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현대인-168화 (168/169)

168화

"피곤하네."

내 말에 샤를로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당신이 피곤하다는 말도 할 줄 알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피곤하지."

"그렇구나. 나는 당신은 피곤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정말 열심히 해 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 영주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그저 영지만 관리하고 살아도 됐고, 바깥의 땅을 개발하고 뉴렌달을 만들었을 때 여유를 부렸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덴프린스 공작을 축출하고 신흥 공작으로서 베르겐 왕국의 권력자로 살아도 충분했고, 아렌달이 독립한 이후에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르겐 왕국에서 벗어나서 아렌달을 독립시켰고, 그것을 넘어 동대륙의 이권을 하나하나 차지해 가며, 결국에는 동대륙을 넘어 이세계에서 누구나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만큼이나 해 왔으니까 피곤하다는 말도 이해가 되네요."

"대륙에 명성이 자자하신 샤를로트님에게 인정을 받다니… 열심히 해 온 보람이 있네."

"맞아요. 나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라니 참 잘했어요. 칭찬해 줄게요."

뻔뻔하게 말하는 샤를로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에 샤를로트도 나를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데우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뭐든지."

"정말 우리 아이들에게 아렌달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샤를로트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기에 살짝 놀랐다.

"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우리 아이들이 꼭 아렌달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 온 아렌달을 다른 이들에게 물려준다면 당신이 아쉽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는 거니까요."

"아쉽다라… 물론 아쉽기는 하지.

근데 아리아에게도 말했지만, 아이들이 싫다면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

이건 진심이다. 아이들이 바라지 않는 것을 시키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개성이 강한 아이들이 아렌달을 똑바로 운영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샤를로트를 닮아서 그런지 자신의 생각이 똑 부러진 아이들이었으니까. 싫어하는 일은 절대로 열심히 하지 않을 아이들이기도 했다.

"당신도 아쉽기는 한가 보네요."

"음- 솔직히 말해서 아이들이 아렌달을 물려받지 않을 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내 말에 샤를로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다행이라고요?"

"그래. 다행이지. 지도자의 자리가 얼마나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자리인데.

아이들에게 그 무거운 책임을 지우지 않아도 된다니 다행이지."

"……"

그 말에 샤를로트는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설마 그래서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당신이 계속하겠다고 한 건 아니죠?

그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지우지 않기 위해서 말이에요."

"나를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는 거라면 고맙지만…"

"휴- 그건 아닌가 보네요."

내 대답에 오히려 안심하는 샤를로트였다.

"그럼 당신은 왜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거예요?"

"그거야…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본다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중에 해 줄게."

"네? 이러기예요?

정말 말 안 해 줄 거예요?"

"모두가 책임을 나누기 위해서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겠어?"

"……"

고개를 갸웃하는 샤를로트에 나는 씨익 웃어 주고 말았다.

어느새 동대륙도 중앙대륙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정리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수년 동안 대륙이 전쟁으로 앓던 것을 생각해 조면 꽤 조용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아렌달 상단도 다시 대륙을 오가며 뉴렌달 브랜드의 상품들을 전 대륙에 유통하기 시작했고, 아렌달 건설이 주도하는 건설 사업도 힘차게 일어났다.

전후 복구 사업으로 자금이 필요한 나라에서는 아렌달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아렌달을 찾아오거나 아렌달 거래소에 자기네 권리를 내놓으며 자금을 끌어들였다.

"베르겐 왕국에서도 대규모 사업을 준비 중인가 보네."

"구 아스타나 지역에 대한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베르겐에서 차지한 영토 대부분이 낙후된 지역이어서 그런지 손이 많이 가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스톨, 엔나 그리고 기르만까지 다 베르겐 왕국 사업에 뛰어드는 건가?

음- 그럼 아렌달의 이름으로도 사업에 참여해야 하는 것 아니야?"

"스톨, 엔나 그리고 기르만 모두 아렌달의 이름을 달고 사업에 참여하는 겁니다."

과거 영주 가문이었던 이들은 이제 아렌달을 넘어 다른 나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국제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영주 가문이었다는 명성과 함께 왕국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의 자본도 갖추고 있으니 그들의 성장은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영주 가문이었던 이들 말고도 초창기 아렌달의 확장기 시절부터 함께하던 귀족 가문들도 웬만한 왕국에서는 떵떵거릴 수 있을 정도의 위세는 갖추고 있었다.

한때 귀족 가문들이 권력을 경쟁하듯이 이제는 자본력과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경쟁하는 모습은 현대 지구의 기업들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 같았다.

'음- 닮아 가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대기업들의 각축전을 보는 것 같네.'

도시를 시찰하고 있는 내 눈에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라이언 스톨에 마르코 엔나 그리고 펠릭스 왕자까지…

여기서 무슨 작당 모의를 하고 있던 거야?"

