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전생의 순간
지오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완전 엉망이군.”
기체의 전신 상태를 나타내는 홀로그램에서는 모조리 붉은 색으로 점멸이 되어 있었고 간신히 메인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광경은 시커먼 진공의 공간에서 커다란 전함들이 펑펑 터져나가는 것이었다.
-마스터. 엘렉티오의 출력이 80퍼센트가 저하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차가운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에 지오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래서 그랬나? 어쩐지 사이킥 링크도 잘 안 돼서 통증이 없다 싶었더니.”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입니다. 그리고 이곳 방어선이 뚫리면 바로 지구로의 침공루트가 열립니다. 지구연방군은 이번 전투에 모든 전력을 쏟았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음성에 지오는 갑자기 화를 내며 앞을 내리쳤다.
“알아! 안다고!”
다시 전함 한 척이 파괴되어 새하얀 섬광이 지오의 눈앞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못 볼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인간형 병기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온갖 부속에 생체기관까지 뒤섞여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런 존재들이 벌써 수십 개체가 넘어보였다. 파괴된 전함들도 돌연 그 파편 속에 검은 전류 같은 것이 일어나더니 앞서 본 병기들처럼 끔직한 꼴로 엮이며 덩치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엑펠트... 이것들은 생명을 생명으로 안 보나........”
지오는 그 광경을 보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기체 후방에 위치한 연방군의 전력은 미비합니다.
“알아. 루이제.”
지오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과 함께 해온 AI, 루이제가 냉정한 상태인 게 그로서는 다행스러웠다.
“어차피 가만히 있다가는 죽으니 만도 못한 꼴이 되겠지?”
-이미 본 기체도 침식이 시작됐습니다.
루이제는 AI답게 잔인할 정도로 현실을 고했다. 이미 기체의 상태를 나타내는 홀로그램은 이상한 조직들이 뒤덮어가는 걸 강조하듯 피처럼 붉은 색으로 잠식되고 있었다. 거기에 지오는 결단을 내렸다.
“루이제. 엘렉티오의 사이킥 신경연결감도를 최대로 조정해줘.
-마스터. 그랬다가는......
“AI면서 주저하는 거야? 네 말대로 지금 이대로면 그냥 침식되서 지구까지 위험해진다며?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지.”
-네. 사이킥 신경연결감도를 최대로 설정합니다.
루이제의 알림이 들리기 무섭게 지오는 머릿속에서부터 뭔가 세차게 진동하는 통증을 느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보일 지경으로 고통스러웠지만 재차 외쳤다.
“모든 출력을 코어의 디스트로이 캐논에 집중해!”
-알겠습니다.
다시 무감정한 루이제의 음성이 들렸고 그 여파로 지금 지오가 앉아있는 콕핏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엘렉티오 완전침식까지 30초. 29. 28........
“그 동안 고마웠다. 이렇게 함께 가게 해서 미안 하다.”
그 순간 지오는 회한이 스친 표정이 되며 말했다. 그때 루이제도 제법 감정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답했다.
-지금까지 함께 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지오 그라함 소령님. 사선 내에 적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대로 발사하시면 엑펠트 진형을 붕괴시킬 확률이 70퍼센트 이상입니다.
“쏴!
지오는 더 이상 늦출 것도 없이 외쳤다.
강렬한 섬광이 일어났다. 지오로서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고 처음에는 전신에 엄습하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토할 뻔했다.
‘이제 끝인가.......’
하지만 지오는 어느새 모든 감각이 사리지는 것을 느꼈다. 오로지 의식만이 남아 자신의 뒤를 생각해볼 정도였다.
‘내가 죽어버리는데 그 뒤가 무슨 의미야.......’
그리고 머지않아 그 의식조차도 사라졌다.
*
“허억!”
세하는 퍼뜩 눈을 뜨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 뭐야?”
세하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항상 야간에 알바 하는 편의점의 익숙한 풍경에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손님도 없었다.
“미치겠네... 요즘 들어 왜 이런 꿈을 꾸지?”
낮에는 대학을 다니면서 야간 알바를 하는지라 세하는 요즘 몸의 피곤함을 부쩍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에 했던 게임 스토리가 감명 깊었나.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거야?”
