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브란 공작이 열변을 토하면 토할수록 사람들의 고개도 점점 크게 끄덕여졌다.
"아렌달의 영향력을 줄이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귀족이라는 신분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귀족이 없어지면 그다음에는 왕국마저 사라지게 될 수도 모릅니다."
"그건 너무 억측이 아니오?"
"브레튼이라는 결과물이 있지 않습니까? 브레튼이 베르겐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이유가 아렌달의 영향을 받아서라는 것을 모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 식으로 왕국이 계속해서 쪼개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침묵하는 사람들에 맥그리거 공작이 브란 공작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렌달에 대해서는 중앙대륙에 있는 우리보다 아스타나 왕국에서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런 아스타나 왕국에서 중앙대륙을 위해 이렇게 나서 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소.
아렌달을 하루라도 빨리 제압하지 않는다면 이세계는 점점 더 혼란으로 치닫게 될 것이오. 우리 메이더스 왕국은 혼란을 종식시키고 다시 이 세계의 안정을 찾아오기 위해 노력할 것이오."
* * *
"대륙회의의 내용이 대충 어떤 흐름으로 흘러갔는지는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네."
"명백하게 아렌달을 견제하기 위한 회의였습니다.
이미 아렌달 상단이나 아렌달에 호의적이었던 상단들뿐 아니라 브레튼이나 베르겐 왕국, 그리고 남대륙의 타자트 왕국 등 아렌달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왕국들이 중앙대륙으로부터 배척받고 있습니다."
아렌달과 관련 있는 것들을 밀어내기 시작한 왕국들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한 마음에는 대륙회의를 주도했던 메이더스 왕국에 에나플 왕국처럼 대륙 간 폭격 마법이라도 한발 갈겨 버리고 싶었지만, 견제를 조금 당했다고 그러면 아렌달의 평판만 나빠질 것이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효율도 좋지 않아서 대륙 간 폭격 마법을 한 번 더 쓰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아.'
만약 마나석의 소모가 그렇게 크지만 않았더라면 한 방쯤은 갈겨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굳이 그런 소모를 하기에 아깝다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나오는 건 나를 호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렌달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대륙회의 이후로 아렌달 상단의 활동이 조금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귀족들에게 프리미엄 상품으로 꼽히는 뉴렌달 브랜드는 꾸준하게 팔려 나갔기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아렌달 상단보다는 아렌달과 인연이 깊은 중소 상단의 어려움이 컸다는 것에 상인들이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책임이 아렌달에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사회에 혼란을 주거나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울드 상단을 비롯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단들에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는 메세지와 함께 약간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은 얼마나 갈 것 같아?"
"그람 왕국의 주둔군과 외부의 정보를 최대한 모으고 있는데 아무래도 조금은 길어지지 않을까요?
메이더스 왕국과 에나플 왕국에서 강경하게 쪼이고 있는 모습이라, 중앙대륙의 왕국들로서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에라이… 그냥 메이더스 왕도와 에나플 왕도에 한방씩 갈겨 버릴 걸 그랬나?"
"대륙회의가 막 열렸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 와서 공격하는 것은 좋은 그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리오의 말대로 괜히 타이밍을 재다가 진짜 호구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일단은 어쩔 수 없지.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안 되겠으면 중앙대륙의 왕국들과 담판을 지어야 할 수밖에 없겠네."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 눈에 아리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리아가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종종 이렇게 돌아가는 시간이 맞을 때가 있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시네요. 엄마가 좋아하시겠어요."
"내가 일찍 돌아오면 엄마가 좋아하니?"
"제가 보기에는요. 아빠가 늦을 때 엄마가 종종 창밖으로 저택 입구를 바라보시거든요."
빙긋 웃으며 말하는 아리아에 나 역시 같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맞다. 아빠 다음에 저랑 같이 마탑에 가 주세요."
"같이?"
"네. 자하님이 아빠와 함께 오는 것 아니라면 허락해 줄 수 없다고 하셨거든요."
"무슨 허락? 마탑에 들어가는 거라면 아무도 너를 막지 않을 텐데?"
이미 혼자서도 몇 번이나 마탑에 가서 뉴렌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돌아온 아리아였다. 그리고 굳이 내 허락이 없더라도 자하나 마법사들은 아리아의 출입을 막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게… 저 봤거든요."
"뭐를?"
"비행선이요!"
"……"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아리아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일렌이 말해 줬어요! 하늘을 나는 배라고요.
하늘을 날 수 있다면 마탑이나 해안가 호텔에서보다 더 멀리까지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 그렇지."
"그럼 뉴렌달도 더 잘 보일 거고, 바다도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으니까… 꼭 하늘에서 제 눈으로 아렌달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너무 밝게 말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리아는 생각보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구나. 볼튼은 높은 곳이라면 질색을 하는데."
"정말이요? 볼튼님은 소드마스터인데도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구나."
"볼튼의 말로는 무서운 게 아니라 지면에서 발이 떨어지는 게 싫은 거라고 하더구나."
"그건… 핑계네요."
"그치?"
내 말에 빙긋 웃은 아리아는 나를 보며 다시 말했다.
