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빅터 국왕이 붙잡혀 아렌달로 끌려오자 아스타나 왕국이 순식간에 쪼개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던 아스타나의 영주들이 독립하며 힘을 잃은 주변 영지를 흡수하기 시작했고, 기회를 보고 있던 주변의 왕국들도 주인 잃은 아스타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군사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나르비크 왕국은 아스타나 왕국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확신이라도 했다는 듯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다.
"아스타나 왕국이 이대로 쪼개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계실 겁니까?
아무리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원래대로라면 아렌달의 것이 아닙니까?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렌달이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아스타나 왕국을 이대로 쪼개지게 놔두는 것이 아깝습니다."
"물론 아깝기는 하지. 그런데 아스타나 왕국을 아렌달가 삼킨다고 해도 제대로 운영이나 되겠어? 그 넓은 땅을 관리할 만큼 관리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 넓은 지역이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하면 계속해서 폭동이 일어날 텐데, 그걸 하나하나 관리하느니 그 지역에 있던 자원이나 재산만 취하고 빠져나오는 게 낫지 않나?
아직 중앙대륙과 결판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힘을 나누기에는 무리가 있잖아."
"흠- 지금 당장 힘을 나누기에는 중앙대륙이 신경 쓰이기는 하네요."
"그리고 아스타나 왕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 것도 아니니까 그 땅을 차지한다고 해도 아렌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일단 마나석 광산이나 철광, 금광 같은 중요 자원들에 대한 권리는 하나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독립한 영주들이나 다른 왕국에서 그 지역을 점령하고 소유권을 주장한다고 해도 먼저 깃발을 꽂고 개발을 시작한다면 아렌달의 권리 주장에 대해 쉽게 불만을 표하지 못할 것이다.
아렌달과 한판 붙고 싶은 마음이 있는 지도자가 나타난다면 모를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는 빅터 국왕과 같은 길을 걷도록 만들어 주면 그만인 것이다.
"아스타나 왕국이 정리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야.
중앙대륙과 결판이 나기 전에 정리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아스타나 왕국의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았다.
그리고 아스타나 왕국에서 먹을 게 남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동대륙의 왕국들이 끼어들기 어려운 중앙대륙에서 더 크게 먹으면 되는 일이니까.
'나는 중앙대륙을 그냥 놔둘 생각은 없으니까.'
빅터 국왕의 재판이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길거리의 부랑자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는 빅터 국왕의 뒤로 포로가 된 아스타나 왕국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들이 정말 귀족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저 모습을 보고 있는 백성들은 어떨까?
분명 왕족이나 귀족이라는 신분이 사실은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빅터 국왕 옆으로 마법 아이템으로 구속된 소드마스터들의 모습 역시 기사 계급의 몰락이라는 시대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전쟁을 일으켜 동대륙에 혼란을 가져오고, 수많은 목숨을 죽게 만든 죄를 물어 죄인 빅터에게 사형을 내린다."
"실베르 백작! 케이튼 백작! 왕명이다! 당장 저놈의 목을 내 앞에 가지고 와라!"
고래고래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에 두 소드마스터는 차라리 네퍼 백작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명령에 대답하지 않는 기사들에 빅터 국왕이 이를 갈았지만, 그런다고 그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빅터 국왕. 아니- 빅터. 당신은 역사에 길이길이 조롱을 받게 될 거야.
한때는 동대륙의 패자였던 아스타나 왕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니까.
샤를로트가 당신을 위해서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거든."
"뭐, 뭐라고?!"
"작품의 제목은 욕심쟁이 빅터라고 정했어. 국왕이라는 자가 헛된 욕심을 품으면 어떻게 된다는 교훈을 보여 줄 작품이지. 안타깝게도 당신은 그 작품을 읽지는 못하겠군."
"이… 이 놈! 나를… 조롱거리로 만들 생각이구나!"
"아스타나 왕국은 아렌달과 상생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당신이 욕심만 부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욕심을 부렸고, 이야기로 남아 조롱거리가 되겠지."
그 말에 빅터 국왕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건 당신 하나뿐이 아니니까.
아리아가 공격받은 것 때문에 샤를로트가 화가 많이 났거든. 샤를로트가 가진 모든 역량을 들여서 아렌달 가문을 건드린 이들을 이야기로 남겨 주겠다더군.
대문호께서 친히 당신의 이야기를 써 주겠다는데… 어때?"
귀족이라면 샤를로트의 존재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샤를로트의 작품이 귀족 사회에서 퍼져 나가는 속도를 안다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조롱을 받게 될 것인지 예상할 수 있을 터.
그냥 목숨을 잃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이야기로 남는다니…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귀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형벌이었다.
* * *
샤를로트가 쓴 빅터 국왕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아렌달을 시작으로 동대륙의 귀족 사회를 거쳐 남대륙과 중앙대륙까지 빠르게 전달된 이야기로 인해 빅터 국왕은 한순간에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아스타나 왕국의 멸망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 되었다.
아스타나 왕국의 멸망이 정당한 일이 되면서 중앙대륙의 왕국들도 편치 않은 상황이 되었다.
