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그동안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들어오던 뉴스를 텔레비전을 통해 영상과 함께 보기 시작하면서 아렌달 백성들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수준이 점점 더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간간이 공개하는 아렌달 밖의 모습을 보며 자신들이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다른 왕국의 백성들은 저런 환경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모르겠군."
"아렌달이 베르겐 왕국에서 독립한 게 몇 년이나 지났다고… 어디 가서 그런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고."
"나는 그때의 기억 따위는 다 지운지 오래라서 말이야.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냥 죽고 말 거야."
어느새 아렌달의 백성들에게 왕국에서의 삶은 그저 한잔 술의 안줏거리로나 삼을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리비아 상단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그래도 브레튼은 다른 왕국보다 낫다고 하더라고.
기차역도 몇 개나 있어서 오가기도 좋고, 한때는 같은 베르겐 왕국의 일원이었던 만큼 문화적인 차이도 거의 없다고 하더라.
나름대로 스포츠도 즐길 수 있고, 연극이나 예술 등의 문화생활도 할 수 있다는 걸 보면 브레튼도 괜찮은 나라인 것 같아.
그리고 의원님들도 과거 영주님 시절과 다르게 백성들을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니 앞으로도 더 나아지지 않겠어?"
"베르겐 왕국도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 같던데.
보리스 국왕 폐하께서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잡으신 이후에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잖아? 자체적으로 철도를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렌달의 기술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니까.
거기에 펠릭스 왕자님이나 어린 학생들을 아렌달에 유학 보내는 것을 보면 미래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는 것 같고 말이야.
이런 걸 보면 보리스 국왕 폐하께서는 분명 성군으로 기록되실 거야."
"그래 봐야 우리 데우스님과 아렌달이 최고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그건 당연한 이야기잖아. 하하-"
이렇게 주변 왕국의 상황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긴 백성들이었다.
그런 백성들을 보면서 귀족들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귀족들도 과거와 같이 권력자로서 영향력을 끼치려면 더 많은 자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자본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에 우리 가문에서는 베르겐 왕국에 새로운 생산 시설을 만들 생각입니다.
다행히 나와 친척인 메티스 남작님께서 생산 시설을 만들 땅을 내어 주기로 했습니다."
"메티스 영지요? 메티스 영지라면 아렌달과 제법 거리가 있는 영지 아닙니까?
물건을 다시 가져오기에 운송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
"베일리 영지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금방입니다.
아렌달보다 훨씬 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으니 나쁘지는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척인 메티스 남작님에게도 체면을 세울 수 있으니 가문의 명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흠- 들어 보니 괜찮은 방법이군요."
"데우스님께서도 과거에 스톨과 엔나, 기르만 같은 영지에 뉴렌달 브랜드의 생산 시설을 만들어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지 않았습니까?
물론 아렌달 밖으로 자본이 나가는 것이니 연방의 허락은 받아야겠지만, 데우스님이시라면 분명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 가문에서도 같이 투자를 할 수 없겠습니까? 우리도 사업을 확장할 필요가 있어서…"
"생산 시설을 더 크게 만들어야겠군요. 하하-"
귀족 가문 간의 협력으로 사업의 규모를 키우거나, 아렌달 밖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며 생산성을 키우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심지어 스톨이나 엔나, 기르만 같이 이미 노동력이 풍부했던 영주 가문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분양하거나 거래소에 지분을 넘겨 자본을 끌어모았고, 그 자본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규모로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과거 영주로서 가지고 있던 위세보다 더 큰 위세를 뿜어내는 영주 가문의 모습은 마치 지구의 국제적 기업들을 보는 것 같았다.
"군사력만 없다 뿐이지 과거 영주 시절보다 더 잘나가는 것 같네."
"아렌달의 품 안에 있는데 군사력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아렌달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귀족 가문들도 무너질 일이 없는데요."
"귀족 가문들 모두 아렌달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건가."
"아렌달이 지켜 줄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그렇게 많은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렌달이 보호해 줄 역량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진작에 각자 살길 찾아서 아렌달을 떠났을 겁니다."
라이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생각하면, 아렌달의 귀족들은 어느 왕국을 가도 환영받을 사람들이었다.
다른 왕국에서 작위와 영지를 받으면 과거와 같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지만, 아렌달에 남아 새로운 형태의 권력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참! 스톨 가문에 약속했던 채널은 조금 더 기다려 줘야 할 것 같아.
홈쇼핑으로 인해서 통신량이 늘어날 것을 대비해 새로운 중계소를 만들고 있어서 말이야."
