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불필요한 희생이 없기를 바라던 내 기대와 달리 혁명의 붉은 물결은 찐득한 핏빛으로 변해 갔다.
"아스타나 왕국에서의 혁명은 사실상 끝난 것 같습니다. 혁명을 이끌던 붉은 바람의 지도자들은 모두 빅터 국왕 앞으로 끌려가 본보기로 삼아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때는 아렌달의 미래가 되어 주길 바랐던 인재들이 아니었던가. 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거의 실시간으로 봤기 때문에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중앙대륙의 혁명세력들도 아스타나 왕국의 사건을 듣게 된다면 이제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겠군요."
혁명세력의 지도자가 정말 평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움직인다면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바라던 이들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데우스님. 중앙대륙에서 새로운 영상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혁명은 끝났군."
* * *
-쾅쾅쾅
사방에서 들려오는 폭음에 샌더스가 동지들에게 소리쳤다.
"제기랄! 전부 뒤로 물러나라! 마을로 돌아가!"
샌더스의 목소리는 폭음에 가려져 동지들에게 닿지 않았지만, 동지들은 이미 그 지시가 있기 전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안 돼. 다 죽고 말 거야. 귀족들이 우리를 다 죽이고 말 거야."
"죽기 싫으면 일어나! 지금 붙잡히면 진짜 죽는다고!"
"도망쳐라! 마을로 도망쳐라!"
형제단의 사상가들은 절망에 빠져 주저앉은 동지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힘들게 점령했던 귀족들의 영지를 다시 빼앗기고, 거점으로 삼았던 마을도 잃어 갔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전투로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으며, 스스로 혁명의 붉은 두건을 벗는 동지들도 나타났다. 혁명의 이름 아래 모였던 형제단의 동지들도 절망적인 상황에 동력을 점점 잃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샌더스의 말에 동지들 모두가 동의했지만, 누구도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침묵하는 동지들을 보면서 노아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우리의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런 뜻이었습니까?'
혁명의 실패를 장담하는 데우스의 말에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노아였다. 하지만 마법 무기가 가진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데우스가 아니었던가.
데우스가 노아에게 말했던 실패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혁명의 물결이 아무리 높게 일어난다고 해도 마법 무기로 무장한 왕국의 군사력 앞에서는 그저 작은 파도에 불과했다.
침묵하는 동지들을 바라보며 노아는 앞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직 우리는 더 싸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팍스 영지나 거점이 되어 주는 마을이 많습니다. 겨우 몇 번의 전투에서 밀렸다고 우리의 혁명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저들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항해 봤자 동지들의 희생만 늘어날 뿐입니다.
왕국에 대항하기보다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다가 동지들이 모두 흩어지면 어떻게 하죠?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한 동지들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동지들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자는…"
"그때가 도대체 언제입니까!"
노아의 말에 샌더스가 소리쳤다.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상으로 일어난 혁명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란 도대체 언제입니까?!"
"그, 그건…"
"왕국과 귀족들을 무찌르고 평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차별 없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바라고 일어난 형제단입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더 나은 세상을 바라고 일어난 형제들이란 말입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세상이 정말 올 수나 있는 겁니까?"
샌더스의 말에 동지들의 시선이 노아에게 집중되었다. 그 시선들을 느끼며 노아는 다시 한번 데우스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은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은…'
"지금은 당장은 어려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올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노아에 샌더스와 동지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노아가 답을 내어 주지 못하자 샌더스는 이를 갈며 말했다.
"조시.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너와 연결된 그분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줘."
"그건 곤란해. 나는 목숨을 걸고 그분들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혼자 가지 않으면 그분들은 절대로 만나 주지 않으실 거야."
"지금 우리 동지들의 목숨보다 그분들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냐!
지금 이 순간에도 붙잡힌 동지들에 고문을 받고, 죽어 가고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냐!"
샌더스의 말에 조시는 당황하며 노아를 바라봤다.
"그, 그렇다면 샌더스 네가 아닌 노아 선생님과 함께 그분들을 만나겠다.
너보다는 노아 선생님이 그분들을 설득하기에 더 좋을 거야."
"……"
갑자기 자신을 붙드는 조시에 노아는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함께 만나겠습니다.
샌더스는 남아서 동지들을 이끌어야 하지 않습니까?"
"후- 알겠습니다.
조시. 노아 선생님과 함께 가라. 그리고 반드시 그분들의 지원을 받아서 돌아와."
"아, 알겠어."
샌더스의 지시로 노아와 함께 마을을 떠나게 된 조시는 멀어지는 불빛을 보며 말했다.
"후우- 선생님. 요즘 샌더스가 너무 급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자칫 잘못해서 동지들이 위험에 빠질까 걱정입니다."
"동지들의 희생을 막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요. 분명 샌더스도 생각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샌더스와 같이 우즈 마을 출신인 조시로서는 샌더스가 여간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혁명을 일으키며 점점 변해 가는 샌더스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샌더스가 아닌 저와 함께 간다고 했던 겁니까?"