세하는 최근 들어 자주 꾸는 꿈을 생각했다.
‘툭하면 졸고 그러는 가운데 꾸고 말이지. 무슨 인류의 운명을 등에 업고 희생하니 어쩌니.’
그냥 자는 가운데 꾸는 꿈이라면 모르지만 요즘은 피곤한 야간 알바 때 갑자기 졸면서 꿈을 꾸고 놀라서 깨는 일도 잦았다.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네. 저번에 컴플레인 들어와서 점장이 지랄했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세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나 해서 눈앞의 테이블에 놓인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었다.
“하아. 헌터들은 요즘 떼돈 버는 구나.”
홀로그램이 살짝 떠올라 최근 가장 뜨거운 뉴스들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목숨 내놓고 싸우는 거니 위험하겠지? 이 지역에는 게이트 따위가 안 뜨니 다행이네.”
세하는 동영상에서 헌터들이 종횡무진 활약하며 몬스터들을 썰어버리는 광경을 보고 푸념했다.
“멋있다. 하지만 나하고는 먼 이야기지. 암 그렇고 말고.”
세하는 오늘도 손님이 없을 때는 요즘 이슈인 헌터들의 뉴스나 보고 부러워하다가 대충 시간이나 때울 걸로 예상했다.
따분하고 별 거 없는 소시민의 삶, 최근 툭하면 졸고 그 사이에 꾸는 꿈이 신경 쓰였지만 세하는 이내 웃어넘겼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사... 살려줘!”
갑자기 편의점 문을 거칠게 열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손님인가 싶었지만 머리가 깨져서 피를 줄줄 흘리고 옷차림이 엉망인 걸 보고 세하는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에요?”
“문 닫아! 닫으라고!”
남자는 정신 나간 것처럼 외쳤다. 거기에 세하가 어리둥절해 하는 데 유리 문 밖으로 정신없이 뛰어가는 사람들의 광경이 보였다.
하나 같이 정신 나가고 엉망진창이 된 꼴들이 가관이었다. 무슨 재해가 닥쳐서 도망치는 모습들이었는데 세하는 혹시 몰라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파주 A11 구역에 게이트 출현? 여기잖아?”
안 그래도 긴급 뉴스로 현 지역에 게이트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세하가 급히 유리문에 잠금 장치를 걸었다.
콰콰콰쾅!
갑자기 눈앞에 새하얀 빛이 터지며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 거기에 세하는 그대로 나뒹굴었고 귀에는 윙윙 거리는 이명이 가득 차고 말았다.
‘으윽... 이게 무슨 일이야........’
평생 게이트니 몬스터니 하는 건 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온몸으로 밀어닥치는 충격과 소음들은 세하를 그 위험의 한가운데로 던져졌음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사... 살려줘.......”
급하게 편의점 내로 들어왔던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으... 나도 죽을 판인데........’
폭발 때문인지 눈이 쉽게 떠지지 않았다. 그래도 세하가 간신히 눈을 뜨자 엉망진창이 된 편의점의 풍경이 보였다. 가판대며 테이블이며 모든 것이 박살나고 넘어졌고 유리로 된 문이나 창은 산산조각 나있는 등 무슨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처참한 모습이라서 세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크르르
그때 굶주린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세하의 귓가에 생생히 와 닿고 있었다.
‘몬스터야? 미치겠네........’
세하는 다행히 어디에 깔리거나 몸이 상하진 않았다. 부셔진 가판대나 기타 설비 등이 그의 앞을 고묘하게 가릴 정도라서 조금이나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사... 살려줘... 으아아악!”
그때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던 남성의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
‘비... 빌어먹을.......’
세하는 그 순간 머릿속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운도 더럽게 없구나. 살 던 데에서 게이트가 열렸어? 몬스터가 나왔어? 지금 눈앞에서 사람이 죽은 거야? 으으.......’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눈앞이 엄폐물로 가려져 있어서 안 보이지만 방금 사람을 죽인 몬스터가 세하를 발견하는 건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정신 차리십시오. 지오 그라함 소령님.
