많이 힘들었겠네.”


세하는 왕의 말을 이해했다.

“그것들이 아주  같은 건 사실이지.”
‘으음.......’
“네가 죽기 전 그것들을 봤다 이거지?”
‘그... 그렇다... 그것들은.......’
“아무튼 넌 박살났고 목숨이 다했지. 그 뒤는 내가 충분히 이어받아 복수해주마.”
‘크하하하! 마음에 드는 군.’

콰직!

왕이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세하의 사이킥 블레이드가 그대로 왕의 투구를 내리 찍었다.


-대상 침묵했습니다.
“그래. 그럼 슬슬 던전도 무너지겠군.”

세하는 제법 깨끗하게 뚫어버린 왕의 투구를 집어 들었다.
왕의 투구에서 한  왕의 몸이었던 재가 우수수 떨어졌다. 세하가 의외로 세심하게 찍은 탓인지 이마 부근에 조그만 구멍이 나있을 뿐인지라 증거로서  좋아 보였다.

“코어가 제법 크군.”


지금까지 본 코어들이 죄다 엄지손가락 정도 크기였다면 왕에게서 나온 것은 주먹만 한 크기의 것이었다. 그 색도 제법 빛을 발하고 있을 정도라서 눈에 띄었다.

-아무튼 모두 수집하겠습니다.

이제는 세하가 말하지 않아도 루이제가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어서 왕의 투구와 코어를 빨아 들였다.


“루이제. 어떻게 생각해?
-방금 죽은 왕의 이야기 말이군요.
“확실히 엑펠트겠지?”
-엑펠트가 저와 마스터의 전생 때만 있지는 않겠죠. 그들의 존재는 그 정도로 가공할 정도였습니다.
“방금 나는 이런 생각도 했어. 전생의 내가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은 건 아닐까 말이지.”
-마스터. 그건........

루이제의 음성에서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자세히 파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나는 설사 그렇다고 해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세하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신의 헬멧을 톡톡 두들겼다.

“다 죽게 생겼는데 한 방 먹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라서 말이지.”


그러는 사이 눈앞에서 다시 공간의 일그러짐이 나타났다.


“이제 가보자고.”

세하가 그렇게 공간의 일그러짐을 통과하자 던전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던전 클리어 됐습니다.

“뭐?!”

아직 도심의 임시막사에 있던 협회장 류한호와 주운찬은 갑자기 오퍼레이터가 보내오는 통신에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이런. 던전이 생성된 지 2시간이 조금 넘었나? B급 던전을 단독으로 클리어  정도면 제법 싹수는 있군.”

류한호가 벌떡 일어났다. 주운찬도 뒤를 따르려고 했지만 류한호가 제지했다.


“자네는 현장을 정리해줘야 하네.”
“그건 그렇군요.”
“나중에 저 자를 정식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빼놓지 않겠네. 그럼 부탁하네.”


류한호가 거구답지 않게 바람처럼 막사 내에서 사라졌다. 뒤에 남은 주운찬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이거 괜찮으려나?”

주운찬은 괜스레 불안한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주먹을 꽉  뿐이었다.


*
세하는 다시 고층건물의 옥상 위에 나와 있었다. 던전 게이트가 생긴 곳이 그 곳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밑에 보이는 풍경에 쓴 웃음을 지었다.


“잘 마무리 됐나 보네.”
-협회 측에서는 여러모로 신경 쓰고 있습니다. 한동안 도심에서는 게이트가 뜨지 않았는데 이러니 안 그럴 수도 없겠죠.
“그렇네.”


그렇게 말하는 세하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쓸쓸해보였다. 지금은 헬멧은 해제한 상태라서 그 표정이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마스터?
“아, 전생의 기억과 현생의 기억이  섞여서 그런가? 뭔가 감상적이 되는  같아.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세하는 갑자기 두 눈을 날카롭게 뜨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처음에 멀찍이 있던 대상이 서서히 형태를 드러낼 정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요즘은 흔하게 사용되는 드론이었다. 하지만 일반 드론과 달리 제대로 된 부스터와 탐지 장비 등을 갖춘 것이 상당한 고가의 장비로 보였다.


“마치 자네를 스토킹이라도  것 같아서 미안하게 생각하네.”


