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현대인-144화 (144/169)

144화

"아렌달에 후계자는 없다."

내 발언에 리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약을 위해서라도 아가씨들 중 한 명에게 후계자 교육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내 아이들은 아렌달의 지배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후계자도 삼지 않기로 했다."

"그럼 아렌달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있잖아?"

"데우스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실 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리오가 그랬지? 리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 수석행정관 자리는 넘겨주지 않는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자리를 내주지 않을 거야."

"아니- 거기서 저를 핑계로 댄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리오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리오나 몇몇 사람들은 후계자가 없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기사 출신의 충성심이 높은 사람들은 내 결정을 쉽게 받아들여 주었다.

"역시… 데우스님이시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데우스님을 대신할 인물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데우스님께서 오랫동안 아렌달을 이끌어 주시는 것이 아렌달을 위해서도 더 좋은 일일 것입니다."

"헤돈경! 볼튼경! 만약의 일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만약의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헤돈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데우스님의 안위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게 맹목으로 충성하는 헤돈과 볼튼의 모습에 리오와 행정관들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나름대로 생각해 둔 아렌달의 미래는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시스템을 바꾸기에는 백성들의 인식이 조금 더 변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갑작스럽게 병이 걸리거나 객사를 하지 않는 이상 아직 미래에 대비할 시간은 있잖아?

더 나은 아렌달을 위해서 조금 더 고민해 보겠다는 것이니까 그렇게 걱정하지는 말라고."

"후- 알겠습니다. 데우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요."

"데우스님의 뜻을 따라 지금의 아렌달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앞으로 아렌달이 나아갈 방향 역시 데우스님께서는 생각하고 계시겠죠. 저희는 그저 데우스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 * *

새로운 문화와 기술로 아렌달이 새로운 동력을 얻는 동안 아렌달 밖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람 왕국에서 시작된 붉은 물결이 중앙대륙을 넘어 동대륙으로 흘러들어 온 것이다.

"그람 왕국이나 중앙대륙의 왕국들은 지금 새로운 흐름에 변화를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아스타나 왕국은 어떠한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렌달의 평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었는가!

그들은 귀족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그들은 귀족들에게 수탈당하지 않는다!

우리와 그들의 다른 점이 무엇이라는 말이냐!

어째서 우리만 머리를 숙이고 수탈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하지만 직접 본 적도 없는 아렌달과의 비교는 아스타나 왕국의 백성들에게 반향을 주지 못했다.

일부 깨어난 평민들이 세상의 부조리를 역설해 봐야 배운 게 없는 대다수의 평민들에게는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사그라들던 붉은 물결이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깊숙한 부분에서 조심스럽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아렌달에서 추방된 사상가들은 노아의 말을 믿고 중앙대륙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그람 왕국에서 우리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야?"

"데우스님의 말씀대로라면 틀림없어. 그때 분명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람 왕국에서 뭘 한 거냐고…"

분명 그람 왕국에서 무언가 변화가 보였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노아에게 그런 말을 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 말에 동지들의 얼굴에 다시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그람 왕국까지만 갈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의욕을 가지고 걸음을 옮기는 동지들을 보며 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노아는 동지들과 같이 웃을 수는 없었다.

노아가 들었던 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너희의 사상은 아렌달뿐 아니라 다른 왕국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불 보듯 뻔한 일이니까. 지금 권력자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평민이 아무리 모여 봐야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지금은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은…'

뉴렌달 항구에서 배를 타는 방법이 아니라면, 그람 왕국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스타나 왕국을 거치는 루트뿐이었다.

그 루트를 이용하기 위해 노아와 동지들은 서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평민인 노아와 동지들이 아스타나 왕국으로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빈손으로 쫓겨나는 바람에 식량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라 상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려웠다.

당연히 귀족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르비크 왕국의 지방 영지를 지나오면서 죽을 뻔했던 위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귀족들의 사병을 피해 험지로 도망치다가 몬스터를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노아와 동지들은 꾸역꾸역 서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결국 아스타나 왕국의 국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막상 아스타나 왕국의 국경에 다가오니 다른 곳으로 쫓겨난 동지들이 걱정되네."

"그 녀석들도 분명 그람 왕국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거야."

"아직 우리도 그람 왕국까지 가려면 멀었다. 아스타나 왕국은 나르비크 왕국보다 평민이 살기 더 어려운 왕국이야. 방심하지 말고 가자."

다시 의지를 세우며 아스타나 왕국의 국경을 넘은 노아와 동지들은 귀족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아렌달에서 추방당하고 서쪽을 향해 이동하던 노아와 동지들은 아스타나 왕국의 서쪽 어느 영지에서 영주의 창고를 털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같이 붉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에 노아와 동지들은 어떤 희열을 느끼게 되었다.

"우, 우리는 아렌달에서 온 붉은 바람이다!