"허업! 데우스님!"

나를 발견한 펠릭스가 허둥대는 모습에 라이언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데우스님.

베르겐 왕국에서 진행하는 신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뿐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데우스님. 저희 베르겐 왕국에서 이번에 개발 사업으로…"

말까지 더듬는 펠릭스 왕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당황하면 장난친 내가 미안해지잖아?"

"자, 장난이셨습니까? 휴우-"

한숨을 내쉬는 펠릭스에 나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 주었다.

"진짜 일을 꾸미는 것이라면 뉴렌달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모였겠지."

"데우스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입니다."

"서, 설마 진짜로…"

"라, 라이언님! 그게 무슨! 장난은 그만하십시오."

"하하하. 펠릭스 왕자님께서는 조금 더 담을 키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라이언의 농담에 당황하는 펠릭스를 보며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놀림감이 되었다는 사실에 펠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위기가 좋은 걸 보니 베르겐 왕국의 사업이 잘되어 가는 것 같네?"

"여러 가문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셔서 지금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 물론 아렌달의 도움에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라이언이나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더라도 잘되어 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베르겐 왕국의 사정이 괜찮아 보여서 나도 기분이 좋군.

앞으로도 아렌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아."

"감사합니다. 데우스님."

내 말에 펠릭스는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 테니 작당 모의는 적당히 하도록."

돌아서는 내게 라이언이 말했다.

"데우스님. 아버지께서 지금 아렌달 저택에 계실 겁니다."

"브레튼의 골프 대회에 참석하시는 것 아니었나?"

"체스터 대의원의 건강이 안 좋다고 하셔서 취소가 된 듯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일찍 돌아가야겠네."

"하하- 그렇게 해 주신다면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늦은 밤 거나하게 취한 장인이 내게 말했다.

"아렌달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좋은 곳이네."

"그렇습니까?"

"그래. 왜 그동안 아렌달 같은 곳이 없었던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모든 게 좋다네."

장인의 말에 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술잔을 들었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드네."

"무엇이 아쉽습니까?"

"아렌달의 미래를 내가 보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이네.

얼마나 더 재밌고,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질지 궁금하지만, 나는 너무 늙지 않았나?"

장인의 말에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보다도 아렌달의 미래에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장인일지도 몰랐다.

"지금도 충분히 즐기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지 않나? 아렌달의 미래를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아쉽다네. 허허허-"

그렇게 웃던 장인이 술잔을 비우고 내게 말했다.

"그래서 그러는데 직접 보지는 못하더라도 듣고는 싶네."

"아렌달의 미래 말입니까?"

"그래. 아렌달의 미래를 알고 싶네. 지금의 아렌달을 만든 자네라면 앞으로의 아렌달의 모습도 그리고 있겠지?"

"……"

"내가 보지 못하게 될 아렌달을 들려줄 수 있겠나?"

장인의 말에 나는 도시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렌달은 지금보다 더 현대적인 모습이 될 겁니다."

"지금보다 더 현대적이라… 그건 모순이 있는 말이 아닌가?"

"모순이라… 하하- 그렇군요."

내 말에 장인이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아렌달의 미래는 제가 아닌 아렌달인들이 결정하게 될 겁니다."

"아렌달인이 결정한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렌달의 후계자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아렌달인들이 될 거라는 말입니다."

"아렌달인 모두가 후계자라니… 이해하기가 어렵군."

"그렇습니까?"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말치고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장인이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렌달인 모두가 아렌달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죠.

모두의 의견을 모아서 아렌달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그게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내 확언에 장인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자네가 왕이 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군."

장인의 말에 나도 미소로 답했다.

"모든 아렌달인이 책임을 가지도록 만들 겁니다.

한 명의 절대자가 실수하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렵게 이룬 모든 것들을 한순간의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건 너무 아까운 일이지."

"아렌달인 스스로 지도자를 세우고, 모두가 그 책임을 나눈다면 아무리 실수하더라도 고칠 수 있을 겁니다."

"자네 스스로 절대자의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다니.

허허허- 재밌군. 정말 재밌어."

"절대자는 데우스 아렌달이라는 인물이 아닌 아렌달이라는 국가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아렌달인 하나하나가 아렌달이 되어 준다면 아렌달은 영원불멸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장인은 술잔을 채우고 단숨에 비워 냈다.

"그러려면 백성들을 더 열심히 가르쳐야겠군.

아렌달인 모두가 아렌달이 된다라… 그럼 나 역시 아렌달이 되는 것인가?"

"조금 전에 아렌달의 미래를 보지 못할 것 같다고 걱정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자네의 말을 들으니 그 미래를 꼭 내 눈으로 보고 싶어졌네.

그래서 어떻게 해서는 버텨 볼 생각이라네."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술잔을 채우는 장인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시대를 보려면 술은 조금 줄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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