그리고 세하의 등 뒤에서 태연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놓고 뒤에서 나타나시는 게 무슨 암습이라도 하려는 거 같습니다.”

세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느새 검은 정장차림에 가슴께까지 오는 흰 수염을 휘날리는 남성이 당당하게  있었다.

‘뭔 노인장이 이리 키가 크나?’


얼핏 얼굴을 봐서는 연륜이 느껴지는 존재였지만 그 기백과 체구부터가 마치 산이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 류한호라고 한다네.”
‘무성(武星).’


류관호를 알아본 세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주 지부장에게는 이야기를 잘 들었네. 하지만 아무래도 시험이 필요했어. 그 정도로 자신이 있고 우리에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해서 말일세.”

류한호는 천천히 세하에게 다가왔다.


“던전은 클리어했겠지? 그 증거를 보고 싶네만?”

세하는  말에 어딘가 불편한 미소를 짓더니  손을 들었다. 그러자 아공간 인벤토리가 열리면서 그 안에서 왕의 투구가 튀어나왔다.


“호오?”

류한호는 그걸 알아보고서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세하는 왕의 투구를 한손에 들더니 일단 한 바퀴 빙글 돌려보였다.


“참 딱하고 딱한 자의 증거품이었습니다. 자기 무덤에 침입했다고 역정을 내는데 제가 살려면 어쩔 수 없었죠.”
“호오. 그 정도로 자네에게 여유가 있었나?”
“여유요?”
“그래. 여유.”


류한호는 왕의 투구를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잡아야 할 상대의 뒷사정까지 들을 정도로 여유가 있고 결국 해치운 것이지. 자네에게 강자의 여유가 있었다는 말일세.”
“듣기에는 좋은 말 같군요.”


세하는 그대로 왕의 투구를 아공간 인벤토리에 던져 넣어버렸다.


“아무튼 자네는 시험을 통과했네. 그러니 협회장인 나에게 이야기해보게. 자네가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며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말일세.”


류한호는 그런 세하에게 악수하듯 손을 뻗었다.


“다음에 정식으로 협회에 가서 말씀드리죠.”


하지만 세하는 그런 류한호를 지나쳤다.

“허허허. 대담한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류한호를 지나치며 세하가 등을 보이며 걷자 류한호는 허탈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지금 많이 피곤해서요. 협회장님처럼 대단하신 분을 상대할 기분이 아니네요.”
“음. 그렇군. 갑작스럽게 생긴 던전을 혼자서 클리어했으니 그럴 만하군.”

류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자네 메일주소에 내 허가장을 보내도록 하겠네. 편할 때 찾아오도록 하게.”
“정말 편할 때가 가겠습니다.”


세하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옥상 계단을 통해서 내려가 버렸다. 혼자 남은 류한호는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계속 웃기만 했다.



*
-현명한 판단이셨습니다.


세하가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오자 루이제가 말했다.


“왜? 나 기분 상할까봐 여태 말 안한 거야?”


세하는 돌아오기 까지 루이제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을 놀리듯 말했다.

-아니오. 지금 상태에서 류한호가 맞붙어서 좋을 게 없으니 그랬죠.
“그런데 나 솔직히 진짜 피곤해서 온 거야. 그 노인장 지금 상대해봤자 말하는 게 죄다 안 들릴 거 같아서 말이지.”
-그런 거면 다행입니다. 마스터가 그리 섬세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봐야겠군요.
“자자. 오늘 수입을  볼까?”

세하는 원룸 근처까지 오면 슈트를 해제해버리기에 지금은 그냥 평상복차림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세하가 눈앞에 손을 내젖자 슈트의 전체 모습이 중강현실로 나타났다.

-마스터. 제법 이시네요.
“일단 내가 마스터이니 이런 건 직접  줄 알아야지. 어디보자. 인벤토리.”

세하는 슈트의 영상과 떠오르는 여러 문자 중 인벤토리로 표시 된 것을 눌렀다. 그러자 공간의 일그러짐이 영상화되며 그 안에 존재하는 물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어도 B급 던전이었으니 코어의 가격이 나쁘지 않을 겁니다. 현 시세로 치면 3천만원 정도 나오겠네요.


루이제가 코어들을 보고 하는 말에 세하는 놀라서 물었다.

“뭐? 그거 밖에 안 해?”
-듣기 따라서 힘들게 사는 하급 헌터들이 욕할 말 같지만 이거 때문에 그러시는 거겠죠?

