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취조실로 불려 온 노아는 내가 앉아 있자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어째서 데우스님께서 여기에…"
"그냥 너희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서 말이야.
노아. 네가 마지막이다."
노아는 마지막이라는 말에 나를 경계하면서도 내 맞은편에 놓은 의자에 앉았다.
"너 역시 뜻을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건가?"
"……"
"너희의 이상이 아렌달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아렌달의 백성들이 그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말이야."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의 벽을 없애겠다는 뜻은 좋아.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니…
말로만 들어도 멋진 세상이야.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
내 물음에 노아는 확신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신분의 벽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부당함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당연했던 차별이 없어지고, 사람들은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더 나은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일하고 모두 동등하게 나눈다면…"
"지금까지 백성들이 모은 재산은?"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것 역시 똑같이 분배하는 것으로…"
"결국, 지금까지 백성들이 노력해서 모은 재산은 다 빼앗겠다는 말이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뜻을 이해한다면 백성들도 받아들일 겁니다."
여전히 확신에 가득 찬 모습에 노아는 절대 교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너무 믿고 있어.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욕심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
"더 많은 일을 하더라도 적게 일하는 사람과 똑같이 나눠야 한다면 누가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할까?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그 보상이 미미하다면 누가 더 열심히 일하려고 할까?
그리고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이 과연 백성들을 휘두르지 않을 수 있을까?"
내 다그침에 노아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여전히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하다면 나 역시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아렌달에 필요한 인재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쉽게 됐군. 너희들에 대한 처벌이 곧 내려질 거야."
처벌이라는 말에 노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듣지 못하겠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노아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리오가 많이 안타까워하겠군."
리오라는 이름에 노아가 나를 돌아봤다.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떨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노아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라. 리오에게는 피해가 없을 테니까.
리오는 네가 저지른 죄를 무시해도 될 만큼 아렌달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니까."
내 말에 노아는 안심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
"그람 왕국에서 뭘 한 거냐?"
사실상 교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별된 노아와 붉은 바람의 동지들은 아렌달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사형을 시키기에는 그들이 아렌달에서 저지른 죄가 너무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불온한 사상이 언젠가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렌달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의견이었다.
"어차피 영원히 아렌달로는 돌아오지 못할 녀석들인데 무슨 걱정입니까?
그리고 혹여나 아렌달로 돌아오더라도 백성들이 저들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문제없습니다."
"다른 왕국이라면 모를까 아렌달에서 신분의 벽을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죠."
"아렌달의 평민 중에는 귀족들 못지않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맞아. 귀족이라는 신분이 뭐가 중요하겠어. 대형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들이나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웬만한 귀족 가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잘살고 있잖아."
"귀족 가문이 사업을 하는 것처럼 평민들도 사업을 할 수 있는 것만 봐도 아렌달이 평민들에게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알 수 있는 거지."
귀족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전과 같이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오히려 평민들이 느끼고 있었다.
귀족들 역시 신분으로 평민들을 지배하는 것보다 자신의 능력으로서 평민들 위에 서고 싶어 했다.
더 큰 사업으로 가문의 위세를 높이고, 더 많은 일자리와 자금으로 평민들을 품에 안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었다.
"교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별된 녀석들은 족쇄를 채워 아렌달 밖으로 추방했습니다."
리오의 보고에 그를 바라보자 리오는 씁쓸하게 웃었다.
"녀석이 선택한 일입니다. 가족들에게도 노아는 죽었다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리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겠지."
"감사합니다. 데우스님."
리오의 감사 인사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렇게 리오가 보고를 마치고 나가자 볼튼이 내게 말했다.
"그런데 아렌달 밖에서 다시 그 뜻을 펼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 언젠가 그들의 사상이 세력을 키워 다시 아렌달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건 불가능할 거야."
내 확신의 말에 볼튼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그람 왕국에서는 붉은 바람의 영향을 받아 폭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 폭동이 중앙대륙의 자른 왕국들에까지 번지고 있고요."
"폭동이 번지는 이유는 왕국의 권력자들이 그들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들이 강력한 세력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니까."
"네?"
"아직까지 왕국에서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았다고."
"그, 그렇군요."
만약 노아나 붉은 바람의 동지들이 다시 모여 사상을 펼치려고 해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의 사상을 펼치기에는 왕국이 가지고 있는 군사력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었다.