그 때 차가운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꿈속에서 들었던 이름에 세하는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여성의 음성은 세하가 놀람에도 차분하게 이어졌다.
-마스터의 신변이 극히 위험한 걸로 감지되어 지금부터 각성 프로토콜을 개시합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세하는 갑자기 자신의 머릿속에 들리는 음성에 놀라서 오히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지금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설명 드리죠. 제 이름은 루이제. 마스터께서 탑승하셨던 Psychic. Link. Battle. Gear 약칭 PLB 기어, 엘렉티오의 AI입니다.
이어지는 여성의 설명에 세하는 뭔가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루이제? 엘렉티오?’
세하는 자신이 최근에 꿨던 꿈속에서 그 이름과 명칭들을 나왔음을 기억했다.
‘그게 꿈이 아니였어?’
-지금 상황이 위급하기에 자세한 설명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눈앞에 지극히 적대적인 대상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루이제의 음성이 재차 들리는 가운데 갑자기 세하의 눈앞에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떠올랐다. 붉게 점멸하며 움직이는 것이 무척 위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이건 뭐야?’
-저는 마스터의 의식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서 망막에 시각적 정보를 직접 투영할 수 있습니다.
여성. 루이제의 설명이 계속되는 가운데 갑자기 세하의 눈앞에 있는 엄폐물이 금이 가면서 부셔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어........”
그 광경에 세하가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루이제의 지시가 이어졌다.
-긴급 각성에 들어갔기에 마스터의 직접적인 행동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AI인 제가 임의적으로 방어행동을 개시하겠습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갑자기 세하의 몸 주변에 뭔가가 생겨나며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처음에는 벽처럼 보이더니 세하의 몸을 빈틈없이 둘러쌌다. 검은 색의 금속질의 재질이 완전히 세하의 몸에 밀착해 붙으면서 하나의 슈트를 만들어냈다.
세하의 머리 또한 완전히 감싸였으며 브이자형의 날카로운 느낌의 바이저가 눈 주변에 자리했다.
-Psychic. Link. Battle. Suit. 약칭 PLB 슈트중 초기형 모델인 블랙어설트 마크1입니다. 지금 마스터의 사이킥 용량이 초기 단계인지라 현재로서는 이 정도 무장이 최선입니다.
콰쾅!
그 사이 세하의 앞을 막던 엄폐물이 완전히 부셔졌다. 그리고 눈앞에서 커다란 늑대가 붉은 안광을 빛내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세... 세상에......’
본래 회색의 털빛이었을 늑대는 지금 입 주변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찢어져라 벌려진 입안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촘촘히 박혀있었으며 그 사이 사이에 찢겨진 살점과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극히 적대적인 대상이기에 반격을 개시합니다. 오른팔에 부착된 사이킥 펄스 라이플을 발사합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세하가 눈앞의 몬스터에 놀라는 사이에 루이제의 지시가 들려왔고 갑자기 세하의 오른팔이 번쩍 들려졌다.
‘어어?’
세하가 거기에 놀랐지만 행동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오른팔 팔꿈치 위쪽이 변형을 일으키더니 마치 소형 대포처럼 형태가 재구성되었다.
크아아아!
그 모습에 위협을 느꼈는지 커다란 늑대 형상의 몬스터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세하의 오른팔이 먼저 빛을 뿜었다.
파앙!
키에에엑!
굵직한 빛의 구체가 발사되어 순식간에 몬스터에게 적중하더니 그대로 뒤로 날려버렸다. 거기에 세하는 미약한 진동 밖에 안 느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상이 침묵할 때까지 연사모드에 들어갑니다.
루이제의 음성이 재차 들리더니 세하의 오른팔이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처음보다는 출력이 줄어들었지만 마치 총탄을 퍼붓는 것처럼 작은 광탄들이 뿜어지며 쓰러진 몬스터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광탄들에 적중당해 희미해진 울음소리를 흘리며 몬스터가 고개를 푹 떨궜다. 거기에 세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마스터.
그런 세하를 일깨우듯이 루이제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크아아아!
갑자기 세하의 정면에 피투성이의 인간이 달려들었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던 남성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인간이기 보다는 회색의 털이 돋아낸 늑대와도 같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