"제가 생각한 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통신 마나석의 보급도 필요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요. 그동안 신상품을 준비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워낙 많아서 홈쇼핑은 신경도 못 쓰고 있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네."
할 일이 많다는 말치고는 여유로운 라이언이었다.
그때, 라이언이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근데 이제 슬슬 정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
"후계자 말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후계자 이야기에 라이언을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데우스님께서 아무리 모른 척한다고 해도 아렌달의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오늘의 방문 목적은 그것이었군."
"데우스님. 후계자 문제를 확실히 해 두셔야 나중에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후계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를 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한 때, 영주였던 라이언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와는 무게감이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 아렌달은 과거 2천 명의 영지민을 가지고 있던 조그만 영지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데우스님께서 후계자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신다고 해도 결코 가벼운 문제가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
"아렌달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이제는 결정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톨은 물론이거니와 엔나와 기르만은 진작부터 후계자를 정하고 그 후계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영주 가문뿐 아니라 체스터나 리버 가문같이 아렌달에 들어와 있는 귀족 가문들도 각자가 가진 시스템에 따라 후계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렌달의 귀족 가문 중에 아렌달 가문만이 유일하게 후계자 문제를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미뤄 봐야 아이들에게 꼬이는 파리만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샤를로트가 아들을 낳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지금이라도 아리아의 배우자를 정해서 아렌달의 후계자에 적합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니- 데우스님의 뜻을 이을 수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아렌달의 지배자라는 자리에 어울릴 인재를 후계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라이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정 안 되겠다면… 아리아에게라도 후계자 교육을 하셔야 합니다."
"아리아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리아가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렌달 가문의 아이로 태어났으니 그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겁니다."
"책임과 의무라…"
어느새 처음 만났을 때의 샤를로트 만큼 자란 아리아는 샤를로트를 너무 닮아서 가끔씩 나를 놀래키기도 했다.
그런 아리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아리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아리아는 앞으로 뭘 하고 싶어?"
내 물음에 아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그림만 그릴 수 있으면 뭐가 되어도 좋아요.
가끔씩 마탑이나 해안가 호텔에 올라가서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으면 더 좋고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아리아가 말했다.
"갑자기 이렇게 말하시는 건… 역시 후계자 때문이시죠?"
"……"
"제 짝이 정해진 건가요?"
아리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고갯짓에 아리아는 놀라며 다시 물었다.
"여자인 저를 아렌달의 후계자로 가르치실 생각이세요?"
"네가 원한다면…"
내 대답에 아리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똑똑한 아이였으니 자신이 아렌달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했을 것이다.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요? 아리스나 아리엘에게 후계자로 만드실 건가요?"
"네가 하기 싫어하는데 아리스와 아리엘이 하고 싶어 할까?"
내 말에 아리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안 한다고 할 거예요."
"그렇지?"
"후- 그럼 어쩔 수 없이 제가 해야 하는 거였네요."
한숨을 쉬는 아리아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원하지 않으면 너에게도 아렌달을 맡기지 않을 거란다."
"그러면요? 그럼 아렌달은 누가 물려받아요?"
"누군가는 아렌달에 어울리는 사람이 나타나겠지.
그때까지는 내가 계속 해 먹을 생각이야."
"…정말 저나 동생들에게 아렌달을 물려주지 않으실 생각이신 거예요?
이 아렌달은 아빠가 만들고 키운 나라잖아요. 그런 소중한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고요?
아빠. 어디 아프세요?"
당돌하게 말하는 아리아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말하는 것도 그때의 샤를로트를 똑 닮았네.'
"아리아. 지배자라는 자리가 얼마나 귀찮고 힘든 자리인지 아니?
그런 자리를 원하지도 않는 아이에게 시키고 싶지는 않단다.
어차피 지배자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는다고, 너희에게 가문의 이름까지 물려주지 않을 건 아니니까.
설마 내가 아렌달 가문의 재산까지 다른 사람에 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만…"
"너희는 그저 너희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마음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것이고."
"정말이요?"
조금 감동했는지 눈을 깜빡이는 아리아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그리고 네 아빠는 꽤 욕심이 많아서, 오랫동안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생각이거든."
솔직히 말해서 아직 이 아렌달의 지배자라는 자리를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조그만 아렌달 영지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뤄 온 나의 성과를 오롯이 내가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아렌달의 발전을 가장 앞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현대 지식과 현대인의 시선으로 이세계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아직도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기에 아렌달의 지배자만큼 좋은 자리도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