붉은 바람의 혁명 세력들이 마법 무기를 막아 낼 힘을 가지지 못하는 이상 그들의 뜻은 결코 왕국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럼 추방된 녀석들은 평생 헛된 꿈을 안고 살아가겠군요."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 어떤 권력자가 녀석들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왕국을 바뀌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아렌달의 사상도 따지고 보면 이세계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상이었지 않은가.
귀족들이나 평민들이나 지금의 상황이 더 좋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지, 나라는 권력자로 인해서 반 강제적으로 주입된 사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붉은 바람의 사상도 어떤 권력자가 받아들인다면 충분히 세력을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사회주의 사상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는 뻔하지만…
그래도 이 세계는 지구와 다르니까,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
신도 마법도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정말 노아와 붉은 바람이 바라는 유토피아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메이더스 왕국이 마법 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자 에나플 왕국도 뒤쳐질 수 없다는 듯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중앙대륙의 패권을 다투는 두 왕국의 경쟁에 다른 왕국들은 숨을 죽이며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칫 두 왕국의 칼끝이 자신들을 향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자원을 모으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메이더스 왕국의 생각을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군사력을 키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입니다."
"메이더스 왕국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대륙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다른 왕국들과 연합을 맺어 메이더스 왕국의 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과연 메이더스 왕국에서 다른 왕국들을 공격하겠습니까?
자칫하면 에나플 왕국에게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르는데요?"
이런저런 가능성을 두고 왕국의 권력자들은 떠들어 댔다.
그러나 누구 하나 메이더스 국왕이 왜 이렇게까지 마법 무기에 돈을 쏟아붓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아직도 부족하다는 말인가?"
"소드마스터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마법 무기를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는데, 아직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국왕 폐하."
메이더스 국왕의 호통에 마법사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이미 바깥의 몬스터를 제압하기에는 충분한 위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이상으로 마법 무기의 성능을 올리기 위해서는 아렌달의 것을 직접 보고 개량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같습니다."
"아렌달의 마법 무기를 구할 수는 있는 건가?"
"……"
침묵하는 마법사들에 국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방법도 없으면서 그걸 말이라고 떠들어 댄 것이냐!"
"죄송합니다. 폐하."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마법사들의 모습에 메이스더 국왕은 귀족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역량으로 부족하다면 다른 왕국이라도 끌어들여야겠다."
에나플 국왕은 자신의 앞에 놓인 메이더스 국왕의 메세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메이더스 왕국에서 우리 에나플에 도움을 요청한 것인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제안을 드린 것입니다. 국왕 폐하."
"말은 그럴듯하군."
메크네스 백작의 말에 피식 웃은 에나플 국왕은 다시 한번 메이더스 국왕의 메세지를 읽었다.
"아렌달의 마법 무기가 왕국의 존속에 위험이 될 정도니 이에 대항하기 위해 왕국 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라니… 메이더스 국왕이 겁쟁이가 다 되었군."
겁쟁이라는 말에 에나플 왕국의 귀족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에나플 국왕만큼은 웃지 않고 메크네스 백작에게 말했다.
"메이더스 국왕이 이렇게 겁을 먹은 이유가 무엇이냐?"
"……"
"말하지 않을 생각인가? 그렇다면 나는 메이더스와 협력할 생각이 없다."
어떻게 해서는 에나플 왕국을 끌어들이라는 메이더스 국왕의 명령을 들었던 메크네스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오가스 백작과 플로렌스 백작의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왕국의 소드마스터인 오가스 백작과 플로렌스 백작이 죽었습니다."
"뭐?!"
"그람 왕국에 주둔하고 있는 아렌달 군을 공격했다가 두 사람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죽었다는 이야기에 웃음을 터트렸던 귀족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허- 소드마스터가 일반 병사들에게 죽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둘이나,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아렌달의 마법 무기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마법 무기 개발에 그렇게 열을 올렸다는 것이냐?"
고개를 끄덕이는 메크네스 백작에 에나플 국왕은 다시 한번 메이더스 국왕의 메세지를 확인했다.
"왕국의 존속에 위험이 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메크네스 백작의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에나플 국왕에게 모였다.
그 시선에 에나플 국왕이 왕좌에서 일어났다.
"직접 확인하겠다."