주먹 크기의 코어와 왕의 투구가  앞으로 떠올랐다.

-이 코어는 마스터에게 쓸 거니까요. 왕의 투구는 나중에 류한호가 딴 소리 못하도록 협회에 가지고 가고요.
“잠깐. 나한테 쓴다고?”

세하는 뭔가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휩쓰는 것 같았다.


-네. 사실 마스터가 계속 사이킥 에너지를 운영하면 총량도 늘어나고 강해질 것이지만 더 확실한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다행인데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하게 들릴까?”
-불안할 수밖에 없죠. 이건 아주 아픈 방법이니까요.

무감정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지금 세하의 머릿속에 들리는 루이제의 음성은 마치 사신의 것처럼 스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몬스터들에게 나오는 코어는  시대에는 큰 화폐 수단이기도 하고 여러 방면의 에너지원으로도 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바로 헌터의 육체를 강화시키는 방법이지요.


꿀꺽!


세하는 자기도 모르게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사이킥 에너지는 대상자의 육체가 강해져도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방법이 있으니   수는 없지요. 많이 아픈 거요? 강해지는데 아픔이 대수겠습니까? 하급 헌터라면 좀 걱정되겠죠. 이해해요.  분들은 약해서  방법을 쓰면 죽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루이제는 태연하게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세하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모면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영상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세하는 어느새 슈트로  몸이 감싸여 있었다.

“루이제?”


세하가 불안한 마음에 루이제를 불렀지만 그녀는 답이 없었다. 다만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슈트 채로 뻣뻣하게 조종해서 세하를 그대로 침대 위에 눕혔다.


“루이제.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 거 같아. 죽을 수도 있다니.......”
-이런 점에서 지금의 마스터와 전생의 마스터는 좀 다른 느낌이네요. 사람이라면 당연한 감정일까요?

그리고 뒤에 들린 루이제의 음성은 어딘가 감미로운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요. 많이 아프기만 할 거에요. 많.이.

세하는 왠지 슈트가  죄이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던전에서 싸울 때만해도 너무 가벼워서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한 없이 무겁고 꽉꽉 조이기만 했다.

-이건 드레인라이징이라는 시술이에요. 몬스터의 코어를 체내에 넣어서 에너지로 변화, 흡수해서 육체를 강화하는 방법이죠. 물론 마스터께서 염려하신대로 몸이 약하거나 의지가 박약하신 분들은 하면  되죠. 운이 더럽도록  좋으면 몬스터가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마스터는 예외에요. B급이라곤 하지만 던전을 혼자서 여유롭게 클리어 할 정도의 강자시니까요. 그러니 강자는 강자에 어울리는 방법을 쓰셔야 겠죠?


세하가 오늘따라 한없이 수다스런 루이제에 질려서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도무지 통하질 않았다. 그래서 넋을 놓으려는데 갑자기 루이제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마스터. 저를 믿으시죠?
“어... 그... 그게.......”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그럼 시술 들어갑니다.


세하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루이제는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끄아아아아!


세하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처음에는 온몸이 프레스에 눌리는 것 마냥 꽉 짜이는 느낌이었다가 지금은 아예  채로 몸이 불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슈트가 세하의 몸을 완전히 가두고 있어서 발광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세하가 할 수 있는 건 비명을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시술 완료. 그에 따른 사이킥 에너지 총량이 증가해서 다음 단계로 이행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세하가 그렇게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하려는데 갑자기 천상의 부름 마냥 루이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다음 단계?’


세하는 아예 혼이 나가서 제대로 입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심리를 읽었는지 루이제의 설명이 계속됐다.

-네. 드디어 비행능력이 탑재된 마크2 계열, 느와르레이드 슈트가 개방되었습니다.

그 말에 세하는 지금껏 아픈 것도 다 잊고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세하로서는 로망이 이뤄진 순간 같았다. 하지만 루이제는 그런 세하를 보고서 혀를 차는 소리까지 내고 말았다.

-남자들은 커도 어린애라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니네요. 너무 좋아하실 거 없어요.


그리고 이어진 루이제의 말에는 어딘가 차가운 살기마저 느껴졌다.


-슈트에 적응하시려면 훈련이 필요하답니다. 아주 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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