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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162화 (162/169)

162화

대륙회의에 참석했던 왕국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일 것이다.

특히 동대륙과의 교류로 재미를 보고 있던 동부 왕국들은 동대륙과의 교류가 끊어지면서 일어난 손해에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대륙회의를 주도했던 강대국들의 이야기에 홀려서 괜한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도 지금 같은 손해도 없었을 것이다. 동대륙에서 흘러들어 오는 높은 품질의 상품들을 중개하면서 왕국의 상황이 좋아졌을 것을 생각하면, 괜한 욕심을 부린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렌달에 붙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칫하다가는 동대륙으로 병사들을 보내면서 잃은 인구와 자원의 책임을 왕국이 고스란히 뒤집어 쓸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메이더스 왕국이나 에나플 왕국이 아직까지 굽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아렌달이라도 다른 대륙에 있는 나라였고, 메이더스 왕국이나 에나플 왕국은 같은 대륙에 있는 나라였으니까.

"동대륙과 교류로 얻어 오던 이득을 포기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결국 멀리 있는 아렌달보다 가까이 있는 주변 왕국들이 더 신경 쓰이나 보군."

"아렌달의 상품이 중앙대륙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이득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남긴 것도 없었을 겁니다.

아스타나 왕국의 그람 왕국 침공 이후부터 아렌달 문화가 전파되고 나서 재미를 본 것이니까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겨우 몇 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이니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가?"

"그리고 메이더스 왕국이나 에나플 왕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시 동대륙과 교류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대로 조용히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왕국들도 많을 겁니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왕국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저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선택권은 메이더스 왕국이나 에나플 왕국이 아닌 아렌달이 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뉴렌달 브랜드의 생산 시설이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시설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아렌달 조선소에서도 더 이상 동력선을 건조하지 않고, 새로운 생산 시설로 모습을 바꿨다.

본격적으로 중앙대륙에 발을 내딛기 위한 준비를, 전쟁을 끝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자하. 생산 속도는 어때?"

"지금 조선공과 세공사 그리고 마법사들까지 모두 매달려 있습니다. 4, 5일에 하나씩 만들어지고 있다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러면 며칠 내로 목표한 숫자를 채우겠군."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아스타나에 있는 병력들도 함께 움직일 수 있게 시간에 맞춰서 동력선을 보내야겠네."

"그럼 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가로지르는 겁니까? 상상만 해도 굉장한 그림이네요."

자하의 말에 나는 씨익 웃었다.

"상상으로 끝낼 필요는 없지."

"네?"

"중앙대륙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정도는 할 수 있잖아?"

* * *

"아렌달의 동력선이 뉴렌달 항구를 떠났다고 합니다."

"아렌달은 전쟁을 멈추지 않을 생각인가?"

"그렇지 않다면 동력선을 움직이지는 않았겠지요."

맥그리거 공작의 대답에 루이 국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이번이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아렌달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폭격 마법과 자동차로 인한 빠른 기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왕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폭격 마법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석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렌달에서도 서쪽으로 진격할수록 폭격 마법의 횟수가 떨어졌습니다.

또한, 바다 위의 좌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바다 위에서는 폭격 마법의 공격은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군. 그리고 바다 위인 만큼 자동차로 인한 빠른 기동력도 없겠지."

"그렇습니다. 물론 바람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동력선은 거슬리겠지만, 동력선만으로는 봉쇄된 바닷길을 뚫을 수는 없을 겁니다."

맥그리거 공작의 설명에 루이 국왕이 오랜만에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렌달의 마법 무기는 우리가 가진 것보다 뛰어나지 않은가? 배 위에서도 마법 무기는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만, 바다에서 막지 못한다면 그 이후에는 더 어렵습니다.

아무리 큰 피해를 보더라도 아렌달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무리하게 중앙대륙으로 넘어오려는 아렌달 군을 바다에 수장시킬 수만 있다면…"

"후우- 어쩔 수 없이 마지막 기회라는 말이군…"

아렌달의 동력선을 가라앉히기 위해 모인 연합군의 선단이 바다를 가득 메웠다.

그들도 아렌달 군이 중앙대륙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귀찮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함께 가라앉는 한이 있더라도 아렌달의 동력선을 물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 그림자를 보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배가…"

바다 위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들의 뒤로 아렌달의 동력선들이 다가오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자신들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연합군의 병사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배가 왜 하늘에 떠 있어?!"

그림자를 그리며 지나가는 비행선을 바라보고 있자, 곧 비행선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마법 무기가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빛이었다.

"어?! 저거 마법…"

"피, 피해!!!"

-쾅쾅쾅

맥그리거 공작의 보고에 루이 국왕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늘을 나는 배가 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저 역시 믿기지 않지만, 아렌달에서 하늘을 나는 배로 바닷길을 막고 있던 함대를 파괴했습니다."