그들 역시 아스타나 왕국과 마찬가지로 아렌달을 향해 무기를 들었으니까.
특히 아스타나 왕국과 함께 주범으로 이름을 올린 메이더스 왕국과 에나플 왕국의 귀족들은 국왕의 눈치를 살피느라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내가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데 동대륙에 있는 병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렌달로 진격을 하고 싶어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카르툰 왕국에서도 바닷길을 끊은 것이 노선을 바꿔 아렌달에 붙은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카르툰 놈! 그 동안 중앙대륙과의 관계로 이득은 다 챙겨 놓고 이렇게 뒤통수를 쳐!"
카르툰 왕국에서 노선을 바꿔 중앙대륙과 연결된 항구도시를 모두 봉쇄하자 왕국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멸망의 길을 걷게 된 아스타나 왕국에 아직 왕국의 병사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과 함께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물자들이 모두 동대륙에 버려지게 되었으니, 그 손해를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메이더스 왕국이나 에나플 왕국 같은 대국이라고 해도 10만이 넘는 병사와 물자를 전쟁에 투입했으니 타격이 없을 수가 없었다.
"물자를 포기하더라도 동대륙에 고립된 병력이라도 다시 데리고 와야 합니다."
"고립된 병력이 얼마라고?"
"10만입니다. 국왕 폐하."
"……"
웬만한 대영지 인구에 버금갈 정도의 숫자였다.
"맥그리거 공작. 그들을 데리고 돌아올 수는 있는 건가?"
"……"
침묵하는 맥그리거 공작에 루이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귀족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돌아올 수 없는 병사들을 가지고 이래저래 떠드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국왕 폐하. 그래도 메이더스의 백성들입니다."
"그래 메이더스 왕국의 백성들이지. 그렇다면 어차피 돌아오지도 못할 것, 왕국을 위해 죽어야지."
"……"
"아렌달로 진격하라고 하라. 왕국의 군사들이라면 아렌달에 발자국이라도 찍어 봐야 하지 않겠나?"
루이 국왕의 명령에 대신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동대륙으로 원정을 떠난 병력 중 상당수는 자신들의 영지에서 차출한 병사들이었으니, 그들을 잃는 것은 영지의 노동력과 자원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다른 왕국에도 메세지를 전해야겠군.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다음을 생각하라고 말이야."
"국왕 폐하. 다음이라고 하시면…"
"시간을 끌어야지. 지금의 아렌달은 어찌할 수 없으니 아렌달에 대항할 수 있는 마법 기술을 손에 넣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마법사가 아렌달에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 아렌달의 마법사가 만든 것을 왕국의 마법사가 만들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
이미 마법 무기나 여러 가지 마법 아이템도 모방해 만들었으니, 시간만 있다면 아렌달의 기술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지 않겠나?"
루이 국왕의 생각에 맥그리거 공작이 뭔가 걸리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렌달에서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이미 아렌달은 루안 요새를 날려 버린 전력이 있지 않습니까?"
"요새나 도시 몇 개쯤은 그냥 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는가!"
루이 국왕의 고함에 맥그리거 공작이 입을 닫았다.
평소라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을 루이 국왕이었기에 그가 얼마나 이 상황에 초조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아렌달이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바닷길을 봉쇄하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 그리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다들 그만 물러나게."
"알겠습니다. 폐하."
* * *
아스타나 왕국이 쪼개지는 모습을 보며 중앙대륙의 왕국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아렌달 군이 남은 병사들을 정리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격을 멈추지 않자 그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다.
동대륙에 남아 있던 메이더스 왕국의 병사들과 에나플 왕국의 병사들은 왕국의 명령을 받아 전투를 지속했지만, 아렌달 군의 공격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결국, 100만에 달하던 연합군은 10만이 안 되는 아렌달 군에 패배하며, 아렌달 군의 위엄을 보여 주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다.
"아렌달이 이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이제 명실상부 아렌달이야 말로 이 세계의 패자로군."
"하하- 나는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아렌달이 어떤 곳인데?
온갖 신기한 아이템들로 가득한 곳이잖아. 마법 무기도 아렌달에서 처음 만들어 냈고 말이야.
그동안 다른 왕국들 모르게 숨겨 온 힘이 있었던 것이지."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편집된 영상이었기에 아렌달 군의 진짜 전력을 보여 준 것은 아니었지만, 연합군이 아렌달의 영토에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렌달의 군사력을 보여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들이 아직까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스타나 왕국이 멸망의 길을 걷고, 바다를 건넌 중앙대륙의 연합군이 전부 흩어졌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앙대륙에서 바닷길을 끊어 아렌달의 진출을 막으려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아렌달에 대항하기 위한 힘을 기를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함이라는 것 역시 말이다.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언젠가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것이다.
'그런 뻔한 미래를 기다리는 건 멍청한 일이지.'
바다를 막는다고 대륙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오산이다.
웬만한 왕국들은 동력선을 막을 능력도 되지 않을 것이고, 항구를 봉쇄한다고 해서 병사들을 상륙시키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바닷길이 아니더라도 중앙대륙으로 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