"아- 노아 선생님께서는 아렌달 출신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생님과 함께 가겠다고 한 겁니다."
"네?"
조시의 말에 노아는 당황했다.
자신이 아렌달 출신이기에 같이 간다는 말은 형제단을 지원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렌달과 인연이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사실 우즈 마을에서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을 때, 다른 선생님들께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아렌달의 고위 관리자의 아들이라고요."
"……"
"선생님께서 어째서 자신의 배경을 감추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혁명의 큰 뜻을 위해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선생님께서 감추고 계시던 힘을 형제단과 동지들을 위해 써 주시지 않겠습니까?"
조시의 말에 노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메이더스 국왕은 에나플 국왕이 보낸 영상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저걸 맞으면 살 수 없겠지. 오가스 백작과 플로렌스 백작은 정말로 죽었나 보군."
그래도 소드마스터이니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던 기사들도 영상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에나플에서는 저걸 어떻게 구한 거지?"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탈린 후작이 아렌달 군의 주둔지에 밤에 몰래 숨어 들어가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탈린 후작? 그 탈린 후작이 쥐새끼처럼 몰래 숨어 들어가 훔쳐 왔다고?"
중앙대륙, 아니- 이세계제일검을 논하던 사람이 도둑질을 해 왔다는 말에 메이더스 국왕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에나플에서는 탈린 후작이 가지고 돌아온 아렌달의 무기를 연구해서 새로운 마법 무기를 만들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상을 나에게 보낸 이유는 손을 잡더라도 에나플이 우위에서 손을 잡겠다는 말이겠군."
훔친 무기를 가지고 콧대를 높이는 꼴이 여간 우습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과 손을 잡겠다는 에나플 국왕의 메세지에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신형 마법 무기의 성능 테스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구형 모델보다 화력 면에서는 확실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다만 아직 실전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는 더 많은 테스트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아렌달의 마법 무기가 부럽기는 하지만, 마법 무기를 테스트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마법 무기를 다루는 건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보통의 인간은 마법 무기에 제대로 맞으면 한 방만 맞아도 죽는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실전 테스트가 필요하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깥의 몬스터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잠깐. 어차피 사람을 상대로 쓸 물건 아닌가? 그렇다면 몬스터가 아닌 사람에게 테스트를 해 봐야지. 마침 좋은 실험체들도 많이 나타난 것 같은데 말이야."
* * *
화면에 나타난 영상은 메이더스 왕국에서 보내지는 영상이었다.
평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공격에 화면 붉은 흔적이 가득했다.
"내가 보낸 메세지는 그냥 무시하기로 한 것 같군."
"동대륙이라면 몰라도 중앙대륙에는 아직 영향력이 적으니까요.
특히 메이더스 왕국이라면 중앙대륙에서도 패자라 불리는 왕국이지 않습니까?"
짧은 영상이었지만, 루이 국왕이 빅터 국왕 이상으로 호전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메이더스 왕국에 들어가 있는 상단에게 몸을 사리라고 전달해 줘.
괜히 루이 국왕이나 혁명세력과 엮여서 피 보지 말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하루하루 중앙대륙의 소식이 전해졌다.
오늘은 어느 왕국에서 얼마나 많은 평민이 죽었는지, 또 어느 영지의 어떤 마을이 파괴되었다든지 같은 듣는 것만으로도 우울해지는 뉴스들이었다.
"그람 왕국에 있는 주둔군을 복귀시키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람 왕국이나 중앙 대륙의 상황을 보면 잠시 물러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람 왕국과 협약으로 언제든지 다시 우리 군대를 보낼 수 있지 않습니까?"
"흠- 역시 그게 좋을까?"
그동안 그람 왕국에 투자한 것이 많았기에 아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리오의 판단이 더 옳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지금 돌아가는 걸 보면 잠시 피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조금 있다가 군사회의에서 주둔군의 후퇴를 명령해야겠군."
그때 테이블 위에 있던 통신 마나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메세지! 지금 핫라인을 보낸 게 누구지?"
-데우스님. 헤돈입니다.
곧 군사회의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핫라인 통신이라니.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람 왕국에 있는 주둔군이 혁명세력과 엮여서 전투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혁명세력과 엮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분명 혁명세력과 엮이지 않게 주의하라고 지시를 내렸을 텐데?"
-아무래도 주둔군이 아렌달의 지시를 어기고 혁명세력과 연결되어 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혁명세력을 추격하던 왕국군과 시비가…
헤돈의 통신에 리오도 한숨을 내쉬었다.
"데우스님. 당장이라도 주둔군의 회군을 지시해야…“
그리고 그런 노아의 한숨을 무시하며 헤돈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데우스님. 그리고 그람 왕국의 형제단에서 노아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