너희들의 리더를 만나고 싶다."

구심점이 없던 혁명세력은 노아와 동지들의 등장을 환영하며 그들을 맞아 주었다.

"우리가 배운 사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십시오."

"흩어져 있는 세력을 모아 세상을 바꿔 주십시오.

자신들을 이끌어 달라는 목소리에 노아와 동지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바람의 이름을 이어받은 아스타나 왕국의 혁명세력은 노아와 동지들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렌달과 다르게 평민들의 삶이 고단했던 만큼 동지들의 목소리에 쉽게 빠져들며 신분의 벽이 만드는 차별과 부조리에 맞서겠다는 뜻을 보여 주었다.

"중앙대륙에는 붉은 형제단이라는 혁명세력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가르침을 배운 혁명의 중심이야.

노아. 네가 중앙대륙으로 가서 그들을 이끌어 줘야 한다.

아스타나 왕국에서 세력을 키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중앙대륙의 혁명세력과 힘을 합쳐야만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동지들의 뜻에 따라 노아는 바다를 건너 그람 왕국으로 돌아왔다.

데우스의 말과 다르게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그람 왕국의 모습에 노아가 실망하려는 찰나. 위스타드 항구를 오가는 몇몇 사람이 노아의 눈에 들어왔다.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붉은 징표에 노아는 희열을 느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붉은 형제단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아렌달에서 온 노아라고 합니다."

형제단을 이끌고 있던 샌더스는 위스타드에서 전해진 소식에 한달음에 위스타드로 달려왔다.

그리고 형제단 동지들에 의해 감시 받고 있는 노아의 모습에 기쁜 함성을 내질렀다.

"선생님! 노아 선생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우즈 마을에서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던 샌더스입니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샌더스.

역시 당신이 중앙대륙에서 붉은 물결을 만들고 있었군요."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린 노아에게 서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샌더스였다.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샌더스 같은 사람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 역시 샌더스와 형제단의 동지들을 보니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당연한 말씀입니다.

노아 선생님. 붉은 형제단과 함께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형제단과 함께하기 위해서 중앙대륙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노아의 대답에 샌더스가 동지들에게 말했다.

"다들 뭐 해! 아렌달에서 오신 귀한 분이다.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가르침을 주실 분이란 말이다. 어서 본부로 돌아가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샌더스와 동지들의 모습에 노아는 아렌달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실패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요? 두고 보십시오.

우리의 사상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말입니다.'

* * *

아렌달 상단은 대륙 곳곳 안 가는 곳이 없을 정도로 크게 움직이는 상단이었다.

동대륙은 물론이거니와 중앙대륙에서도 가장 멀리 있는 왕국까지 아렌달 상단의 손이 뻗어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아렌달의 이득을 위해서 아렌달 상단이 몰래몰래 하는 일도 많았다.

다른 왕국의 중요 좌표를 따거나, 마법 통신망을 만들기도 했고, 지금에 와서는 버려진 광산 등을 사들여 마나 스팟을 시추해 내는 일도 하고 있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계 곳곳의 정보를 아렌달로 모아 주는 일이었다.

"호오~ 중앙대륙에도 멋진 바다가 있었군.

나중에 여유가 생긴다면 저기 있는 작은 섬에 별장이라도 지어서 놀러 가야겠어."

"지금이라도 명령만 내려 주시면 섬 채로 사들이겠습니다."

"섬을 사들이겠다고? 오랜만에 아렌달로 돌아와서 못 하는 말이 없군. 랄프."

"못 하는 말이라니요? 아렌달 상단의 자금력이라면 저런 작은 섬은 수십 개, 아니- 수백 개를 사고도 남을 겁니다.

데우스님께서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왕국이라도 사 오겠습니다. 하하-"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랄프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정말로 마음만 먹으면 중앙대륙의 소왕국 정도는 살 수 있을 만큼 능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보다 요즘 중앙대륙의 정세는 어때?

메이더스 왕국이나 에나플 왕국의 상황이라던지, 그 붉은 두건을 쓰고 다니는 형제단인가 뭔가 하는 혁명세력의 이야기라던지."

"메이더스 왕국과 에나플 왕국은 딱히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마법 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을 뿐이죠. 어떤 결과물이 나오면 그때서야 움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 왕국의 움직임에 다른 왕국들도 긴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중앙대륙은 평화로운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겨우 전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평화를 입에 올리기에는 우스운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외견상으로는 분명 평화로운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형제단은 조용히 세력을 키우는 모습입니다. 이제 지방 영주의 병력으로는 형제단을 제압하기 쉽지 않을 정도니까요.

감추고 있는 힘을 드러낸다면 언제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세력을 키우는 형제단에 놀랐지만, 그래도 그 세력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이 이상으로 세력을 키우게 되면 어떻게 될지 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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