수백 척의 배와 수만의 병사들이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채 바다에 수장되었다.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에 그 모습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비행선은 어디 있나?"

* * *

하늘에서 그람 왕국의 왕도를 내려다 보고 있자니 낮은 건물들과 조잡한 거리, 부족한 시설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뉴렌달과 비교하면 도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람 왕국의 왕도를 잠시 구경하자 비행선의 존재를 눈치챈 백성들이 하나둘 왕도의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하늘에 뭐가 있는데?"

"내가 잘못 본 건가? 배가 왜 바다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거야?"

물론 비행선을 발견한 것은 백성들뿐만이 아니었다.

왕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무기를 떨어트린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마법사들은 비행선을 관찰하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왕족들과 귀족들 역시 하나둘 왕궁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 보기 시작했다.

"저, 저게 무엇인가?"

"구, 국왕 폐하. 도, 도망치셔야 합니다."

"어디로 도망친다는 말인가?"

"그, 그것이…"

혼란에 빠져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천천히 왕도의 하늘을 돌며 그람 왕국의 백성들에게 인사를 해 준 비행선은 방향을 바꿔 날아가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비행 선단에 그람 국왕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라는 말이냐."

그람 왕국의 왕도를 떠난 비행 선단은 주변 왕국의 주요 도시들과 왕도를 차례차례 들르며 순회공연을 해 주었다.

그저 도시의 하늘을 한 바퀴씩 돌아 주고 돌아올 뿐 바다 위에서와 같은 공격은 하지 않았다. 비행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굳이 도시에 피해를 입혀 권력자들이 아닌 그 곳에 사는 백성들까지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소모되는 마나석도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순회공연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람 왕국의 오마 백작입니다."

"오마 백작? 그람 왕국의 국왕은 어디 가고 오마 백작이 왔나?"

"구, 국왕 폐하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부득이하게 제가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재빨리 머리를 숙이는 오마 백작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몸이 안 좋다면 어쩔 수 없지."

"휴우-"

한숨을 내쉬는 오마 백작의 모습에 나는 빙긋 웃었다.

"그런데 오마 백작이라면… 대륙회의에 참석했던 인물이군."

"그, 그렇습니다."

"그 대륙회의에 나도 관심이 조금 있었는데…"

"데, 데우스님! 저희 그람 왕국은 절대로 아렌달과 마찰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전부 메이더스 왕국과 에나플 왕국에서 주도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대륙회의에 참석한 것도 어쩔 수 없이… 약소국으로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채운 것뿐입니다."

변명하는 오마 백작에 나는 고개를 빙긋 웃어 주었다.

내 반응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오마 백작은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동안 그람 왕국이 아렌달에 받아 온 것이 얼마나 많은데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스타나 왕국의 침략 이후 아렌달의 기술자과 주둔군 덕분에 그람 왕국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국왕 폐하를 비롯해 그람 왕국의 귀족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왕국의 원수인 아스타나 왕국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키려는 그들의 계획에 저희 왕국은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우리 주둔군이 공격받고, 결국 중앙대륙을 떠나도록 내버려 둔 것도 반대하는 입장에서 그런 것인가?"

"허업! 그, 그건…"

당황하는 오마 백작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람 왕국의 메세지는 뭐지?"

내 물음에 오마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람 왕국은 아렌달에 대항하지 않겠습니다!

아렌달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전의 협약을 갱신해서 다시 맺는 게 좋겠지?"

"혀, 협약 말입니까?"

"말로만 끝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대화의 내용은 문서화 해놓는 게 좋지."

"아- 그, 그렇습니다. 말로만 끝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하-"

오마 백작의 허탈한 웃음소리에 나 역시 미소로 답해 주었다.

"앞으로도 그람 왕국과는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겠군. 하하-"

오마 백작이 돌아간 후 순회공연을 받은 왕국들도 하나둘 나를 방문했다.

하나같이 약소국인 자신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이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람 왕국과 똑같이 이야기는 들어 주었다. 물론 그람 왕국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만 들어준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일으킨 책임에 대한 배상금도 줘야 하고, 향후 수년간은 군사적인 움직임도 제한됐으며, 아렌달의 행사에 무조건 참여해야 할 뿐 아니라, 아렌달의 중앙대륙 진출에 적극적으로 응해야 하며, 개발 사업 및 공사에도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대충 들어도 나라면 절대로 안 할 협약이다.

그럼에도 방문했던 이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미소를 그리며 돌아갔다.

"그럼 방문하지 않은 왕국들도 순회공연을 다녀 줘야 하나?

알아서 찾아와 줬으면 하는데…"

사실 먼저 숙일 왕국들은 이미 다 찾아온 상황이었기에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은, 기울어진 싸움이었다.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한 저항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빨리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메이더스 왕국과 에나플 왕국의 메세지는 내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왕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라…

빅터 국왕과 같은 길을 걷겠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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