"아무튼, 자하님이 그랬어요. 아빠가 함께 오셔서 허락을 해 주셔야 비행선에 태워 주실 거라고요. 그러니까 다음에 같이 마탑에 가 주세요."
"흠- 근데 아직 테스트가 다 끝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너를 비행선에 태워 주기에는…"
"아빠는 비행선에 타 보셨다면서요."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하는 아리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리아가 이렇게 매달리면서 부탁하는 게 얼마만 인지, 내심 내가 능력 있는 아버지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자하에게 확실히 안전하다는 확인이 되면 그때 타게 해 줄게."
"정말요? 정말 비행선에 태워 주실 거죠?"
"당연하지.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비행선 이야기는 비밀이다. 알겠지?"
"와- 고마워요. 아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아리아를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가자 샤를로트가 나를 반겨 줬다.
"아리아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그럴 일이 있어. 나중에 샤를로트에게도 알려 줄게."
"어차피 알려 줄 거면 지금 말해 주지…"
비행선에 대해 숨기는 나를 샤를로트가 살짝 흘겨봤다.
마치 어린 시절의 샤를로트를 떠올리게 하는 눈빛에 나는 살짝 물러나며 말했다.
"나중에… 지금보다 나중에 알게 되면 더 감동하게 될 거야."
"감동이요?"
"그래. 처음 뉴렌달에서 바다를 봤을 때보다 더 큰 감동을 느끼게 해 줄게."
그 말에 처음 바다를 봤을 때가 떠올랐는지 샤를로트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정말이요? 그게 가능해요?"
"물론이지.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줘. 알겠지?"
내 말에 샤를로트는 소녀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대륙에서 일어나는 귀찮은 일들에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리아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마탑에 들리며 비행선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이 정도면 갑자기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부유 마법이 갑자기 해제되더라도 천천히 지면으로 가라앉도록 새로운 마법 장치들을 달았으니 외부의 공격이 없는 한 비행선이 추락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비행선이 공격받을 일이 있나? 혹시 몰라서 보호 마법도 몇 겹으로 설치해 놓았잖아?"
마법 무기를 이용해 보호 마법의 성능도 확실하게 확인해 놓은 상태였다.
사실상 비행선을 추락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물건을 만들어 준 자하와 마법사들이었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50인이 탈 수 있는 비행선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아니- 엄청나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지. 역시 마법사들이야."
내 목소리에 자하가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뭐지?"
"이렇게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었으니, 데우스님께서도 약속하신 것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비행선의 성능을 개선할 때마다 보너스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하하- 잊으신 건 아니시죠?"
"얼마 전에도 받아 가지 않았었나? 분명 그때도 안전장치의…"
"그때 만든 안전장치는 한 번에 비행선이 떨어지지 않게 만든 보조 부유 장치였고, 이번에 만든 안전장치는 비행선이 천천히 가라앉도록 만든 중력 장치입니다.
엄연히 다른 장치입니다."
"……"
자하의 설명에 다른 마법사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자하의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마법은 전혀 다른 마법입니다. 딱 보시면 마법진의 형태부터 다르지 않습니까?"
"맞아요. 마법진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마법이고, 같은 안전장치겠어요.
분명 다른 마법을 이용한 새로운 장치를 만들었고, 그로 인해 비행선의 성능이 다시 한번 개선된 거랍니다."
자하의 의견에 목소리를 더하는 마법사들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볼튼에게 말했다.
"다른 건가?"
내 물음에 볼튼도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제가 듣기에는 두 마법이 별 차이가 없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그렇지?"
"보, 볼튼! 마법사가 아닌 자네는 모르겠지만, 이건 엄연히 다른 마법이야.
차이가 없다는 말은 자네가 마법사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이네."
"맞아요. 볼튼님은 소드마스터니 마나에 대해 아시잖아요? 잘 느껴 보시면 부유 마법과 중력 마법은 마나의 흐름이 다르다는 것을 아실 거예요."
볼튼을 설득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마법사들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날강도들을 봤나! 내 주머니를 털기 위해 작정을 했네."
"주, 주머니를 턴다니요! 저희는 정당하게 약속된 보너스를 받으려고…"
"이제 보니 나를 호구로 알고 있었군."
"허업!"
내 말에 자하가 입을 다물자 마법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 마탑주. 그럼 저희는 마법 연구를 위해서 그만…"
"이, 이 녀석들! 나만 남겨 두고 도망칠 생각이냐!"
"그, 그럼 뒤를 부탁합니다. 마탑주."
뿔뿔이 흩어지는 마법사들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 이런 대단한 물건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우습네."
"하하- 그, 그렇습니다. 마법사들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하-"
억지웃음으로 조금 전 상황을 무마하려는 자하에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모습에 자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마나의 흔들림이… 이건 공간 이동?"
자하의 말에 나도 자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달리아가 돌아온 것 아니야?"
"달리아는 얼마 전 마탑에 돌아와서 아직 다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가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
"그, 그게…"
자하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 마탑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무리 안에서 한 아이가 쓰러지며 모습을 보였다.
"아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